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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53)화 (53/101)

제53화. 영역 침입

문손잡이를 앞에 두고 그는 잠시 고민했다. 손잡이가 손바닥의 열로 미적지근하게 달아오른 것이 느껴졌다.

눅눅하게 땀이 배어드는 손바닥을 차마 거둘 생각도 못 한 채로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귓가에 무섭게 내리치는 빗소리가 그의 등을 살며시 떠미는 듯했다.

비가 많이 와서, 잠시 쉬어가려고. 그런 핑계들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떤 말을 해도 결국 변명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비 오는 밖에서 서성이느라 푹 젖은 셔츠 위로 한기가 스몄다. 이대로 있다간 감기에 걸릴지도 몰랐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싶었지만, 그는 꾹 잡아 쥔 손잡이를 밀어 열질 못했다.

역시 돌아가자. 그런 생각으로 막 손을 떼려던 참이었다.

“…어?”

덜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던 그는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에 숨을 들이켰다.

“진혁 씨 아니에요? 왜 그러고 서 있어요?”

시영이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다가 아, 하고 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다 젖었잖아요?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당황해하는 그녀의 말에도 진혁은 함부로 발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시영의 얼굴과 문을 번갈아 향하던 시선이 가게 안쪽을 향했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장신의 날씬한 실루엣이 보였다.

큰일이다. 그가 발견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두 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호원은 잠시 그를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바텐더 복장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저기….”

진혁은 입술을 달싹이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니 무슨 말이든 할 수나 있을까. 감히 말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입술만 잘근거리는 그에게 호원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들어와서 옷부터 말려야겠다.”

진혁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을 줄은 몰랐다.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자 호원이 픽 웃었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얼른 들어와. 시영아, 수건 좀.”

“네, 네.”

시영은 어쩐지 즐거워 보이는 얼굴로 냉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호원은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살짝 비켜서더니 안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안 들어와?”

“…들어가요.”

진혁은 씁쓸하게 웃으며 은은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가게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후, 바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진혁은 시영이 내미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았다. 오랜만에 오는 바 ‘3월’은 여전히 포근하고 다감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일 있고 난 뒤로는 처음 오는 거네.”

뜻밖에도 먼저 그날의 일을 꺼낸 것은 호원 쪽이었다. 설마 이렇게 빨리 그 일을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듯, 진혁의 얼굴이 굳었다.

“그때는… 동생 때문에 정말 죄송했습니다.”

진혁이 시선이 호원의 손을 향했다. 붕대는 진작 풀었지만 왼손에 희미하게 흉이 져 있었다. 진수가 보냈던 송곳에 찔렸다고 했던가. 가느다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던 손에 실금 같은 흉터가 눈에 걸렸다.

“네가 사과할 일 아니잖아. 괜찮아.”

호원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럼에도 진혁은 차마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다녀왔어.”

그때, 바 문을 열고 또 다른 장신의 남자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진혁에게도 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

무휼은 진혁의 얼굴을 알아보고 짧게 목소리를 내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호원에게 다가섰다.

“부탁한 레몬. 이 정도면 돼?”

“어어, 잘 사왔네. 고마워.”

호원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마트 로고가 찍혀 있는 반투명한 비닐봉지 안에서 노랗게 익은 레몬들이 굴러다니며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호원은 비닐봉지를 열어 안을 확인해 보더니 슬쩍 진혁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 무휼과 그가 썩 껄끄러운 사이일 거라 짐작하고 신경을 써주는 모양이었다.

진혁 역시 이 자리가 편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곳에서 무휼의 얼굴을 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저번에 봤을 때는 분명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았는데.’

그는 마지막으로 무휼을 마주했던 때를 떠올렸다. 사과를 하고 싶다는 진수의 부탁을 받고 무휼을 병원으로 불렀을 때의 일이었다.

그때 질투심에 괜히 성질을 긁었다가 되레 의아함만 가득 얻었던 것이 떠올랐다. 버림받은 개처럼 시무룩한 모습이 어제 일처럼 그의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은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새 화해한 걸까?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원 성격에 한 번 내쳤던 사람을 다시 받아들인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목이 바싹 탔다. 그는 앞에 놓인 물잔을 들이켜고는 신중하게 두 사람을 살폈다.

“밖에 비 많이 오는 것 같던데, 괜찮았어?”

“당신이 우산 챙겨준 덕분에 안 맞았어.”

베이킹소다를 섞은 물에 레몬을 씻으며 호원이 묻자, 무휼이 성큼 그의 옆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레몬이 담긴 통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천연덕스러웠다.

호원 역시 그의 행동에 피식 웃기만 할 뿐, 그에게 레몬을 맡기고 손을 씻었다.

저게 지금 뭐 하는 행동이지? 진혁은 황당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가 아는 호원은 저 정도로 무방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는 심지어 그가 한 번 밀어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상대에게 저토록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대하는 호원의 모습이라니, 잠시 못 본 사이 사람이 바뀌었나 싶을 정도였다.

당황한 그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는데, 마침 고개를 들던 무휼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

“…….”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진혁은 알 수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권무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므로.

아무래도 그가 동생의 간병과 이번 사고의 뒤처리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괜히 왔나. 진혁은 위장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에 미간을 찡그렸다.

“자, 진혁이 넌 이거.”

불쑥 눈앞으로 접시 하나가 내밀어졌다. 매끈하고 하얀 접시 위에는 샌드위치가 놓여 있었다. 크림치즈를 바른 빵에 슬라이스한 오이를 얹은 오이 샌드위치였다.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도 보기보다 맛있어서 진혁이 자주 찾던 음식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올려다보니 호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살 빠진 꼴 봐라. 보나 마나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지? 일단 그거 먹고 있어. 뭐라도 해줄 테니까.”

타박하는 말인데도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호원이 그의 기호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에 속절없이 설렜고, 많은 일이 있은 뒤에도 평소처럼 대해주는 호원의 배려에 가슴께가 뻐근했다.

아직은 그래도 ‘친한 동생’에서 벗어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것이 못내 안심이 되었다.

‘게다가 저 꼴을 보니 더 마음이 놓이는데.’

진혁이 슬쩍 시선을 굴려 호원의 옆을 흘긋거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레몬을 손에 든 무휼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그의 앞에 놓인 그릇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표정 하나만으로도 진혁은 손쉽게 상황을 추리해 볼 수 있었다. 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마디가 굵은 손이 한입 크기로 잘린 샌드위치를 하나 집어 들었다. 무심코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리던 무휼은 씨익 웃고 있는 그와 시선을 딱 마주쳤다.

잘생긴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진혁은 소리 내어 웃고 싶은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샌드위치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상큼한 오이가 부드럽고 고소한 치즈와 함께 입 안에 기분 좋게 퍼졌다. 오랜만에 먹는 호원의 오이 샌드위치는 어쩐지 그리운 맛이었다.

“그… 동생은 좀 어때.”

잠시 후에, 호원이 그의 앞에 갓 만든 볼로네제 파스타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듬뿍 들어간 다짐육과 양파에서 입맛을 돋우는 먹음직스러운 향이 났다.

진혁은 호원이 준비해 주는 포크를 받아 들고 파스타를 쿡 찔렀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면을 포크에 돌돌 감으며 그가 말했다.

“지금은 괜찮아졌어요. 재활 훈련도 잘 받고 있고, 운동은 힘들겠지만 일상생활에는 문제없다고 하고요.”

“치료 잘 받고 있으면 됐어.”

호원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정말로 진혁과 진수 형제를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단순히 운이 나빠 휘말린 피해자인데 가해자 걱정을 하다니, 진혁은 울컥 막히는 것 같은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파스타를 밀어 넣었다.

“나는?”

그때, 머리 위에서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흘긋 위를 쳐다보니 무휼이 호원 가까이 붙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은근슬쩍 몸을 가까이 붙이며 호원의 어깨에 턱을 괴는 것이 애교라도 부리는 모양새였다.

덩치도 큰 녀석이 그러고 있으니 진혁의 눈에는 영 아니꼬웠다.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호원은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더니 손을 올려 무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넌 이따가 먹고 싶은 거 해줄게. 시영이랑 같이 천천히 먹고 와.”

“당… 아니.”

뭔가 말하려던 무휼이 돌연 입을 다물었다. 호원의 어깨에 머리를 얹고 비비적거리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진혁을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가늘게 휘며 호선을 그렸다.

“주인님 식사는 내가 챙겨줄까?”

은근하게 속닥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바로 앞에 앉은 진혁에게는 안 들릴 수가 없는 크기였다. 진혁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무휼은 오히려 보란 듯이 호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딱! 소리가 났다.

“아!”

무휼이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호원을 돌아보았다.

숟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후려친 호원이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팔을 떼어내며 인상을 구겼다.

“너 내가 적당히 하라 그랬지? 때와 장소 못 가려?”

“아니,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가게에서 계속 이럴 거면 집에 가.”

호원의 단호한 말에 무휼이 울상을 지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진혁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저 두 사람 사이는 연인 관계 비슷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말 안 듣는 대형견과 엄격한 주인. 딱 그 짝이었다.

어쩐지 초조해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진혁은 여유롭게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휘감았다.

막 포크를 입에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무휼 또래의 남자 한 명이 바 안으로 뛰어 들어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그러다 바 안에서 호원에게 치대고 있는 무휼을 발견하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야, 권무휼!”

그 외침에 무휼과 호원, 진혁의 시선이 동시에 남자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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