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꼬시고 있는 거잖아, 지금
호원은 멍한 기분으로 무휼이 들어간 방문을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뭘, 당한 거지?’
생각해 보려 했지만 술에 진탕 절어버린 것처럼 기능을 멈춘 뇌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했다.
그때, 방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호원은 그 소리가 방아쇠라도 된 것처럼 후다닥 몸을 일으켜 제 방으로 도망쳤다.
놈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지금, 언제 또 무슨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몰라 방문까지 걸어 잠근 뒤, 호원은 그대로 문에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았다.
‘키스…한 거 맞지?’
천천히 들어 올린 손가락이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은 아직도 남아 있는 타인의 감각으로 간질간질했다.
호원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침대까지 기어갔다.
이불 안에 쏙 들어가 목까지 이불을 끌어당긴 호원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니, 무슨 소리일까? 지금처럼 잘 지내자는 뜻인가.
그럼 그 키스는 또 뭐지? 애초에 그 녀석은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이런저런 고민에 호원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나 예상이 가는 것은 있었다. 무휼도 호원과 같은 성향이고, 긴가민가하던 중에 확신을 갖기 위해 떠봤다는 것.
그러나 우연히 만난 연하의 남자가 정말 우연히 호원과 같은 성향일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만에 하나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그 가설이 맞았다 해도, 무휼이 키스를 한 이유까지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설마 잘해보자는 게 뭐… 그런 의미인가?’
순간 무심코 생각을 떠올렸던 호원은 오싹 소름이 돋는 기분에 스스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걔가? 나를?’
생각만 해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물론 무휼의 얼굴이나 몸은 이게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이 이상 호원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경이로운 예술품을 봤을 때와 같은 경탄일 뿐, 무휼과 잘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연애 대상으로 삼기엔 양심이 찔릴 정도로 어린 데다, 그는 무휼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휼쯤 되는 남자가, 그것도 띠동갑이 넘는 남자를 상대로 ‘그런’ 마음이 들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가지고 노는 건가?’
울컥한 마음에 누워 있던 호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만약 그런 거라면 혼쭐을 내줄 셈이었다.
‘근데 뭐 하러? 그런 어린애가 나 같은 아저씨를 가지고 놀아서 뭘 어쩌려고?’
다시 든 생각에 호원은 스르르 이불 위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결국 그는 그날 낮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럼에도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무휼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놈은 미친 게 분명하다는 것.
“좋은 아침.”
그러나 막상 예의 ‘미친개’는 지금,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두른 채 프라이팬을 흔들고 있었다.
잠을 푹 잤는지 피부는 유독 반질반질했고, 환하게 웃는 얼굴은 이슬 앉은 들꽃처럼 싱그러웠다.
한마디로, 눈부시게 잘난 상판이었다.
호원은 문득, 자신이 잠을 설쳐 가며 했던 고민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호원은 그냥 있는 그대로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어서 그냥 간단하게 오믈렛만 했는데, 괜찮지?”
무휼이 토스트가 담긴 접시와 오믈렛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물었다. 호원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입을 열었다.
“야.”
“왜, 주인님?”
호원은 자신의 의자를 손수 빼주는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생긋 웃는 얼굴을 보니 처음 이곳에 와서 살기를 풀풀 내뿜던 게 꼭 다른 사람 같았다.
그래서일까, 조금은 용기가 났다. 호원은 의자에 앉자마자 맞은편에 앉는 그에게 물었다.
“너 어제 그거 뭐야.”
“어제 그거?”
“그….”
호원이 말을 얼버무렸다. 적나라하게 말을 내뱉자니 영 껄끄러워, 단어가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호원과는 달리, 무휼은 눈꼬리를 휘며 툭 내뱉었다.
“어제 키스한 거?”
“그, 그래. 그거.”
“왜? 신경 쓰여?”
가벼운 대꾸에 호원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신경 쓰이지, 안 쓰이겠냐’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가, 가까스로 심호흡을 하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런 식으로 어른 놀리는 거 아니다.”
“또, 또 연상인 척한다.”
“연상 맞거든?”
기어이 발끈하게 만드는 놈이었다. 호원이 탕, 테이블을 내리치며 말하자 무휼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연상 같아야 연상이지. 우리 주인님은 아무리 봐도 동생 같은걸.”
“우, 우리 주인님?”
그냥 주인님도 아니고, 이젠 ‘우리’ 주인님이란다. 호원은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무슨 애가 이렇지. 진짜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호원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었다.
“자, 자. 일단 먹고 얘기하자. 기껏 만들었는데 다 식겠어.”
무휼은 그렇게 말하며 호원의 손을 잡아끌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에 포크를 쥐여주고는 가볍게 감싸 잡았다.
“많이 먹어야 많이 크지, 우리 주인님?”
“하 진짜….”
말도 안 나온다.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잡힌 손을 빼냈다. 무휼은 기분이 좋은 듯 생글생글 웃으며 포크를 들었다.
식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상황임에도 무휼이 만든 오믈렛은 썩 맛있었다. 얌전히 그릇을 비운 호원은 어쩐지 진 기분으로 그릇을 치웠다.
“잘 먹었다.”
“아, 그릇 그냥 둬. 내가 설거지할게.”
몇 개째인지 모를 식빵을 집어 들던 무휼이 다급하게 말했다. 호원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무장갑을 찾아 꼈다.
“네가 밥했잖아. 밥값이라고 생각해.”
“밥값…?”
그 말에 무휼이 음흉하게 웃었다. 등을 돌린 호원의 뒤로, 무휼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뒤에서 허리를 꽉 껴안자, 호원이 흠칫 놀라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물을 받아 둔 곳에 떨어져 깨지진 않았지만, 호원의 심장은 그깟 컵 따위 백 번은 깨뜨릴 것처럼 쿵쾅거리고 있었다.
“뭐, 뭐야?”
“설거지는 내가 할 테니까 밥값은 다른 걸로 줘.”
귓가에 무휼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통에 그의 숨결이 귓바퀴에 닿아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단단하게 맞물렸다. 굵은 팔이 허리를 꽉 감싸며 등에 단단한 가슴이 와 닿았다.
호원은 결코 덩치가 작은 편이 아니었다. 근육이 잘 붙지 않아 마른 편이긴 했으나, 평균을 훨씬 웃도는 신장에 남자다운 체구라 어딜 가도 남자답다는 소리를 꽤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호원은 어른 품에 갇힌 어린아이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일단 이거 놔.”
호원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손은 거품 묻은 고무장갑을 끼고 있는 터라 그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밥값.”
무휼은 그렇게 말하며 호원의 어깨에 얼굴을 턱 얹었다. 바로 지척에 무휼의 푸른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야가 온통 파랬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선명한 색깔에 호원은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고 물었다.
“뭐 어떻게 하라고….”
“키스해 줘, 주인님.”
무휼이 씩 웃었다. 풍성한 속눈썹이 눈 모양을 따라 휘며 화사한 웃음을 만들었다.
그 웃음에 이끌리듯, 호원은 고무장갑을 벗고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쌌다. 무휼이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무휼의 입술에 따듯한 것이 닿았다. 무휼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찰나,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번쩍 눈을 뜨자, 호원이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 묻은 케첩이나 닦고 와라, 멍멍아.”
무휼의 얼굴을 막은 호원이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붉은 소스가 묻어났다.
푸른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 모습이 꼭 놀란 강아지의 눈과 똑같아서, 호원은 그만 귀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 버리면 주도권은 영영 빼앗기게 될 터였다. 호원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내가 말했지?”
이래 봬도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이었다. 이제 막 20살을 넘긴 풋내기 애송이한테 휘둘릴까 보냐.
호원은 덤덤한 얼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어른 놀리는 거 아니라고.”
“윽….”
무휼은 눈을 찡그리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포기했다기보다는 다음 기회를 노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허리에 감겨 있던 팔이 스르륵 풀렸다. 호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대체 너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게…, 그런 거 알잖아.”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돌아서려던 무휼이 놀란 눈을 하고 몸을 돌렸다. 동그랗게 뜬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호원을 향했다.
호원은 다 씻은 그릇을 건조대에 기대 두고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럼 몰라서 묻지, 알면서 묻겠냐?”
“하…. 진짜 미치겠네.”
무휼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꼭 말썽꾸러기 학생을 앞에 둔 교사 같은 느낌이라, 호원은 괜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냥 호기심에 이러는 거면 좋게 말할 때 그만두-”
“남자 좋다는 사람한테, 남자가, 치대고, 키스하는 거, 그게 뭘 거 같아?”
무휼은 어린애한테 설명하는 것처럼 한마디씩 뚝뚝 끊어 말했다. 호원이 눈썹을 으쓱이며 쳐다보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호원의 팔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새삼 숨 막히게 예쁜 그 빛깔에, 호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눈이, 미치도록 예쁜 그 파란 눈이 곱게 휘어졌다.
“꼬시고 있는 거잖아, 지금.”
호원의 눈이 커다래진 것과 무휼의 입술이 그에게 닿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