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Muzzle control (5)
숨결이 가깝다.
무휼은 타인의 숨결을 느끼면서 불쾌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생경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호원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허리 앞치마를 두른 허리가 유독 가늘게 느껴졌다. 키만 멀대같이 크지, 골격은 가느다래선 삐쩍 마른 체형이구나 싶었다.
마주한 눈이 점점 가까워졌다. 새파란 눈동자 안으로 점점 휘둥그렇게 커다래지는 갈색 눈이 선명하게 담겼다.
“아윽!”
다음 순간, 무휼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남성의 가장 예민한 부위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밀려왔다.
황당함과 통증이 범벅된 얼굴로 올려다보자, 호원이 씩씩거리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어디서 버릇없이 입질이야, 입질이!”
“이, 입질?”
무휼은 끙끙거리면서도 대꾸했다. 호원이 무릎으로 올려 찍은 부위가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그래, 입질.”
호원은 긴 숨을 한번 훅 내쉬더니 바닥에 쓰러진 무휼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모습이 꼭 화난 치와와 같아,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질 않았다.
그나저나 입질이라니 낚시도 아니고. 무휼은 뒷골이 당기도록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호원은 자신의 허리 뒤로 손을 움직이더니 허리에 매고 있던 앞치마를 풀었다.
“저녁은 알아서 처먹어라, 개새끼야.”
“개, 뭐? 웁!”
확 고개를 들었던 무휼의 얼굴을 향해 옷가지가 내팽개쳐졌다.
얼굴에 정면으로 공격을 받은 무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호원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아 씨, 진짜….”
혼자 남은 무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래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며 닫힌 문을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
아무래도 저 개새끼는 위험하다.
호원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단순한 결론이었지만 금쪽같은 휴일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얻어낸 것이었다.
사실, 잠을 못 잔 건 고민보다도 저녁의 기억 때문이긴 했다.
자려고 눕기만 하면 바로 앞에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가까이 다가오던 푸른 눈이 떠올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거, 분명히 키스하려고 한 거…지?’
호원은 양손으로 이불을 꼭 쥐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천장 가득 푸른색이 넘실거리는 듯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게 직시해 오는 푸른 눈.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열 살 넘게 어린 놈이 그런 건 어디서 배운 건지, 순간 뿜어 나오던 색기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이호원. 정신 차리자, 정신.”
호원은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팡팡 두드렸다. 뺨이 얼얼하도록 치고 나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드는 듯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다가오는 무휼에게 지레 겁을 먹고 화들짝 놀라 도망갔던 것이 떠올라 정신이 아득해졌다.
“수능 친 지 이제 겨우 1년 넘은 어린애잖아! 그런 애한테 겁먹고 도망가다니, 사람 자존심이 있지!”
아무래도 요즘 자신이 연애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보니 이렇게 된 듯싶었다.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일어났어?”
“히익!”
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보인 건 또다시 그놈의 파란 눈이었다. 호원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호원의 방문 옆에 몸을 기대고 서 있던 무휼은 그가 나오자마자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말똥말똥 바라보는 눈이 순진무구해 보였다.
“너, 너 여기서 뭐 해?”
“어제 내 소중이에 무릎 찍기를 하고는 도망가 버린 주인님이 대낮이 되도록 안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하….”
어디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던 호원의 머리에 아주 생소한 단어 하나가 스쳤다.
“잠깐, 주인님?”
“응.”
호원의 반문에 무휼이 씩 웃었다. 장난기 어린 푸른 눈이 곱게 휘었다.
“내가 강아지라고 그랬잖아, 당신이.”
요즘 애들은 따라가기 어렵구나. 호원은 생각했다.
***
그 뒤로도 무휼의 ‘주인님’ 타령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주인님, 이거 여기 두면 돼?”
“…그래.”
“빨래 다 됐어, 주인님. 내가 널어 뒀어.”
“잘…, 했어.”
“주인님, 오늘 먹이는 뭘 줄 거야? 나 배고픈데 김치볶음밥 해주라, 주인님.”
말끝마다 주인님, 주인님, 무휼은 꼭 호원을 약 올려 죽이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던 호원도 결국에는 항복하고야 말았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놈의 주인님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
스크램블드에그를 곁들인 김치볶음밥을 내려놓으며, 호원이 탄식하듯 말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접시를 가까이 당긴 무휼은 수저를 들다 말고 호원을 빤히 바라봤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호원이 시선을 돌리자, 그는 예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왜? 난 신선하고 좋은데, 주인님.”
“말을 말자….”
호원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수저를 들었다. 눈앞의 김치볶음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것이 먹음직스러웠지만, 모래알처럼 까슬하게 느껴져 영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까마득하게 어린 미남자에게 ‘주인님’이라 불린다니,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함과 동시에 양심이 찔려 미칠 것 같았다.
호원은 애꿎은 밥만 휘적거렸다. 노란 스크램블드에그가 밥과 섞여 뭉개졌다.
“왜 그렇게 뚱해 있어, 주인님. 모처럼 날씨도 좋은데.”
그새 접시 안의 밥을 반이나 비운 무휼이 툭 내뱉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유독 날씨가 좋았다. 본격적으로 여름에 접어들기 전, 햇빛은 뜨겁지 않고 바람도 선선해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5시가 넘어서며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는 밖을 가만 쳐다보던 호원이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생각해 보니 오늘은 여름맞이 신메뉴 준비로 장을 볼 예정이었다.
바의 주메뉴가 되는 재료들은 아예 가게 앞으로 배달을 시키기 때문에, 그 외의 재료들을 사려면 오늘 마트든 어디든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장보러 가야 하네.”
“밖에 나가게?”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호원의 말에 무휼이 재깍 반응했다. 그 모습이 정말 산책 가잔 말을 들은 강아지 같아서 호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다만, 강아지와 다른 점이라고는 신나서 꼬리를 치며 방방 뛰는 대신, 무휼은 주저하며 수저를 내렸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꼭 밖에 나가길 꺼려 하는 것 같았다.
“나가기 싫어? 아, 그거 줘봐. 밥 더 있어.”
호원은 깨끗하게 비운 무휼의 접시를 가져다 프라이팬에 남은 김치볶음밥을 마저 퍼주었다.
무휼이 워낙 대식가이다 보니 호원은 이제 자연스럽게 한 끼에 몇 인분은 되는 식사를 만들고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볶음밥을 앞에 둔 무휼은 다시금 수저를 들며 툭 내뱉었다.
“아냐, 나가자. 장만 보고 빨리 돌아오면 별일이야 없겠지.”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말이었다. 호원은 무슨 의미냐는 듯 무휼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입안에 밥을 밀어 넣을 뿐이었다.
3인분은 족히 될 양을 배 속에 들이붓고서야, 무휼은 배가 부르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그릇을 치우고 수세미에 세제를 짜는 뒷모습을, 호원은 아연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 해, 안 씻어?”
거품을 낸 수세미를 막 그릇에 대려던 무휼이 따가운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가만 보던 무휼이 씩 웃으며 덧붙였다.
“왜? 내가 씻겨줬으면 했어, 주인님?”
“미친….”
대단한 쌍욕이라도 들은 듯, 호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휼은 큭큭 웃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설거지에 열중했다.
수전을 올리고 적당히 따뜻하게 물 온도를 맞추며, 호원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상태라면 밖에 나가서도 줄곧 주인님, 주인님 타령을 할 것만 같았다.
대체 저 어린놈은 낯짝이 두꺼운 건지, 아니면 무슨 말을 해도 얼굴로 커버가 될 거라 생각하는 건지, 도무지 낯부끄러운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를 구분하질 못했다.
‘혹시… 저 무휼이란 사람이랑, 그… 그렇고 그런 관계…야?’
문득 조심스럽게 물어보던 시영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긴, 하루 종일 찰싹 붙어 다니는 데다, 투룸이라곤 해도 엄연히 동거하는 중이고, 심지어 한쪽이 다른 쪽을 ‘주인님’이라 부른다면 그런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고민하건 말건, 무휼은 저 좋을 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아무리 호원이 티를 안 낸다지만, 가게의 단골 중에는 그의 성적 지향을 아는 손님도 몇몇 있었다.
무휼이 계속 이대로 행동하다가 오해라도 받아서 트러블이 나는 건 사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젠 안 대드는 건가?’
물줄기에 한 손을 내맡긴 채로, 호원은 멍하니 생각했다. 뭘 원해서 자신한테 잘해주냐고 소리치던 무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말이 장난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어느새 무휼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처럼 유들유들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으음…. 좀 찝찝하긴 하지만 큰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야.”
괜찮겠지. 아니, 안 괜찮을 게 뭐람. 딱히 문제 행동을 보이는 것도 아니고,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만 빼면 나무랄 데 없는데.
상처가 나아서 무휼이 제 발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 잘생긴 아르바이트생 겸 말 안 듣는 강아지를 임시 보호한다 생각하면 그만이지.
호원은 아직 차가운 물을 온몸에 흠뻑 맞으며, 제 결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집을 나선 건 오후 4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6시부터는 3월의 오픈 준비를 하고 신메뉴를 시험해 봐야 했기에, 두 사람의 걸음이 유독 빨랐다.
‘가만, 지금 가게에 뭐가 있더라.’
호원은 가게에 늘 들여놓는 과일과 재료들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다리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아차 싶어 무휼을 돌아보았다.
호원은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폭 역시 남들보다 넓은 편이었다. 때문에 평소에는 함께 다니는 일이 많은 시영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맞춰 걸음 속도를 조절하곤 했었다.
그러나 종종 생각에 잠기면 저도 모르게 본래의 보폭으로 돌아가 혼자 성큼성큼 앞질러 가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면 꼭 천천히 좀 가라며 타박을 들었었기 때문에 생각날 때마다 뒤를 돌아보는 게 버릇이 되었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호원은 바로 옆에 따라붙은 커다란 그림자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신메뉴는 뭘 하려는 건데?”
무휼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숨이 차거나 힘겨워 보이지도 않았다. 가만 보니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임에도 무리 없이 호원의 걸음을 따라잡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시선도 묘하게 위를 올려다보게 되는 것이, 남을 내려다보는 게 익숙한 호원에게는 영 어색한 일이었다.
그는 새삼 무휼이 저보다 키가 크다는 걸 실감했다. 그건 무척이나 생경한 기분이라서, 그는 동요를 숨기려 미리 외워둔 대사처럼 생각을 입 밖으로 줄줄 내뱉었다.
“…곧 여름이고 하니 과일 펀치 종류 하나쯤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모히토도 좋긴 하지만 그건 호불호가 은근 갈리거든. 안주류도 콜드파스타를 하나 넣어봤으면 하고.”
미리 구상해 둔 게 있어 다행이다. 호원은 무휼의 물음에 지체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문득 무휼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근데 너 상처는 괜찮아?”
“뛰지만 않으면 크게 무리는 없어. 그리고 이젠 딱히 상관없잖아.”
호원이 묻는 말에 무휼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에 호원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뭐가 상관없어?”
“당신이 있고 싶은 만큼 있으라며. 그럼 이젠 상처 다 나았다고 쫓아내진 않을 거 아냐.”
묘하게 이야기의 맥락이 어긋나 있었다. 호원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는 무휼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집을 나가고 말고의 얘기가 아니지. 상처가 아픈지, 얼마나 나았는지 궁금하니까 물은 거 아냐.”
“그게 왜 궁금해?”
이번에는 무휼이 의아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호원은 당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상황에 허탈했다.
‘진짜 얘는 뭐가 문제인 걸까.’
그러나 길바닥 한가운데에서 오래 얘기를 나눌 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호원은 일단 떠오르는 말을 최대한 압축해서 한마디 했다.
“걱정되니까.”
다행히 그 말은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무휼이 놀란 얼굴로 입을 딱 다물더니, 그 이후로 별다른 말 한마디 없이 얌전히 호원의 뒤를 따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