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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47)화 (47/101)

제47화. 내다버린 거였다

솔직히 말해서, 시영은 지금 이 상황이 못 견디게 답답하고 짜증 났다. 깨끗한 행주로 테이블을 벅벅 닦으며 그녀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나는 지레 겁먹고 얼굴도 안 비추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새초롬한 눈이 흘긋 바 안쪽을 향했다. 안에서는 호원이 새로 들여온 보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라벨과 생산연도, 생산지별로 깔끔하게 분류하던 이전과는 달리 그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집어넣는 것처럼 보였다.

눈도 흐리멍덩한 것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기계적으로 손을 놀리는 듯했다.

“…저러고 있고.”

탁, 테이블 위에 행주를 내던진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너. 아니, 호원 오빠.”

그녀의 부름에 느릿하게 보틀을 집어 들던 호원이 시선을 돌렸다.

마침 마감 청소도 끝나가는 가게 안에는 호원과 그녀 단둘뿐이었다. 호원은 그녀에게 퇴근하라 했지만 하루 종일 일에 집중도 제대로 못 하고 멍하니 있던 그가 신경 쓰여 부러 남은 것이었다.

“잠깐 여기 와서 앉아봐.”

그녀는 바의 자리 하나를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고는 행주를 들고 바로 바 안으로 들어왔다.

호원은 잠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두었다. 호원 본인이 생각해도 오늘 하루 일에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호원 못지않게 가게 운영에 진심인 시영에게 한마디 듣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호원이 자리에 앉자 시영은 그의 앞에 위스키잔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찬장을 열어 보틀 하나를 꺼내 왔다.

위스키잔에 호박색 액체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차올랐다. 캐러멜처럼 달짝지근한 향과 그을린 나무에서 나는 듯한 연기 냄새가 코끝을 가볍게 스쳤다.

시영은 잔을 하나 더 꺼내 자기 몫의 위스키를 따르고는 가볍게 들어 올렸다.

“마셔요.”

유리로 된 잔이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입 안에 흘려 넣자 위스키 특유의 강한 알코올 향이 확 퍼졌다. 그 뒤로 캐러멜에 담근 과일과도 같은 단맛이 따라붙어 혀끝이 저릿했다.

호원은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시영과 단둘이 위스키를 마시는 건 드문 일이었다. 새로운 메뉴를 개발했다며 시음회 겸 술자리를 가진 적은 여러 번이었지만, 이렇게 위스키를 병째 꺼내는 건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이랬던 적이 아마… 2년 전이었나.’

당시 시영은 유학길에 오르기 직전이었고, 호원의 도움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 호원이 꺼낸 것이 바로 저 위스키였다.

얼핏 보면 호리병이나 항아리 같은 모양새의 병은 아래로 갈수록 둥글고 커지는 형태였다. 유약을 바른 것처럼 매끈한 표면은 고급스러운 파란빛이었고, 중앙에 금박으로 라벨이 들어가 있었다.

“이거 기억나? 그때 호원 오빠가 나한테 그랬잖아. 이 한 병에 들어가는 정성만큼만, 딱 그만큼만 나한테 쏟고 있는 거라고.”

“…….”

“그러니까 부담 같은 거 느끼지 말고 다녀오라고.”

시영의 시선이 푸른색 병을 향했다. 매끈한 표면을 느릿하게 쓰다듬는 손길은 애정이 담뿍 담겨 한없이 다정했다.

“근데 왕실에 헌상하는 위스키를 만들 만한 정성이면, 이건 뭐 거의 프러포즈 아닌가?”

시영이 농담조로 말하며 작게 웃었다. 그때의 일이 떠올라 호원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넌 재능이 있었으니까. 그냥 아르바이트로 쓰기엔 너무 아까웠거든.”

“그럼 그 녀석은?”

자연스럽게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리던 손이 허공에 뚝 멈췄다.

호원은 눈앞에서 찰랑거리는 호박색 액체를 가만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시영이 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 알 것 같았다.

“권무휼 그 녀석은, 안 아까워?”

“시영아.”

“난 아깝던데.”

경고하듯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지만, 시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너무 아까워서, 지금 처음으로 오빠한테 화가 나.”

“…….”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하고.”

시영이 말을 내뱉고는 잔을 들었다. 느릿하게 내뱉는 한숨에 달짝지근한 위스키의 향이 배었다.

“수현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오빠를 오래 봤다면 봤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한 사람한테 휘둘리는 건 처음 봐.”

“나도 그래.”

“뭐?”

“나도 내가 한심하다고.”

시영이 입을 다물었다. 호원은 손안에 쥔 위스키 잔을 천천히 돌렸다. 금빛을 머금은 녹진한 액체가 투명한 유리 표면을 따라 흐르며 흔적을 남겼다.

“오늘 낮에… 무휼이 만났어.”

시야에 들어오는 시영의 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녀로서도 뜻밖의 말이었는지 살짝 숙인 얼굴에 와 닿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 앞에 카페 하나 있잖아? 내가 자주 가는 곳. 거기에 커피 사러 갔었는데 안에 앉아 있더라.”

아직도 손바닥이 화끈거리는 것만 같았다. 여름은 다 지나갔는데, 카페 문손잡이를 잡았던 손은 꼭 한여름 햇살에 달궈진 쇠라도 잡은 것처럼 홧홧했다.

“말은 했어? …뭐래?”

한참 말을 고르던 시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호원은 반 이상 비운 잔을 다시금 들어 올렸다.

걸쭉한 시럽을 들이부은 것처럼 무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어 다시금 머릿속을 울렸다.

‘실은… 만나고 싶어서 와봤어. 정말 만날 줄은 몰랐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었던 것만은 기억이 나는데, 누가 봐도 억지웃음을 짓는 녀석의 표정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지금도 좀 더 오래 보고 싶은데… 바보같이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지금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다짜고짜 찾아와서 이러는 거, 당신이 좋아할 리도 없는데…. 그냥….’

숨도 쉬지 않고 다다다 말을 내뱉던 녀석은 스스로에게 제동을 거는 것처럼 입술을 콱 깨물었었다. 그 와중에도 힘이 들어간 턱이 이전보다 갸름하게 야위어 있어서 가슴께가 아렸었다.

오랜만에 보는 새파란 눈동자가 똑바로 시선을 맞춰왔을 때,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던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그게 다야. 무휼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만 가보겠다며 호원을 지나쳤다. 당장 붙들려고 하면 손쉽게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느릿한 걸음걸이였다.

그 걸음 하나에도 무휼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졌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울컥거리는 감정이 치솟아 올랐지만, 그 당시에는 머릿속이 그저 새하얗기만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잡아야 했을까? 멀어지는 녀석을 붙잡아서 돌려세웠어야 했을까?

그래서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호원은 입술을 꾹 짓씹었다. 입 안에 가득한 과일의 들쩍지근한 단맛과 그을린 나무의 향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흘긋,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스키 보틀을 향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선연한 파란색이 낮에 마주한 눈동자를 떠올리게 했다.

“…보고 싶었어.”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시영이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었다.

“아직 미련 많이 남았네. …하긴 오빠 성격에 칼같이 밀어냈을 테니 그 녀석 입장에선 미련이 남을 만도….”

“아냐.”

호원이 잔을 내려놓았다. 유리와 나무 데크가 맞닿아 탁, 하는 소리를 냈다.

“무휼이가 아냐.”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거야.”

그게 무슨 엉뚱한 말이냐며 시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호원은 갈고리가 달린 것처럼 목 안쪽에 매달려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밀어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거야.”

우연히 마주친 얼굴이 퍽 야윈 게 신경 쓰여서 일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웅얼거리듯 내뱉은 뒷말에 시영은 들어 올리던 잔을 황망히 내려두었다.

“미안, 시영아. 그만 가봐야겠다.”

호원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시영은 ‘어딜?’이라고 묻지 않았다. 이상하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영은 그저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잘 다녀와.”

***

여름이 다 지나갔다지만 아직 낮에는 반팔을 입어도 땀이 날 만큼 후덥지근했다. 그래서일까, 호원은 새벽 공기를 너무 얕본 모양이라고 한탄하며 팔짱을 꼈다.

얇은 셔츠와 슬랙스에 닿아오는 공기가 서늘했다. 턱이 덜덜 떨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오래 서 있다가는 십중팔구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싶은 기온이었다.

늦여름만 되어도 이렇게 서늘한데, 대체 겨울에는 어떻게 아침 훈련을 하는 걸까. 운동하는 애들이라 피가 뜨겁나.

호원은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며 괜히 눈에 띄는 돌부리를 구두코로 걷어찼다.

해가 막 뜨기 시작할 시간이라 그런지 사위는 아직 어두컴컴했다. 이런 시간에도 혈기왕성한 대학생들은 잘도 나다니는지 학교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교문에서 잡히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호원은 성큼성큼 캠퍼스 안을 잘도 돌아다녔다.

중간중간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멘 앳된 청년들이 그를 흘긋거리며 지나쳐 갔다. 하나같이 수척한 얼굴에 손에는 작은 유리병이며 캔 음료 따위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새벽까지 도서관에서 시험 공부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 누가 봐도 교수도, 학생도 아닌 듯한 그의 모습은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게다가 살짝 추워 보이는 옷차림의 남자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멀뚱히 서 있는 모습에 개중 몇몇 학생들이 흘끔흘끔 말 붙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저기, 혹시 누구 기다리세요?”

용기 내어 말을 붙인 사람은 자그마한 체구에 귀여운 인상이 다람쥐 같은 여학생이었다. 피곤해 보이는 와중에도 얼굴이 매끈한 것이 확실히 어린 티가 났다.

새삼, 그 녀석도 어리긴 어렸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호원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여학생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죄송한데, 혹시 체대 건물이 어느 쪽인지 아세요?”

“아, 약속 있으신가 보네요. 체대면 여기서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면 안내해 드릴까요?”

반색하며 말하는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호원이 허락만 한다면 캠퍼스 투어라도 시켜줄 기세였다.

호의는 고마웠지만 괜한 기대감을 심어줄 생각은 없었다. 호원은 난처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냥 방향만 알려주시면 돼요.”

“어차피 저 그쪽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리고 체대 건물은 가는 길이 복잡해서 안내 없이는 곤란하실 거고요.”

자그마한 여학생은 생각보다 저돌적이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적극적인가? 호원은 쩔쩔매며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호원과 여학생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새로운 인물에 의해 끝나 버렸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새벽의 청명한 공기를 뚫고 반쯤은 당황한 듯한, 그리고 반쯤은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원은 여학생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새벽하늘처럼 푸른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리며 그를 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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