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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40)화 (40/101)

제40화. 조우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을 때, 호원은 여유로운 몸짓으로 테이블 위의 잔과 접시를 치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여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상대를 향한 조금의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순간, 들려온 말에 상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야만 했다.

“우린 초면이지?”

테이블 위에 접시가 담긴 트레이를 올려놓은 호원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마치 기다리던 사람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반가운 미소를 띤 얼굴이 상대를 향했다.

“동갑이라고 들었는데 키가 꽤 크네? 요즘 애들 참 발육도 좋아.”

“당신-”

“일단 앉아. 손님이 아니니까 대접은 시원찮아도 괜찮지?”

호원은 상대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으며 의자를 하나 빼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어서 앉으라는 듯 맞은편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당신 대체 뭐야.”

상대로부터 쇳소리가 긁히는 것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 바로 아래까지 푹 눌러쓴 후드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주머니에 깊게 찔러 넣은 손이 단순히 빈손은 아니라는 것만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호원은 그런 상대를 앞에 두고도 여유로웠다. 그는 오히려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삐딱하게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디 무슨 짓이건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 같은 놈들 생각이야 뻔하지.”

내가 이 짓거리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야. 지겹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가 이윽고 입꼬리를 올리며 상대를 마주 보았다.

“안 그래? 김진수.”

김진수가 화답하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경찰차에 올라탄 시영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무휼이 달려갔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스토킹했던 남자는 또 다른 남자가 가게를 어슬렁거렸다고 했었다. 아마 그 인물은 십중팔구 김진수겠지. 그런데 김진수가 왜 가게에? 그곳에는 지금 호원밖에 없을 텐데.

상대가 아무리 운동선수라지만, 호원 역시 어지간한 남자 정도는 쉽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권총이라도 들고 오지 않는 이상, 호원이 순순히 당할 리 없었다.

처음 무휼에게 시영의 호위를 명령할 때도 호원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놈들 생각이야 뻔하지. 무휼이한테 또 손을 댔다간 오히려 당할 것 같으니까 약한 사람부터 건드리는 거야. 그러니까 시영이가 제일 위험해.’

그러면서 ‘나라면 혼자 있어도 섣불리 달려들지 않을 거야.’라고 덧붙였다. 그 말 때문에 무휼도 못마땅해하면서도 시영의 경호에 순순히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스토커의 말에 의하면 그 남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김진수가 혼자 있는 호원에게 덤비려 한 것일까? 그럼 호원의 가정은 빗나간 건가?

불안한 마음 때문인지 머릿속이 자꾸만 헝클어졌다. 어디선가 뚝,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손끝에서 따끔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시영은 지금껏 물어뜯고 있던 손을 떼어 들여다보았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가로등 불빛이 손끝에 맺힌 핏방울을 비추고 지나갔다.

드문드문 빛을 받는 그 검붉은 액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다시금 불길한 예감이 밀려들었다.

‘호원 오빠는 괜찮은 건가….’

시영이 입술을 꾹 다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가게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쪽 상황을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경찰서에 가서 현장 증언도 해야 했고, 스토커가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혀 온 정황도 낱낱이 설명해야 했다.

그 지난할 게 분명한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에이, 좋아서 그랬다는데 아가씨가 좀 봐주지 그래요?’

‘사람도 만나봐야 아는 거지. 이 기회에 한번 만나나 봐요.’

‘거 아직 나이도 젊은 양반인데 이런 일로 앞길 막긴 좀 그렇지 않아요?’

또다시 그런 말을 들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가벼운 처벌만 받고 상황이 종료되면 저 스토커가 어떻게 나올지도 가늠할 수 없어 공포스러웠다.

그러나 시영은 말아 쥔 주먹을 허벅지 위에 대고 꾹 눌렀다.

얼마나 치욕적인 말을 듣든, 그 어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겪든 간에 굽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미 한 번 물러섰다 너무도 큰 대가를 치르지 않았나. 시영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심장이 멈추고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무휼도 엮여 있었다. 아무리 칼을 든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서였다지만 폭력을 쓴 건 사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무휼이 다짜고짜 가게로 뛰는 바람에 경찰 한 명이 그를 뒤쫓고 있었다. 시영이 먼저 가서 상황을 정리하지 않으면 오히려 무휼이 엄한 불똥에 맞을 수도 있었다.

호원은 무휼이 지켜줄 것이다. 그렇다면 무휼이 호원을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게 지금 자신의 몫이었다. 시영은 이를 악물며 차오른 눈물을 거칠게 슥슥 닦아냈다.

‘제발 무사하기만 해.’

두 사람 모두. 시영은 입속으로 기도처럼 중얼거리며 두 눈을 꼭 감았다.

***

“내가 이리로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김진수는 입구 근처의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이 상황이 퍽이나 즐거운지, 얼굴에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말했잖아? 너 같은 놈들 생각이야 뻔하다고.”

호원이 태연하게 다리를 꼬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 상체를 기댔다. 빈틈투성이인 모습에 김진수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호원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네 목적은 권무휼에게 위해를 가하는 게 아냐. 오히려 무휼이 녀석에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셈이었지.”

“…….”

김진수가 턱을 치켜들며 팔짱을 꼈다. 어디 한번 계속해 보라는 의미였다.

“대신, 무휼이 주변 사람들을 노렸어. 자신 때문에 다치는 사람들을 보며 그 녀석이 고통받길 바랐으니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타인이 소중한 사람일수록, 그 고통이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일수록 괴로움은 커져 간다.

“무휼 그 녀석은 주변에 사람을 쉽게 두는 타입이 아냐. 어중간한 사람을 건드려 봐야 무휼인 눈 하나 깜짝 안 했겠지. 그렇다고 같은 팀메이트를 건드렸다간 오히려 네 발목만 잡을 거고.”

호원은 별거 아닌 잡담이라도 늘어놓듯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김진수의 표정 역시 담담했다. 꼭 제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라도 듣는 표정이었다.

“그러다 넌 발견했겠지.”

여기를. 호원이 바 ‘3월’의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무휼이 답지 않게 집착하며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장소. 이곳이 표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부터 뭘 어쩔 셈이었지? 가게 물건이라도 부수게? 아니면 돈이라도 털어갈 생각인가?”

호원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세는 무방비한 그대로였다.

“다 좋은데, 한 가지 틀린 부분이 있어.”

김진수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했다. 새카만 눈동자가 히죽 웃으며 호원의 전신을 훑었다.

“애초부터 내 목적은 이 가게가 아니라, 당신이었거든.”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김진수가 걸터앉아 있던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냥감을 몰아넣는 짐승처럼 천천히 걸어온 그가 이윽고 호원과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췄다. 팔을 뻗으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을 거리였다. 호원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찰 뻔한 것은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하여간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권무휼 취향 한번 독특해.”

김진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대놓고 호원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진득한 시선이 호원의 발끝부터 다리로 올라오는가 싶더니 테이블 쪽으로 기울어진 허리와 어깨를 지나 얼굴에 고정됐다.

“쓸데없이 멀끔하게 생겼네, 당신. 가까이에서 보니 꽤 미남이었잖아?”

“그거 고맙네.”

호원이 피식 웃었다.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태평한 얼굴에 김진수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웃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돼?”

김진수가 주머니에서 서바이벌용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는 커터칼이었다고 하더니, 아예 작정한 모양인지, 시퍼렇게 날이 선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한 뼘가량 되는 작은 사이즈였으나, 무방비한 사람 한 명에게 큰 상처를 입히는 것쯤은 간단해 보였다.

“눈에 잘 보이려면 역시 얼굴이겠지? 모처럼 잘생기게 태어났는데 미안하네.”

김진수가 예고라도 하듯 호원의 얼굴 앞에서 칼날을 그어 보였다. 새파란 칼날에 가게의 조명 빛이 어지럽게 부서졌다.

“원망할 거면 권무휼 그 새끼를 원망해. 아, 어차피 당신도 그 새끼와 같은 호모일 테니 스스로의 취향이라도 원망해 보든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네.”

호원은 눈앞에서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코끝을 스치는 상황에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럼없이 상체를 일으켜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의 행동에 김진수가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서워라도 하라고, 이 변태 새끼야.”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이 달려들어 호원의 멱살을 낚아챘다. 호원의 몸이 등받이에 밀쳐지며 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렸다.

그러나 호원은 여전히 담담한 눈으로 김진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오히려 호원의 멱살을 잡아 올린 김진수 쪽이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럼 해보든가.”

호원이 툭 내뱉었다.

“뭐?”

김진수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한 손에는 자신의 멱살을, 다른 손에는 나이프의 손잡이를 쥔 채 멍하니 반문하는 모습에 호원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도구도 있고, 상대의 반항도 없고. 일을 치려면 진작 쳤어야지 않나?”

호원이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섰다. 역시 운동선수라 그런지 김진수도 꽤나 키가 커서, 호원은 시선을 살짝 들어야 했다.

“아까 보니 칼솜씨도 좋겠던데. 한번 해보라고.”

호원은 재촉하듯 제 얼굴을 김진수 쪽으로 들이밀었다.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면 키스라도 종용하는 모습처럼 보일 터였다.

“너, 너….”

김진수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덜덜 떨리는 턱과 시선 둘 곳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눈이 혼란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못 하겠지?”

호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오히려 한 발 성큼 김진수에게 다가섰다. 호원의 멱살을 잡은 손이 흠칫하며 힘을 주었지만,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옷깃만 구겨댔다.

김진수에게 가까이 몸을 붙인 호원이 그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나는 정말 돌아버린 새끼가 어떻게 행동하는질 알아. 적어도 너처럼 어설프게 상처나 입히진 않지.”

김진수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호원의 손이 별안간 나이프를 쥔 손목을 덥석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김진수가 팔을 떨쳐내기도 전에 호원이 그의 손목을 위로 들어 올렸다.

“모처럼 칼도 준비했는데 써봐야지 않겠어?”

호원이 슬쩍 옆으로 시선을 굴렸다. 그의 얼굴 바로 옆에 시퍼런 칼날이 닿아 있었다. 김진수가 조금이라도 손목을 틀면 호원의 얼굴 가죽을 손쉽게 벗겨낼 수도 있을 거리였다.

“뭐 해? 가장 눈에 띄는 데는 얼굴이라며. 잘 알고 있잖아.”

호원이 눈꼬리를 휘며 씨익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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