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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11)화 (11/101)

제11화. Muzzle control (4)

은근하게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호원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한창 혈기 넘치는 고등학생 때도 얘기할 일 없던 주제를 나이 서른이 넘어서,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랑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호원의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무휼은 파란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며 피식 코웃음을 쳤다.

“뭐야, 정말 없어? 의외인데.”

그 말에 호원의 눈썹 한쪽이 꿈틀했다.

“왜, 궁금해? 그러는 너야말로 경험이 없나 본데, 이 기회에 한번 가르쳐 줄까?”

호원이 지척까지 다가온 무휼에게 오히려 얼굴을 들이밀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당황하며 물러설 줄 알았던 무휼은 미동도 없이 그를 내려다보더니 돌연 인상을 찡그렸다.

“많았나 봐? 경험.”

툭 내뱉는 목소리에는 언짢은 티가 역력했다.

아니, 네가 왜? 지가 물어놓고 네가 왜? 호원은 오히려 제가 당황해서는 뒤로 몸을 물렸다.

“뭐…. 좋을 대로 생각해.”

두 사람의 얼굴이 다시 멀어졌다. 무휼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예 호원을 향해 돌아앉아 팔짱을 척 끼었다.

그러고는 취조를 하는 형사처럼 위압적인 태도로 말을 내뱉었다.

“여자? 남자?”

“뭐가?”

“남자랑 여자 중에 어느 쪽이었냐고.”

진지한 얼굴에 비해 질문은 생뚱맞기 짝이 없었다.

보통 그런 걸 물어보나? 호원은 ‘요즘 애들은 대체….’ 같은 생각을 하다 번뜩 스쳐 가는 생각에 숨을 멈췄다.

‘설마 눈치챘나?’

호원은 입술을 달싹였지만, 그 사이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지금까지 자신이 실수한 게 있었나 곱씹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원은 굳이 말하자면 동성을 좋아하고, 그런 성향을 딱히 주변에 감추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 성적 지향은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한 타인이 알아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호원은 그동안 잠자코 있었다. 어차피 호원은 무휼을 그런 대상으로 보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괜히 얘기했다가 서로 어색해지기도 싫었다.

잠깐 임시 보호하는 사이에 굳이 그런 것까지 알 필요가 있나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호원은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호원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무휼은 여전히 팔짱을 낀 그대로 고개만 옆으로 까딱거렸다.

“그럼 어느 쪽이 좋은지만 말해봐.”

“어느 쪽?”

“남자랑 여자. 만약 고백을 받는다면 어느 쪽?”

지나치게 직관적인 문제였다. 호원은 난감하다는 듯 억지웃음을 지었다.

어느 쪽으로 답을 해도 의심받을 것 같아서 바로 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거야 당…연히….”

어떻게 말해야 하나. 호원은 눈동자를 데굴 굴려 무휼을 쳐다보았다. 무휼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표정을 한 채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새파란 눈을 보고 있자니 어떤 거짓말도 전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누구든…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기쁜 거지. 그게 남자든 여자든.”

결국 솔직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 같으면 무슨 말을 하려나. 짐작할 순 없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말했길.

호원은 괜히 초조한 기분으로 무휼의 반응을 기다렸다.

“어느 쪽이든?”

무휼은 천천히 그 말을 곱씹는가 싶더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호원을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손바닥이 소파 등받이의 가죽을 쓰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얘 또 왜 이래?’

호원은 최대한 상체를 뒤로 뺐지만, 애초 그가 앉아 있던 곳은 소파의 끄트머리였다. 팔걸이와 등받이 사이에 막힌 그가 난감한 얼굴로 무휼을 마주 보았다.

무휼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들었다. 시야 안에서 무휼의 파란 눈동자가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며, 호원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잠깐.’

그냥 밀어내면 되잖아? 순간, 호원은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무휼이 키스라도 할 것처럼 천천히 다가오는 통에 저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릴 뻔했던 것이다.

퍼뜩 제정신이 든 호원이 무휼의 어깨를 밀어내려는 순간, 무휼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장난기를 담아 곡선으로 휘는 파란 눈동자에 호원이 멍하니 눈을 끔뻑거렸다.

“왜 의식하는데?”

“뭐?”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조금 뒤였다. 또다시 놀아났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호원의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내, 내가 뭘!”

호원은 무휼의 어깨를 확 떠밀었다.

다행히 무휼은 순순히 밀려나 주며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얼굴 빨개졌어.”

급기야 무휼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상처가 아픈지 옆구리를 움켜잡으면서도 그는 어깨를 떨며 웃어댔다.

“야, 뭐가 웃겨?”

호원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민망함과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노려봐 봤자, 무휼에게 더 큰 웃음만 선사할 뿐이었다.

한참을 웃어댄 무휼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더니 훌쩍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호원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내 얼굴 좋아하는 거, 좀 더 티 내도 돼. 기분 좋거든.”

그는 그 말만 내뱉고는 황당해하는 호원을 두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호원은 얼굴의 열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끼며 허탈하게 내뱉었다.

“뭔 개소리야….”

저 새끼 돌았나 봐. 호원은 진심으로 무휼을 내쫓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심했다.

***

“내 얼굴 좋아하는 건 확실한데, 좀 애매하단 말이야.”

무휼은 진지한 얼굴로 방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야, 아닌 거야? 애매한 대답을 듣고 나니 더더욱 의심이 갔다.

방금 전에는 너무 심각한 분위기라 일단 넘어갔지만, 결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질문에 모호한 답변을 듣고 나니 영 맥이 빠졌다.

“좀 꼬셔볼까 했더니. 괜히 건드렸다가 역효과가 날 수도 있겠는데.”

이렇게 되면 계획을 전면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날의 언쟁이 있고서도 호원은 원하면 얼마든 여기서 머물라 했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는 호의를 무휼은 온전히 믿기 어려웠다.

그건 무휼이 호원에게 개인적인 호기심을 가지게 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무휼은 호원이란 사람이 궁금하긴 했지만, 그를 완전히 믿지는 않았다.

적어도 약점을 쥐고 있기라도 해야 그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무휼에게 있어 가장 쉬운 일은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것은 굳이 그가 뭔가 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지금껏 그는 남자에게 고백을 받아본 적은 있어도, 남자를 꼬시거나 고백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확 덮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무휼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말로 모 아니면 도였다.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동성을 좋아한다 해도 모든 남자가 좋은 건 아닐 터. 게다가 만약 이성애자라면 괜히 긁어 부스럼인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무휼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타입은 아니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그가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면 오히려 웃길 일일 터였다.

다만 그는 굳이 모험을 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두고 볼까.”

결론이 났다.

무휼은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이부자리 위에 드러누웠다. 오늘 저녁은 뭘까 기대하는데, 돌연 그의 휴대폰이 드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무휼은 화면 위에 떠 있는 글자를 보고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최민호.

별로 반갑지 않은 상대로부터 온 전화였다.

받을까 말까 무휼은 잠시 고민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굳이 전화를 한 걸 보면 급한 일일지도 몰랐다.

무휼은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왜.”

[야!! 너 어디야??]

전화를 받자마자 새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무휼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는 쩌렁쩌렁한 외침이 멎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너 지금 큰일 났어, 새끼야! 코치님이 우리 집에 너 없는 거 다 알아버렸다고!]

“뭐?”

당황한 무휼이 눈을 크게 떴다. 무휼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않자, 수화기 안에서 최민호가 연달아 말을 이었다.

[나 없는 사이에 코치님이 우리 집에 왔었대. 하필 잠깐 편의점 간 사이에… 아무튼 그새 우리 엄마랑 얘길 하셨더라고. 너 안 왔었다는 거 알고 난리가 났어.]

무휼은 휴대폰 화면을 뒤적거리며 통화 기록을 찾았다. 그러나 코치에게서 온 전화는 한 통도 없었다.

“나한테 온 연락은 없는데?”

[그거야 괜히 연락했다 네가 또 잠수 탈까 봐 그러셨겠지, 이 자식아. 너도 진짜 어지간하다. 속 좀 그만 썩이지 그러냐?]

“시끄러.”

누군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아나. 무휼이 작게 투덜거렸다.

어쨌거나 코치님이 알았다는 건, 조만간 어머니 귀에도 이 일이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연습에 빠지는 것과 집에 안 들어가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큰일인데.’

마음이 영 심란해졌다. 지금이라도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까? 아니면 잠깐이라도 집에 들어가야 하는 걸까?

그러나 무휼은 왜인지 이곳에서 나서고 싶지가 않았다. 저 이상하고 흥미로운 집주인에게 아직 궁금한 게 많았다.

게다가 옆구리의 상처도 온전히 숨길 수 있을 만큼 낫지는 않은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이 보이거나 뭔가 수상한 티를 낸다면, 집 안에 가득한 눈과 귀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그때,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무휼이 화들짝 놀라 문을 쳐다보았다.

“잠깐 좀 나와볼래?”

호원의 목소리였다. 그는 단순히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던 건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이어 들렸다.

문을 열고 나서니 부엌 쪽에 선 호원의 뒷모습이 보였다.

감귤류 특유의 상큼한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뭔가 만드는 중인지, 호원은 작은 볼 안에 이것저것 넣고 섞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 나왔냐? 잠깐 이것 좀 봐줄래?”

인기척을 느꼈는지, 호원이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노란색의 소스가 담긴 스푼이 들려 있었다.

무휼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입부터 들이밀어 받아먹었다.

새콤달콤한 유자의 향이 묵직한 타르타르 소스와 균형을 이뤄 산뜻하면서도 고소한 감칠맛이 돌았다. 무휼의 표정을 확인한 호원이 씩 웃으며 스푼을 거둬갔다.

“표정 보니 맛있나 보네. 이건 이대로 완성해야지.”

그러고는 소스가 담긴 볼 안에 한입 크기로 자른 연어와 샐러드 채소를 넣어 버무렸다.

본인도 맛을 몇 번 봤었는지, 불그스름한 입술 언저리에 하얀 소스가 묻어 있었다.

그 입술을 물끄러미 보다 문득, 무휼은 궁금해졌다.

무슨 짓을 해도 진심으로 화내지 않는 사람은, 대체 뭘 해야 감정을 보여줄까?

“왜 그래?”

말이 없는 무휼이 이상했는지, 한창 볼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려 무휼을 쳐다보았다.

순진하게 깜빡거리는 커다란 눈을 마주 보며, 무휼은 자신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충동을 느꼈다.

지금 입을 맞추면, 이 순하고 착하기만 한 사람은 화를 낼까?

무휼의 몸이 천천히 숙여졌다. 두 사람의 입술이 금방이라도 맞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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