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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광 (53)화 (53/60)

53화

대뜸 튀어나온 말에 유원이 멍하니 그를 내려다봤다. 더운 숨을 씨근덕 내뱉은 태백훈이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괜찮으니 그냥…… 여기 계세요.”

혼탁해진 검은자위가 불안감으로 졸아붙어 있었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아연한 모습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난 사람처럼 옷소매를 꽉 움켜쥔 손이 다시 한번 힘껏 잡아당겼다.

절박한 손짓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유원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소매를 움켜쥔 손이 비로소 스르륵 풀렸다.

해 주는 대로 무릎베개를 벤 태백훈이 숨을 내쉬었다. 찌푸린 미간 사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살며시 그의 가슴에 손을 올린 유원이 손바닥을 위아래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 그가 운을 뗐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잘도 잔다 우리 아가 앞집 개야 짖지 마라 뒷집 개야 짖지 마라 우리 아가 잠들었다

흥얼흥얼 입속을 타고 자장가가 흘러나왔다. 어린 유원이 밤잠을 못 이루고 칭얼거릴 때마다 어머니께서 불러 주던 자장가였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이 잠기운에 젖어 평온해지기까지, 유원은 그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 * *

“에고고, 힘들어라.”

모아 온 땔감과 검불을 말 옆에 한 아름 내려 둔 유원이 고단한 어깨를 주물렀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군데군데 초를 켜 둔 자리를 빼면 동굴 안은 여전히 새벽녘에 잠겨 있었다.

다행히 정성스러운 간호가 통했던지, 이틀 정도 지나자 태백훈의 상태는 확연히 좋아졌다. 스스로 몸을 가누기는커녕 조금만 뒤척여도 고통스러워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왼팔로 몸을 일으키거나 자세를 이리저리 바꾸기도 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나마 약을 잘 챙겨 둬서 다행이다 싶은 한편 의아하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지만 진통약 하나로 이렇게까지 회복이 빠를 수가 있다니. 아무래도 태백훈의 회복력 자체도 상당히 좋은 편인 듯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비단삼 때문에 색욕 촉진을 유발할 수도 있다던 부작용이었다. 지금까지 유원이 봤을 때는 딱히 그런 효력을 보이진 않았다. 역시 그저 가벼운 농담이었던 걸까.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니 부작용도 다르기야 할 텐데.

애초에 약 하나 때문에 여인도 아닌 사내한테 욕정 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멀쩡할 때도 색정에 흥미 없던 사람이 뜬금없이 발정 난 짐승처럼 색을 탐할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잠도 안 오고, 미리 요깃거리를 준비해 둘까 하여 한참 야생 토란을 손질하던 유원은 태백훈을 힐끔 곁눈질했다. 그는 벽에 딱 기댄 채 눈을 감고 곤히 자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벌어졌던 옆구리는 출혈이 멎었다. 상처가 곪지 않도록 두 시진마다 삶은 붕대를 갈아 주고 지혈에 좋은 약초를 붙여 둔 덕이었다. 고을로 내려가게 된다면 의원에게 제대로 치료받아야겠지만 일단 피가 멎은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은 셈이었다.

팔에도 부목을 대 준 덕인지 움직이는 데는 불편해 보였으나 직접적인 통증은 줄어들었는지 앓는 듯한 신음 소리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상태가 호전되면서 태백훈은 누워서 잠을 청하기보단 앉아 있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편히 누워서 쉬라고 해도 조금은 불편하게 있는 편이 쉬는 기분이라 하니 유원으로서도 더는 강요할 수 없었다.

불현듯, 그날 밤 막사에서 몸을 짓누르던 손의 단단한 온기가 떠올랐다. 맨살을 더듬을 때마다 속을 살살 헤집는 것 같던 이상야릇한 감각이 불쑥 되살아났다.

동시에, 입맞춤하던 순간이 상기되었다. 까칠하게 마른 표면과 달리 부드럽고 뜨끈뜨끈하던 입 속.

“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원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아픈 사람을 두고 이런 생각이나 하는 스스로가 불순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래도 비단삼의 효험은 유원한테 단단히 든 모양이었다.

다른 일에 신경을 돌리자. 그래, 불씨를 좀 더 키운다던가.

멀쩡하게 타오르는 불을 쿡쿡 나뭇가지로 찌르는 유원에게 다가온 말이 고개를 당겨 귀에 콧잔등을 문질렀다. 부드러운 온기에 머리를 기댄 유원이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빗어 주며 말했다.

“미안, 바깥쪽은 좀 춥지? 바닥이 좀 넓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끼가 있는 자리를 빼면 동굴 안쪽은 죄다 습하고 딱딱한 돌바닥이었다. 사람은커녕 말도 계속 서 있기엔 좁은 자리라 하는 수 없이 가장자리에 말을 세워야만 했다.

제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라 해도 어둠이 무섭기는 매한가지일 텐데, 주인을 닮은 말이라 그런지 어두운 밤에도 씩씩하게 서서 문을 지키는 모습이 늠름하기까지 했다.

“너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야. 너한테까지 무슨 일이 생겼다면 정말로, 감당 못 했을 거 같거든. 탄이도 막둥이도 안 보이고, 다른 사람들도 어디 갔는지 도통 모르니까.”

밤마다 불안감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곽현욱, 손청준, 연녹수. 다른 사람들의 안위도 중요했지만 특히 막둥이가 가장 큰 걱정이었다. 어디선가 울면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도 아니면 설마 크게 다쳤다거나, 더 나쁜 경우까지 생각이 미칠 때마다 억지로 불안을 내려 둬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백훈의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정말로 다행이었다.

이유 모를 병으로 수년을 앓아 초라하고 앙상해진 어머니만으로도 이미 애가 끓다 못해 문드러졌는데, 만일 태백훈마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면 정녕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을 터였다.

“…아무리 심심하기로서니 말이랑 대화를 주고받으시려고요.”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원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태백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하도 도란도란 정답게 떠들어 대는 통에 있던 잠도 달아날 정도더군요.”

“일부러, 깨우려고 한 건 아니에요.”

부끄러워진 나머지 유원은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마구 때리고 싶었다. 잔뜩 기가 죽은 유원을 바라보던 태백훈이 길게 숨을 골랐다.

“계속 말이랑 떠드실 바에는….”

태백훈은 그나마 멀쩡한 왼팔로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유원이 도와주려 다가갔지만, 필요 없다며 그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몇 번 헛손질한 끝에 겨우 벽면에 기대앉은 태백훈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눈짓으로 까딱 앞쪽을 가리켰다.

“차라리, 나랑 대화합시다.”

“대화하자고요? 영감하고 제가요?”

“왜요? 내가 저 군마에 비해 대화 상대로 별로일 거 같아서요?”

살짝 치켜뜬 두 눈에 묘한 장난기가 비쳤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어색할 거 같은데. 대답 없이 서 있는 유원을 올려다보던 그가 목을 좌우로 돌렸다.

“내가 말보다 못한 상대라 여기신다면 어쩔 수 없지.”

“아, 아닙니다.”

마지못해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유원이 앞에 앉았지만 태백훈은 그쪽이 아니라는 듯 재차 아래를 눈짓했다. 길게 뻗은 그의 다리 쪽이었다.

설마 허벅지 위에 앉으라는 건가. 술에 취해 이성이 흐려진 것이 아니고서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하지만 현재로서 유원과 그의 사이에 앉을 만한 영역이라고는 다리에 올라타는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추우셔서 그러세요?”

“흐음, 조금은, 그런 것도 같고요.”

아무래도 얇은 속내의 말고는 입은 것이 거의 없다 보니 추울 만도 했다. 무릎에 올린 두 손을 만지작거리던 유원이 널린 옷가지를 곁눈질하며 대답했다.

“저기 모포가 다 마르는 대로 얼른 가져다드릴게요. 그리고 말 옆에 앉아 계시면 온기도 보존될 거예요.”

원래 주인 곁에 말을 옮겨 둘 생각으로 다시 움직이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았다.

“그보다는 그대 목소리가 잘 안 들리거든요.”

“제, 목소리요?”

“아무래도 좀 가까이 와 주면 좋을 거 같은데.”

다른 이유도 아니고 소리가 안 들린다고 하니 뭐라고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하기야 동굴 천장이 높아 목소리가 살짝 울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주춤거리며 태백훈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유원이 무릎걸음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혹시 제 무게 때문에 다친 부위에 무리가 갈까 싶어 엉거주춤 걸터앉은 유원을 바라보던 태백훈이 왼손으로 유원을 꽉 잡아당겼다.

“으앗!”

몸이 고꾸라지기 전에 서둘러 두 손으로 벽을 짚었다.

“송구, 송구합니다….”

코앞에 들어선 태백훈의 얼굴에 유원이 헉, 하고 놀라 고개를 뒤로 젖혔다. 빤히 쳐다보던 태백훈이 빙긋 웃었다.

“이제야 잘 들리고, 잘 보이네요.”

그저 눈과 귀가 편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일 텐데도 괜스레 민망하고 수줍었다. 갸름하게 눈을 뜬 태백훈이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리 부끄러워하십니까?”

“그게, 너무 가까운 것 같아서요.”

“평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는 없을 텐데.”

“이렇게까지 가깝게 있던 적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맨정신이 아닐 때였으니까.

“하기야 이렇게까지 어두운데도 그대 눈이 서로 다른 색인 것도 잘 보일 정도로, 마주 본 적은 없긴 하군요.”

태백훈이 실실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조금 들떠 보였다. 마치 도수 높은 술기운에 몸을 의탁해 되는대로 흥겹게 말을 흘리는 분위기였다.

“마치, 취하신 것 같습니다.”

“취했다, 라……. 뭐,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부터 기분이 몽롱하고 들뜬 느낌이거든요.”

몽롱하고 들뜬 느낌이 든다니. 딱히 술과 비슷한 무언가를 준 적은 없는데, 설마 진통약 기운 때문일까? 하지만 그가 약을 먹은 지 일수로만 따져도 벌써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아니면 몸 상태가 좋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진 걸까. 굳이 따지자면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깨어난 뒤부터 줄곧 궁금했었는데.”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던 유원의 목덜미를 그의 왼손이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한테, 뭘 먹였던 겁니까?”

“예?”

“정신을 잃었을 때, 뭔가 삼킨 기억이 있거든요. 그 뒤로 점점 눈앞이 또렷해졌고요. 아무래도 단순한 약은 아닌 것 같은데.”

“녹수 님께서 주신 진통약이었어요. 마침 잃어버리지 않고 갖고 있어서, 그, 급한 마음에 영감한테 썼습, 니다.”

떠듬떠듬 대답을 잇던 유원의 얼굴이 점차 묘하게 붉어졌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던 태백훈이 입꼬리를 슬쩍 비틀었다.

“그래서 친히 입으로 먹여 주시기까지 하고요?”

“그, 그것이…….”

의식이 없을 때라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납작 엎드린 유원이 급히 해명했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약이 너무 써서 혹시나 기도로 잘못 넘어가거나 하면 어쩌나 하고…….”

“다른 의중은 없었다?”

나른한 목소리에 유원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입술의 감촉과 안을 훑던 몽롱한 온기가 다시금 떠올랐으나 모른 척 고개만 가만히 끄덕였다.

잠시 호흡이 서로 교차했다. 옻칠을 입힌 유리알 같은 눈동자 속에 유원이 박힌 듯 깊이 담겨 있었다.

“그리 애타는 표정을 지어 놓고는 그 말을 믿으라고.”

몸을 바짝 당기는 손힘이 단단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다 기억이 나거든요. 그때 그대가 했던 몸짓들 전부 다.”

“…….”

“생각보다 훨씬 당돌하시고, 생각보다 더 엉큼하시더군요.”

입술을 꾹 깨문 유원이 몸을 작게 움츠렸다. 숨을 깊이 들이쉰 태백훈이 유원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뜨끈한 이마가 맞닿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 생각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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