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훈련할 때에는 여지를 주지 말 것
결국 무휼은 바 ‘3월’이 마감하는 시간까지 일을 도와주고는 뿌듯한 얼굴로 뒷정리까지 마쳤다. 그러고는 뭔가를 바라는 얼굴로 호원을 가만 쳐다보았다.
포스기를 두드리며 정산을 하던 호원은 부담스러우리만치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건데?”
“이제야 관심 주네. 난 또 내가 모르는 사이 투명인간이라도 된 줄 알았잖아.”
무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 사람이 관심 줄 만큼 예쁜 짓이라도 하든가. 호원이 아니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무휼이 새삼스러운 말을 꺼내며 머쓱하게 웃었다.
마음 같아서는 ‘너 같으면 잘 지냈겠냐?’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호원은 부러 말을 꺼내는 대신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못 지낼 것도 없지. 너야말로 건강하게 잘 지냈나 보네.”
“아, 응.”
무심한 대꾸에 마음이 상한 걸까, 무휼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포스기를 두드리던 호원의 손이 잠시 허공을 긁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다시금 포스기를 두드리며 툭 내뱉었다.
“집으로 돌아간 거 아니었어? 갑자기 들이닥쳐서는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실은….”
무휼이 말을 하려다 말고 망설였다. 앉아 있던 테이블에 팔을 괴고 고민하는 단정한 옆모습을, 호원의 눈이 좇았다.
“안 되겠다.”
무휼이 한숨과 함께 말을 내뱉으며 고개를 든 순간, 호원의 시선은 이미 포스기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호원의 시선을 잡아채듯 무휼이 손을 휘적거리더니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위에 가서 이야기해도 될까?”
“시간이 늦었어. 내일 얘기해.”
“주… 아니, 오너.”
나직한 목소리가 부르는 호칭에 호원의 손이 멈췄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의가 아니었다. 호원은 자신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싼 커다란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뜨거운 체온에 델 것 같았다.
그가 닿아 있는 손목도, 어느새 바짝 다가선 탓에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뺨도, 목소리가 흘러들어오는 귀도. 그리고… 금방이라도 갈비뼈 사이로 튀어나와 터져 버릴 것 같은 심장도.
모두 뜨겁게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부탁이야. 이야기할 기회를 주면 안 될까?”
호원이 이를 꾹 악물었다. 이내 다소 신경질적으로 팔목을 뿌리친 그가 무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날카롭게 벼른 말은 애처롭게 그를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 막혀 버렸다.
숨조차 멈춘 채 그를 올려다보던 호원은 이내 긴 숨을 내쉬었다.
“잠깐만이야.”
결국 또 무휼에게는 물러지고야 만다.
***
무휼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는 꽤 촉망받는 배구 선수로, 성인이 되자마자 프로로 데뷔하는 대신 대학에 들어갔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프로 선수가 되기 전에 평범한 대학 생활을 즐겨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의외로 대학 생활은 그에게 꽤 잘 맞은 모양이었다. 꽤 이름난 대학이라 그런지 선수들 실력도 썩 괜찮았고, 운동 쪽에 으레 있을 법한 내리갈굼이나 폭력도 없었다고 한다.
순조롭게 대학 생활을 영위하던 그는 초여름에 열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선발전을 앞두고 있었다.
사실상 이미 확정 멤버였으므로 선발전은 명목상의 경기일 뿐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마저도 꽤 즐거웠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선발전을 하루 앞둔 저녁, 같은 팀의 동기가 그를 불러냈다.
“처음엔 좀 의아했어. 그 녀석, 나랑 친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거든.”
무휼은 그렇게 말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본인의 성격이 가히 좋진 않다는 걸 스스로도 인정하는 듯했다.
그래도 그 당시의 그는, 앞으로 함께 경기를 뛸 상대와 술 한잔 정도는 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나간 술자리에서, 그는 동기가 휘두른 칼에 옆구리를 베였다.
“그래서 그때 여기 앞에 쓰러져 있던 거야.”
“그 동기는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글쎄. 나야 모르지.”
그래서 더더욱 붙들어놓고 물어보고 싶은 거야. 내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무휼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호원이 다시금 물었다.
“그런데 넌 왜 그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한테 알리지 않은 건데? 나한테도 말 안 하고, 보아하니 그 팀메이트라는 친구한테도 이야기 안 한 것 같던데.”
“그건….”
꼬박꼬박 대답을 늘어놓던 무휼이 처음으로 망설였다.
호원이 내준, 아이스커피가 담긴 머그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그가 이윽고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어머니께…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어. 마침 해외 출장 중이셔서 이런 상황은 전혀 모르셨거든. 집에 돌아가면 듣는 귀랑 보는 눈이 많으니까 결국 알게 되실 거라서 집에 들어가기가 뭐했어. 학교 쪽도 마찬가지였고.”
대체 무슨 집이기에… 호원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 말을 아끼기로 했다. 그보다는 다음 질문이 먼저였다.
그것은 그가 무휼이 이야기 좀 하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줄곧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두었던 말이었다.
자꾸만 마르는 입술을 차가운 물로 축인 그가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그 이야기를… 나한테 왜 하는 거야…?”
한 달이나 연락 한번 없었으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호원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무휼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들어 호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순수하게 보일 정도로 올곧은 눈이었다.
“여기 있을 때, 그 녀석을 봤어. 얼핏 본 데다 금방 놓쳐 버렸지만 분명 그 자식이 맞아.”
“그 녀석이라면….”
“날 찌른 그놈.”
호원의 눈이 커졌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그 눈동자를 마주한 무휼이 피식 웃었다.
“복수니 뭐니 그런 거 때문은 아냐. 그딴 걸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 찔린 날 경찰부터 불렀겠지.”
그 말에 호원은 안도했다. 그는 만에 하나라도 무휼이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허무하게 낭비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무가치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무휼의 인생이 너무 아까우니까.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무휼에게 상처를 입힌 그놈을 찾아서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무휼의 다음 말을 얼핏 예상하면서도 굳이 입술을 떼었다.
“그럼 널 찌른 녀석이 이 근처에 있으니, 여기서 잠복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 그렇지.”
무휼은 씩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호원은 이른 새벽에 맺힌 이슬처럼 싱그러운 그 미소를 마주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절대 안 돼.”
“쳇.”
역시 안 되나. 무휼이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안 될 걸 알면서 왜 물어본 건지. 호원은 피곤한 기분에 어깨를 으쓱였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무심코 말을 던졌던 호원이 아차, 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말은 그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간 뒤였다.
무휼은 그가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는 듯,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주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눈동자가 호원을 오롯이 비췄다.
“그… 내 말은 그러니까….”
“아무렇지 않아 보여?”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호원의 말이 무휼의 목소리에 끊어졌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세게 말아 물었다.
애써 건조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두 사람 사이에 느닷없는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도움을 청하는 전 아르바이트생과 오너는 사라지고, 찬 사람과 차인 사람, 고백한 사람과 그 고백을 거절한 사람만이 남았다.
집에 들이지 말 걸 그랬나. 호원은 잠시 후회했지만 이내 자신은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으리란 확신에 생각이 미쳤다.
단둘뿐인 집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이른 아침을 알려오는 새소리와 사람들이 아침을 시작하는 소리만이 고요한 두 사람 사이에 간간이 맴돌았다.
“당신에게 내가 마냥 편하진 않을 거라는 거… 알아.”
그 살얼음 같은 정적을 깨고, 무휼이 입을 열었다. 호원은 여전히 입술을 꾹 다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귀찮게 하지 않을게. 내 마음… 강요하지도 않을게. 아니, 되도록… 포기하도록 해볼게.”
어디선가 유리가 부서지는 것처럼 쨍, 하는 소리가 났다. 무휼이 쥐고 있는 머그잔 속 얼음이 부딪치는 소리였지만, 호원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심장에서 나는 소리처럼 들렸다.
‘포기….’
그렇겠지. 애초에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 아닌가. 오히려 잘됐다고 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누군가 뒤에서 목을 조르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그러니까 내가 그 녀석을 잡는 것만 도와줬으면 해.”
무휼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푸른 눈을 호원과 마주해 왔다.
여전히 그 눈은 미치도록 예뻤다. 저런 눈으로, 저런 눈빛으로 부탁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어질 것 같았다.
“이곳에…, 머물게 해줘.”
무휼의 눈동자에 붙들린 것처럼, 호원은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 호원이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해.”
무휼이 눈을 크게 떴다. 호원이 다시 한번, 이번에는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미안해.”
곁에 둘 수 없다. 무슨 이유가 되었든.
자리에서 일어선 호원이 자신의 컵과 무휼의 컵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남은 커피와 물을 개수대에 주르륵 흘려버렸다.
호원은 무휼을 단호하게 밀어내기로 했다. 그 결정은 절대로 번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무휼을 위한 일이기도 했으며….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호원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