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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4)화 (4/101)

제4화. 날 키워라

“잠깐 얘기 좀 하자.”

평소처럼 일을 마치고 새벽에 올라온 호원은 자고 있던 무휼을 깨워 말했다. 무휼은 단잠을 방해받았음에도 군말 없이 호원을 따라 거실로 나왔다.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기 위함인지, 호원의 앞에는 딱 보기에도 진해 보이는 커피가 놓여 있었다.

무휼은 그 맞은편에 당연하다는 듯이 놓인 우유를 황당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나 어린애 아닌데.”

“알아, 성인인 거. 근데 내가 보기엔 한참 어린애야.”

“저기, 나 그쪽보다 키 큰 거 알지? 덩치도 엄청 큰데.”

무휼의 반박에 커피를 홀짝이던 호원이 흘긋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처음 봤을 때 21살이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던 게 이해 갈 만큼 무휼은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운동하는 놈이 맞긴 한가 본데?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내려다보는 호원마저도 무휼 앞에서는 호리호리해 보일 정도였다.

물론, 호원이 보기에는 그저 덩치 큰 어린애, 혹은 고집 센 대형견 정도로 보였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 좀 해보자, 성인 씨. 대체 왜 병원도 안 가고 집에도 안 돌아가는 거야? 상처야 뭐… 그리 큰 상처가 아니니까 병원은 그렇다 치겠는데, 생판 남인 내 집에 머물면서까지 집에 안 가는 이유는 좀 궁금한데.”

“…….”

무휼은 말없이 눈앞의 우유를 들이켰다. 분명히 준 것은 우유인데 들이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게 막걸리였나 싶을 정도였다. 호원은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이래서 사람은 첫인상이 중요한 거다.

우유 컵을 쥔 채 망설이던 무휼은 잠시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집은… 지금은 못 가. 분명히 말해 두는데,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야. 어차피 가더라도 집 안에서 사람들 눈 피해 다녀야 할 거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내용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호원은 혹시 자신이 괜한 걸 물었나 싶어 아차 했다.

밤중에 칼을 맞은 것도 그렇고, 집에 못 들어간다는 것도 그렇고. 혹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럼 호원은 지금 그의 상처를 건드린 꼴일 수도 있었다.

사실, 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사람을 구해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기까지 한 호원의 입장에서는 눈치 볼 게 없었지만, 타고난 성정이 다정한 건 그도 어쩔 수 없었다.

“그, 혹시… 말하기 좀 그런 일이면….”

“…….”

무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태도를 보니 자신이 실수를 저지른 게 맞는 듯해서, 호원은 안절부절못했다.

“미안….”

결국 먼저 사과한 건 호원이었다. 머쓱한지 볼을 긁적이던 호원은 흘긋 무휼을 살폈다.

무휼은 조금 놀란 듯 푸른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형광등의 창백한 빛 아래에서도 맑게 반짝거리는 푸른색을 쳐다보던 호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통화 내용을 생각해 보면 선발전이니 뭐니 하는 게 상당히 중요했던 듯한데, 그동안 집에서 지원도 해줬을 거고….’

혹시 선발전에 떨어져서 더 이상 집안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인 걸까?

‘그럼 왜 집에 안 들어가는 거지. 빨리 집에 가야 어떻게든 해결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의 배 쪽으로 향했다. 옷으로 가려져 있지만 저 아래에는 붕대에 감긴 상처가 있을 터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호원의 머리를 스쳤다.

‘혹시… 집에서 도망쳐 나온 건가? 가정폭력 뭐 그런?’

어느 정도 아귀가 맞아떨어지긴 했다. 생각해 보면 처음 무휼을 주워 왔을 때도 몸싸움을 한 사람처럼 옷이며 손이 엉망이었으니까.

그런 사정이라면 기어이 집에 안 들어가려 하는 태도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했다.

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호원은 큼큼 헛기침을 하고는 무휼을 불렀다.

“야.”

딴청을 부리고 있던 무휼이 그의 부름에 시선을 올렸다.

“그… 너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지만 언제까지고 여기 있을 수도 없을 거고. 상처가 나으면 집에는 들어가야 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저기….”

“한 달.”

단호한 말투에 호원은 말을 멈췄다. 무휼은 진지한 얼굴로 호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라스에 가득 따른 힙노틱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곧은 눈빛에 시선을 돌릴 수가 없어, 호원은 잠자코 그의 눈을 마주했다.

“한 달이 힘들면 보름이라도 괜찮아. 그 뒤엔 알아서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묻지 말고 그동안만 여기 있게 해줘.”

본래는 ‘상처가 어느 정도 나을 때까지’라고 했으니 사나흘 정도 있다 가려나 했는데, 그 기간이 어느새 훅 늘어 버렸다. 그러나 가정폭력의 가능성이 있는 이상, 이전처럼 무턱대고 그를 돌려보낼 순 없었다.

결국 호원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너 하는 거 봐서.”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무휼은 그의 말에 고맙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

무휼이 호원의 집에 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어젯밤의 협상 이후 머물 수 있는 기간이 늘어나서일까, 무휼은 간만에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잤다.

“엄청 잘 잤네….”

잠이 덜 깨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린 무휼은 두 팔을 들어 기지개를 쭉 켰다. 긴 팔다리를 쭉 뻗으니 이불 밖으로 팔꿈치와 발목이 튀어나왔다.

스트레칭을 하고 있자니 옆구리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애초에 그리 큰 상처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부상이며 통증에 익숙한 무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무휼은 슬쩍 몸을 틀어보았다. 상처에서 욱신거리며 통증이 올라와 잘생긴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직 평소처럼 뛰거나 큰 동작을 하긴 무리였지만, 그럭저럭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을 듯싶었다.

몸을 일으킨 무휼은 평소처럼 이부자리를 정돈하기 시작했다.

표현은 안 했지만, 무휼은 호원과의 생활에 나름대로 만족하는 중이었다.

호원은 결벽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부지런하고 깔끔한 성격이었다.

그는 아침저녁으로 환기를 하고 틈날 때마다 청소기를 돌리거나 걸레질을 해댔다.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놓여 있었고 조금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다.

덕분에 집은 늘 깔끔했고, 빌려 입는 옷은 조금 작지만 좋은 냄새가 났다. 무휼의 집도 잘 관리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호원의 집은 작은 곳까지 세세하게 그의 눈길이 닿아 있다는 게 티가 나는 집이었다.

결론적으로, 무휼은 이 집이 좋았다. 햇볕도 잘 들고 아늑한 것이, 호구 같은 집 주인을 닮았다 싶긴 했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운동을 나가던 이전과는 달리,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드러누워 오후까지 단잠을 잘 수 있다는 것도 좋았다. 따듯한 이불에 폭 싸인 듯 안온하고 아늑한 하루하루였다.

우연히 들어오게 된 곳이긴 했지만, 무휼은 그를 주운 것이 호원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식사 때면 그런 생각이 더더욱 확고해졌다.

바 ‘3월’이 잘되는 이유 중엔 호원의 음식 솜씨도 한몫하고 있다더니, 과연 그의 요리는 늘 기대 이상이었다.

“오늘 아침은 뭐려나?”

잘 개킨 이불을 벽장에 넣어둔 무휼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호원의 생활 패턴에 맞추느라 그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 일어났냐.”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부엌에 서 있던 호원이 무휼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그의 앞에는 달걀과 우유를 듬뿍 머금은 프렌치토스트가 팬 위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녹은 버터의 고소한 냄새와 빵을 굽는 냄새에 무휼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넓은 접시에 프렌치토스트를 옮겨 놓은 호원은 팬에 버터를 조금 더 넣고 소시지와 베이컨을 구웠다.

그가 팬 한쪽에 달걀을 깨 넣는 동안 무휼은 식탁을 정리하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고작 며칠 함께 지냈을 뿐인데도 두 사람의 행동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다.

“잼 바를래? 무슨 잼 줄까?”

“딸기잼 있어?”

“라즈베리는 있어. 거기 찬장 좀 열어볼래?”

호원이 먹음직스럽게 익은 베이컨과 소시지, 달걀을 접시에 부으며 말하자, 무휼이 그에게 다가왔다. 플레이팅에 열중인 호원의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여기?”

호원은 바로 등 뒤로 느껴지는 존재감에 손을 멈췄다.

무휼의 몸이 그의 등에 딱 붙어 있었다. 커다란 바위를 등 뒤에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육질의 가슴이 날개뼈 근처에 닿자 호원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군살 없이 탄탄한 팔이 머리 양옆으로 뻗어졌다. 호원의 키로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찬장을 손쉽게 열어젖힌 무휼은 금세 붉은색의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포장지에 적힌 라즈베리란 글씨를 확인한 그가 그대로 고개를 내려 호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쫄기는.”

뜨거운 숨이 훅 끼치면서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호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접시에 음식을 마저 담아내고는 팔꿈치로 무휼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좀 떨어져. 뜨거운 거 들고 있잖아.”

“네, 네.”

무휼은 건성으로 대답하면서도 순순히 물러섰다.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하는 것이 능글맞아 보였다. 그것이 본래 느긋한 성격 탓인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호원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접시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가 맞은편에 앉아 포크를 드는 무휼을 쳐다보았다. 그는 프렌치토스트를 푹 찍어 한입 베어 물더니 만족스럽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에 호원은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너 그 상처, 그래도 병원은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냐?”

“귀찮게 뭘 굳이. 그리고 병원은 안 간다고 했잖아.”

무휼은 자신의 허리께를 슬쩍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사실 아무리 스친 상처라도 마음에 걸리는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늘 가던 병원에 갔다간 순식간에 일이 커질 게 뻔했고, 그렇다고 아무 병원이나 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모르는 호원으로서는 걱정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두워지는 얼굴을 보던 무휼이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잘됐다. 그러잖아도 바람 쐴 겸 외출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던 차였으니까.

혹시라도 누구와 마주칠까 최대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무휼이었지만, 아무래도 집 안에만 있자니 좀이 쑤시긴 했다.

게다가 모자를 눌러쓰고 호원을 옆에 끼고 있으면 혹시나 누군가 보더라도 금방 자신을 알아볼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무휼은 부러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했다. 보통 그가 이런 표정을 지으며 부탁할 때면 그 누구도 거절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줘. 내 보호자로.”

“보호자?”

“응.”

호원은 보호자라는 말에 조금 떨떠름해하는 얼굴이었다. 임시 보호라고는 해도 이렇게 대놓고 ‘보호자’란 말은 들으니 새삼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호원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우유 컵을 들어 마른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식빵을 봉지째 가져와 앉는 무휼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이고 뭐고, 저 개새끼가 집 안의 식량을 거덜 내기 전에 장 좀 봐야겠다.

***

두 사람은 가볍게 씻고 바로 집을 나섰다.

이미 오후 1시를 넘어선 시간이기도 했거니와 저녁 전에 영업 준비를 해놔야 했기에, 여유 시간이 많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무휼은 가까운 곳에 있는 커다란 대학병원을 두고 굳이 골목골목을 돌아 낡고 작은 의원으로 향했다. 영 수상쩍은 모습이라 호원은 그를 흘긋 바라봤지만, 무휼은 여전히 태평한 얼굴을 할 뿐이었다.

“확실히 상처가 깊진 않네요. 소독도 잘하셨고. 장기가 다친 것도 아니니까 2, 3주면 완전히 회복하시겠는데.”

어째 영 불성실해 보이는 의원의 말에, 호원은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처음 봤을 때부터 며칠 요양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어 보일 정도로 경미한 상처였다.

그럼에도 굳이 진찰받기를 권한 건, 단순히 임시 보호하게 된 자의 의무감 같은 거였다.

갈 곳 없는 멍멍이를 떠맡게 되었지만, 적어도 자신이 돌보는 동안은 건강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다.

“다른 곳은 다 괜찮은 건가요?”

“에, 뭐…. 여기서 할 수 있는 검사가 한정적이라서요. 정밀검진 원하시면 저기 대학병원 쪽을 가보시면 됩니다.”

반백의 의원은 호원의 물음에 시큰둥한 얼굴을 하더니 무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고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답했다.

호원의 미간이 험악하게 구겨지는 걸 발견한 무휼은 그의 팔을 톡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자.”

그의 재촉에 호원은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진료비를 치르고 나온 두 사람은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보고 한숨 돌릴 겸 카페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사람이 너무 좋은 것 같아.”

“무슨 소리야?”

유리컵에 담긴 아메리카노 두 잔을 들고 자리에 앉던 호원이 무휼의 말에 눈썹을 올렸다. 무휼은 컵에 빨대를 꽂아 쭉 빨아들이고는 대답했다.

“그렇잖아. 보통 아무리 착해도 이렇게까지 하진 않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치료해 주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병원비 내주고. 게다가 방금 전에 병원에서는 의사가 진료 대충 보니까 대신 화내주려고 했잖아.”

무슨 소린가 했던 호원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유리잔을 들어 차가운 액체를 마셨다. 얼음이 부딪쳐 카랑카랑한 소리를 냈다.

“이왕 주웠는데 케어는 제대로 해줘야지 않겠냐. 게다가 21살 먹은 어린애가 무슨 돈이 있겠어. 그냥 주운 김에 좀 돌봐주는 거지.”

“…내가 나이 얘길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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