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다시 한번
“이게 대체 뭐야…? 오너, 혹시 짐작 가는 사람 없어요?”
시영이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한껏 구기고 호원을 돌아보았다. 얼굴은 아직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오랜 세월 호원과 바 ‘3월’을 지켜온 여장부답게 침착한 태도였다.
“…글쎄.”
무심코 ‘없다’고 대답하려던 호원은 슬쩍 말을 바꿨다.
이건 어느 모로 보나 다분히 악의적인 선물이었다. 그러나 시영도, 호원도 아니라면 남은 타깃은 자연히 한 사람으로 좁혀질 것이다.
호원은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시영을 만류하며 상자 안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피 묻은 칼. 그 단어만으로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하필 그런 꿈을 꾼 날 이런 물건을 보게 되다니, 우연치고는 상당히 공교로운 일이었다.
칼날에 고인 채 굳어 있는 검붉은 핏자국이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정신을 뒤흔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릴 것만 같아, 호원은 바 테이블을 꾹 움켜쥐었다.
‘아무래도 단순히 여기 있을 핑계로 한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무휼을 찌른 팀메이트. 그 녀석의 짓일까? 그렇다면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순간, 녀석과 마주치면 무휼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호원이 무휼을 따라 밖으로 나서려는데, 타이밍 좋게도 무휼이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없어. 그새 도망친 것 같아.”
숨을 헐떡거리며 들어온 무휼이 신경질적으로 벽을 쳤다. 작은 욕지거리와 함께 요란한 타격음이 벽을 타고 울렸다. 그새 주변을 꽤 돌아본 모양인지 숨이 가빠 하면서도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하더니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그거 내-”
“잠깐만.”
호원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가 할 말이 무엇일지 짐작이 갔지만, 여기서 말하게 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시영이도 있고.’
호원은 슬쩍 시영의 눈치를 보았다. 담담한 척하고는 있지만 파리하게 질린 얼굴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고, 꼭 잡은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역시 장소가 안 좋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호원이 애써 웃음 지어 보이며 딱 소리가 나게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아. 맞아. 이거 내 거야. 생각보다 좀 빨리 와서 못 알아봤네.”
“…네?”
시영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호원은 자신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통하길 빌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왜, 몇 달 뒤면 핼러윈이잖아. 그때 바를 꾸밀 만한 소품을 몇 개 주문해 놨었거든.”
“핼러윈은 한참 멀었잖아요.”
“작년에도 그렇게 생각해서 늦장 부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했잖아?”
호원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시영은 뭐라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호원은 얼른 상자 뚜껑을 닫고 리본을 추슬러 옆구리에 끼웠다.
“이건 내가 창고에 가져다 둘게. 두 사람 다 많이 놀랐지? 미안, 미안. 이따 야식으로 맛있는 거라도 먹자. 내가 사줄게, 응? 알겠지?”
그는 그대로 휙 등을 돌려 상자를 옮겼다. 그런 호원의 뒷모습을 멀뚱히 보던 시영과 무휼은 서로 시선을 맞추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세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없이 분주하게 오픈 준비를 시작했다.
이질적인 침묵이 불편할 법한데도 그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이사이 무휼은 더 이상 자신에게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호원을 의아하게 쳐다보았으나, 무슨 생각인지 호원은 묵묵히 청소를 하고 보틀을 정리할 뿐이었다.
***
“잠깐 얘기 좀 하자.”
호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온 것은, 한창 바쁜 시간대가 지나고 바의 구성원들도 한숨 돌릴 즈음이었다.
테이블을 닦던 무휼은 그의 진지한 낯을 보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가게 안에는 손님 두어 명 빼고는 텅 비어 있었다. 하기야 주중인 데다 새벽 4시를 향해가는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쪽으로.”
주방으로 무휼을 이끌던 호원이 흘긋 시영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두 사람이 주방으로 향하는 것을 봤으면서도 아무 일도 없는 척 태연한 얼굴로 컵을 닦고 있었다.
호원은 새삼 그녀의 배려와 속 깊은 행동에 감사해하며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제 설명해 봐.”
호원은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무휼을 닦아세웠다. 일하는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던 무휼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짐작하고 있잖아. 그게 맞아.”
“그럼 그 칼이….”
“그래.”
호원은 말을 잇지 못하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옆구리 쪽을 향하는 것을 본 무휼이 대신 말을 이었다.
“날 찌른 칼이지. 그놈이 보낸 게 분명해.”
“하….”
호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무휼은 뭐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다 꾹 다물며 망설였다.
왜 하필 가게였을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금방 나왔다. 그리고 그 답을 생각해 보면, 무휼은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무휼은 섣불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겨우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든 옆에 있을 구실을 만들었는데, 어쩌면 ‘친한 동생’ 정도라도 될 수 있을지 모르는데….
“권무휼.”
호원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무휼은 제 이름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꼭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이질적으로만 들렸다.
호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어 뱉었다.
“저걸 너네 집이 아니라 여기로 보냈다는 건, 범인이 네 행동 범위를 다 알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동시에 널 엿 먹이기 위해서라면 가게에 해코지하는 것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기도 해. 너도 알지?”
“…응.”
피 묻은 칼을 보자마자 뛰쳐나갔던 건 그 이유였다. 지금 당장 녀석을 잡지 않으면 가게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걸 눈치챘으니까.
“어쩌면 또 찌르려고 근처에 잠복해 있을지도 몰라.”
호원의 얼굴은 진지했다. 무휼은 그의 다음 말이 이미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넌 다신 여기 오지 마.’
무휼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안 돼.
말하지 마.
차마 뱉어낼 수 없는 말이 입안에 쓰게 맴돌았다.
호원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넌 당분간 여기 있어.”
“…뭐?”
잘못 들었나?
무휼은 눈을 번쩍 뜨고 호원을 쳐다보았다. 내려다보는 푸른 눈에 놀라움과 당혹감, 죄책감이 섞여 파도처럼 일렁였다.
호원은 그 깊은 눈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위험하니까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잖아.”
“하지만-”
“일단 저 칼은 내가 경찰에 신고해 둘게. 네 이름 안 나오게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아니, 잠깐만. 좀 기다려 봐.”
무휼이 다급하게 호원의 팔을 붙잡았다. 호원이 입을 다물자, 그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왜 그런 일을 해?”
그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떨렸다.
호원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화가 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마치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완벽하기 짝이 없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호원의 취향에 딱 맞아떨어지는 얼굴.
그러나 푸른 눈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어린아이처럼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내버려 둘 수가 없는 녀석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 비 내리던 날부터 지금까지.
호원은 희미한 기대감과 거대한 불안이 담긴 그 아름다운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기대하지 마.”
움찔, 무휼의 넓은 어깨가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굳었다. 호원은 하얗게 질리는 그의 얼굴을 보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너 받아주려는 거 아냐. 가게 오너 입장에서 그런 미친놈이 근처에 돌아다니면 꺼림칙하다고. 최대한 빨리 잡아서 해결하려는 것뿐이야.”
“그럼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그만이잖아? 그놈이 날 찌른 것도 다 밝히고 정식으로 수사 진행하면-”
“권무휼.”
횡설수설 말을 내뱉는 무휼의 입을 호원이 막았다.
“난 어린애 인생 망치는 취미 없다. 일 크게 만들어서 네 선수 생활에 흠집 나는 것도 별로 안 내켜. 너도 그래서 경찰에 알리려고 하지 않는 거잖아.”
이번에도 정곡을 찔렸다. 무휼은 자기 잘못이 아닌 일로 혼난 어린애처럼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잔뜩 찌푸린 미간과 잘근 깨문 입술이 어쩔 수 없이 농염한 색기를 품고 있어서, 호원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아들었으면 부모님 허락이나 받아 와. 훈련도 나가고. 가게는 안 도와도 되니까 그 시간에 이 근처에서 놈의 흔적이나 찾아.”
주방 테이블 한쪽 귀퉁이를 쳐다보며 말을 잇던 호원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이 들개 같은 놈은 눈이 돌면 어디로 튈지 모르니 단단히 교육시켜 놔야 했다.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절대 나서지 말고 날 불러. 범인을 찾아도 덤비지 말고 나한테 연락하고. 알아들었어?”
“…그래도 돼?”
호원은 무심코 당연하다고 말하려다, 무휼이 묻는 게 ‘연락해도 되냐’는 뜻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무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간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곁에 있어도 돼? 그렇게 묻고 싶은 것이다.
호원은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칼같이 선을 그어야 두 사람 모두에게 좋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또다시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다. 이미 당할 만큼 당했으면서 또 같은 짓을 벌이려는 건가. 호원은 머릿속에 맴도는 그 생각을 억지로 지워냈다.
이전의 실수는 그가 명훈에게 여지를 주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니 자신만 중심을 잘 잡으면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호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롯이 그를 시야에 담는 저 푸른 눈의 강아지를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방은 이전에 썼던 방 그대로 써.”
그래서 그는 도망쳐 버렸다. 시선을 회피하며 하는 말에 무휼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