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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77)화 (77/101)

제77화. Hunting instinct (10)

축제 둘째 날은 외부인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날이기 때문에 특이한 이벤트들이 열리곤 했다.

덕분에 각 학과의 부스들은 호객 행위에 정신이 없었고, 어디든 일손이 모자라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참이었다.

그것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는 게 무휼의 실수였다.

“…미안.”

무휼이 나직한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의 앞에는 팔짱을 낀 혜영과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깨문 호원이 나란히 서 있었다.

무휼은 즐거워 죽겠다는 것처럼 보이는 호원의 얼굴을 살짝 흘겨보더니 뚱한 표정의 혜영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하기로 했으니까 얼른 끝내고 갈게요.”

그는 봐달라는 듯 손에 든 피켓을 살짝 올려 보였다. ‘체대 많이 먹기 대회 상금 10만 원’이라는 글이 적힌 피켓이 그의 큰 손안에서 유독 초라해 보였다.

혜영은 안절부절못하는 무휼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피켓에 적힌 글씨를 읽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들.”

“네.”

“이거 너도 나가니?”

혜영이 피켓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무휼은 그녀의 의중을 알지 못해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아닌데-”

“아, 무휼이 어머님이세요?”

그때 무휼의 대답을 냉큼 끊어버리며 학과장 선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무휼 못지않은 커다란 몸을 배배 꼬며 방실방실 웃어 보였다.

“와 역시 피는 못 속이네요. 엄청 미인이세요!”

“그쪽이 얘한테 이거 시킨 선배예요?”

혜영은 학과장의 아부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검지로 무휼을 척 가리켜 보였다.

무휼은 난감해하며 초조한 얼굴로 선배와 혜영을 번갈아 보더니 도움을 청하는 듯 호원을 쳐다보았다.

나보고 뭘 어쩌라고. 호원은 이 상황이 퍽 흥미진진했으므로 무휼의 간절한 눈빛을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치사해. 무휼이 입 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는 게 보였지만 호원은 피식 웃기만 했다.

“아니, 홍보가 아무리 중요하다지만 애 꼴이 이게 뭐예요.”

혜영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하더니 무휼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무휼은 어제와는 달리 새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 그리고 평범한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누가 봐도 단정한 차림새였다.

학과장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아,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는 무휼에게 휙 돌아서더니 한 손을 올려 무휼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 보였다.

“이쪽이 나을까요?”

“당연하죠!”

혜영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학과장은 진지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헤어 무스를 가져오겠다며 체대 부스 쪽으로 달려갔다.

“쟤 뭘 좀 아네. 뭘 해도 크게 될 애다, 얘.”

혜영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학과장의 등을 쳐다보더니 무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너는 홍보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모처럼 예쁜 얼굴을 해서는 그걸 왜 살리질 못하니?”

“어머니….”

무휼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학과장이 헤어 무스를 들고 돌아오자 두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무휼의 머리를 세팅하더니, 기어이 복장까지 물고 늘어졌다.

“셔츠 단추를 다 잠그고 넥타이로 리본을 매면 어때요?”

“그건 안 돼. 넥타이 재질이 빳빳해서 리본이 안 예쁠 거예요.”

“그럼 이렇게는요?”

“어휴, 너무 야한 거 아니에요?”

“얘는 어차피 몸이 야해서 꼭꼭 숨기면 더 야해 보여요, 어머님.”

꼭 백화점 의류 판매 직원과 손님의 대화 같았다. 무휼은 반쯤 포기한 얼굴로 두 사람이 셔츠 단추를 풀든 말든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러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즐거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 호원을 향해 눈을 흘겼다.

“그래, 이제 좀 낫네. 예쁘다.”

혜영과 학과장은 무휼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떨어졌다.

겨우 자유의 몸이 된 무휼은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번호 교환까지 하는 걸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호원에게 다가왔다.

“미안…. 한 시간만 어머니 좀 부탁할게.”

“천천히 와도 괜찮아.”

“딱 한 시간 있다가 갈게.”

무휼은 다짐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반만 올린 앞머리를 살짝 매만지더니 흘긋 호원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라, 호원은 픽 웃으며 순순히 물어봐 주었다.

“왜?”

“…당신이 보기엔 어때.”

뭐가? 호원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무휼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나.”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입술 사이로 나지막하게 새어 나온 소리에 호원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어린아이를 칭찬하는 것처럼 무휼의 등을 토닥거리며 방긋 웃었다.

“그래, 그래. 우리 무휼이 지금 너무 예쁘다. 머리도 예쁘고 셔츠 앞섶 푼 것도 섹시해요. 아이돌 같네, 아이돌.”

“…….”

과하게 칭찬하는 어조에 놀리는 기색을 느꼈는지 무휼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괜히 말했다는 심산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호원은 그저 웃어버렸다. 뭐, 예쁘다는 게 거짓말도 아닌데. 이 정도 놀리는 건 괜찮겠지.

“진짜야. 멋있어, 너.”

“그럼 평소에도 칭찬 좀 해줘.”

취했을 때나 말하지 말고. 무휼이 어느 날을 떠올리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날을 떠올린 호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자 무휼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어차피 당신 건데.”

귓가에 닿는 숨결이 뜨거웠다. 호원은 열이 확 몰리는 것 같은 귓바퀴를 손으로 감싸며 무휼에게서 떨어졌다.

가느다래진 갈색 눈동자가 무휼을 흘겼다.

“어린 게 못된 것만 배워서는.”

“누구한테 배웠다고 생각해?”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요. 호원은 쯧 혀를 차고는 무휼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마침 학과장과 돈독한 관계 형성을 마친 혜영이 두 사람 쪽으로 오고 있었다.

***

저녁을 먹자니 시간이 애매해서, 혜영과 호원은 적당히 근처를 돌아보고는 카페로 향했다.

어딜 가든 어리고 앳된 대학생들 천지라 두 사람이 부스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 있기도 애매했던 것이다.

“역시 어린애들 노는 데 늙은이가 끼면 안 된다니까.”

혜영은 한쪽 뺨에 손을 대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도 조교 못지않게 어려 보여 호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호원 씨는 나이가 꽤 있던가? 아르바이트하면서 알게 됐다고는 들었는데.”

혜영이 웃음기 어린 얼굴로 물었다. 호원은 괜히 가슴 한쪽이 콕콕 찔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서른다섯입니다.”

“전혀 그렇게 안 보여서 놀랍네요. 늦었지만… 우리 무휼이가 신세 많이 졌다고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혜영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깊게 숙여 보였다. 갑작스럽게 정중한 인사를 받은 호원은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마세요. 정말 안 그러셔도 돼요.”

오히려 잘못을 빌어야 할 건 자신인데 그녀가 고개를 숙이니 호원으로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혜영은 고개를 들더니 그런 호원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저와 무휼이는 피가 통하지 않는 모자지간이에요. 무휼이가 10살일 때 저희 집에 입양했죠.”

차분하게 새어 나오는 말소리에 호원의 어깨가 움찔했다. 전혀 뜻밖의 이야기였다.

누가 봐도 사이좋은 모자로 보였는데. 심지어 두 사람은 나란히 두고 보면 닮은 곳이 꽤 많았다.

오뚝한 콧대나 부드럽게 이어지는 입술 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기고 떠질 때마다 팔락거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랬다.

그런데 친모자지간이 아니라니.

호원이 당황해하는 기색을 느꼈는지, 혜영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휼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떴어요. 그 탓에 어린 무휼이가 부족한 양어머니 때문에 고생 많이 했죠.”

“…그랬군요.”

내심 무휼을 부잣집에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자란 도련님이라고 생각했던 호원은 새삼 그것이 미안해졌다.

“아직도 그때 버릇이 남았는지, 애가 제 앞에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을 안 해요.”

그래선지 더 애틋하고 미안하다며 혜영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보며, 호원은 이제 마음을 굳혀야 할 때임을 알았다.

전부를 말할 순 없어도, 혜영이 없는 사이 무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해줘야 했다.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호원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실은….”

“그동안의 얘기는 다 들었어요.”

그러나 이번에도 혜영은 호원보다 한발 빨랐다.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는 호원에게 혜영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래 봬도 무휼이 어미예요. 그 애가 거짓말하는지 아닌지는 뻔하죠. 그리고 보통 그 애가 거짓말을 할 때는 뭔가 사연이 있을 때더라고요.”

그녀는 이전에 한국에 잠시 귀국했을 때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다며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제야 호원의 머릿속에 최민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사모님 돌아오셨다.’

그때였다. 무휼이 한 달 동안 바 ‘3월’에 종적을 감췄던 때. 그때 이미 이야기를 했던 걸까.

그렇다면 혜영은, 그 뒤의 이야기까지 모두 알고 있을까?

김진수가 바 ‘3월’의 사람들에게 어떤 해코지를 했는지, 무휼이 어쩌다 사고에 휘말렸는지.

그리고… 호원과 무휼이 어떤 관계인지.

호원은 등허리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혜영은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가만 쳐다보더니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올렸다.

“무휼이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건 알아요. 제게 전부 다 말해준 건 아니거든요.”

자신의 속을 들여다본 듯한 그녀의 말에 호원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그 애가 먼저 제 방에 찾아왔어요.”

“…네?”

호원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목소리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였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맞은편에 앉은 혜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옅은 미소를 띤 채로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무휼이가 그러더군요.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나중에 꼭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다고요. 자신에게는 여생을 모두 걸 만한 이야기니 꼭 진지하게 들어달라고 말이죠.”

그녀의 눈이 살며시 휘며 웃음기를 담았다. 호원은 그 눈에 담긴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도 선명한 감정이라 손을 대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애가 그렇게 말하니 어쩌겠어요. 믿고 기다릴 수밖에요.”

따스한 온기가 스민 목소리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호원은 그런 그녀의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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