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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79)화 (79/101)

제79화. 올가미 (2)

숙경은 방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며칠째 감지 않아 기름기로 번들거리는 머리카락이 마구 뒤엉킨 채 그녀의 얼굴과 어깨에 늘어져 있었다.

커튼처럼 늘어뜨린 머리카락 사이로 창백하고 흰 얼굴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아래가 움푹 꺼진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는 너무 작고 가냘파 그녀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때문에 방 안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초침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들리는 어떤 소리였다.

딱, 딱, 하고 뭔가 딱딱한 것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는 그녀의 입가 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한 거였어. 그 …가 내….”

그녀는 옹송그린 어깨를 덜덜 떨며 중얼거렸다. 손톱을 물어뜯느라 발음이 뭉개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뜯긴 손가락 끝에서 피가 흘러 소매를 적셨지만 그마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띠링- 하고 경쾌한 기계음이 울렸다. 그녀의 시선이 옆에 놓여 있던 휴대폰으로 향했다.

화면에는 문자 메시지가 하나 떠 있었다. 그녀는 거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으로만 그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입니다. 모두 즐거워하고 있네요. 구경이라도 하러 오시지 않겠어요?

숙경은 문자 발신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애초에 지금 그녀에게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이 남자 한 명뿐이었다.

축제? 즐거워하고 있다고?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윽고 이가 악물리며 빠드득하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아들 진수는 재활원에서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는 가정에서 내원하며 재활치료를 하려 했으나, 그 못 미덥고 오만하기만 한 의사들은 숙경이 진수를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아드님도 아드님이지만, 어머님 쪽이 더 심각하세요. 육체의 병만 병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으니 소개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했던 게 어떤 의사였더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에 은테 안경을 쓴 늙은 놈이었다.

감히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해? 내가 미쳤다는 거야, 뭐야. 숙경은 모멸감과 수치심에 눈이 돌아갈 것 같았다.

이게 다 그 녀석 때문이었다. 진수를 그렇게 만든 그놈.

‘나와 내 아들은 그 꼴이 됐는데, 그놈은 한가롭게 축제를 즐기고 있다고? 즐거워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숙경의 눈이 데구르르 굴러 자신의 옆을 향했다. 휴대폰의 옆에 한 뼘 반 정도 되는 길이의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신문지로 싸인 끄트머리에 검은색 플라스틱 손잡이 끝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홀린 것처럼 그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서 흘러나온 피가 검은 손잡이에 얼룩을 남겼다.

손잡이는 미리 맞춘 것처럼 그녀의 손에 착 들어맞았다.

***

사건은 신우대 축제 셋째 날, 역대 최다 매출을 갱신한 체대 주점 부스에서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까지 홍보다 뭐다 정신없이 돌아다닌 무휼이 막 부스로 돌아왔을 때였다. 학과장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손짓해 불렀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도 주변 눈치를 살피던 학과장은 그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갔다.

“야, 너 저번에 같이 있던 사람 말인데. 그분, 식음료학과 강사님이지?”

같이 있던 사람이라니, 호원의 이야기인가 싶어 무휼의 안색이 변했다.

불시에 심각해지는 그의 얼굴을 본 학과장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야 있잖아…. 하씨, 내가 그걸 왜 들어가지고….”

학과장은 작게 욕지거리를 씹더니 무휼을 돌아보았다.

“내가 방금 본관 쪽에서 오는 길에 주워들은 건데… 그 강사님 혹시 학생이랑 사귀냐?”

뭐? 무휼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학생이랑 사귄다니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일까. 혹시 눈치챘나? 그런 티는 전혀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무휼은 입술이 바짝 마르는 기분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무휼에게서 대답이 없자 학과장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키웠다.

“야, 그럼 그거 사실이야? 자기 애인한테 가산점 주려고 몰래 도와주고 점수 조작했다는 거?”

“…네?”

무슨 말이지? 가산점? 점수 조작? 무휼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아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학과장은 답답하다는 듯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학과장의 말이 이어질수록 무휼은 점점 얼굴을 굳히더니, 결국 그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의 뒤로 학과장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휼은 더 빠르게 달음박질할 뿐이었다.

호원은 분명 식음료학과 부스로 갔을 것이다. 그를 찾아내 상황을 알려줘야 했다.

그러나 무휼이 식음료학과 부스에 막 도착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한 무리의 학생들과 대치 중인 호원의 모습이었다.

학생들은 사나운 얼굴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호원의 뒤에는 그를 옹호하려는 것인지 몇몇 학생들이 나란히 서 있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실망이라는 둥 강사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냐는 둥 날카로운 말들이 호원을 향했다. 한쪽에서는 호원을 감싸려 목소리를 높이던 학생이 맹렬한 비난을 받고 울음을 터트렸다.

다른 부스의 타과 학생들은 물론, 지나가던 행인들마저 그들을 흘긋거리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그 소란 속에서 호원은 오히려 제삼자처럼 냉담해 보였다. 아무 감정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이 마치 사람들 사이에 던져놓은 인형 같았다.

그때, 호원에게 삿대질을 하던 학생 하나가 그의 멱살을 잡으려는 게 보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무휼은 그에게 달려들어 학생의 손을 쳐냈다. 덩치 큰 무휼의 난입에 예의 학생은 몸을 비틀거리다 뒤에 있던 학생의 발을 밟았다.

“건드리지 마.”

무휼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로 짓씹었다. 무휼에게 떠밀린 학생은 분노로 시뻘게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당장이라도 무휼에게 몸을 날리려 할 때였다.

“뭐 하는 짓들이야!”

느닷없이 튀어나온 불호령에 양측의 움직임이 멈췄다. 싸움이 났다는 소리에 달려온 교수진들이었다.

교수들은 호원과 학생들을 떼어놓더니 학생들을 모두 부스 안으로 돌려보냈다.

“자네는 잠깐 나 좀 보지.”

가장 나이 지긋해 보이는 교수가 호원에게 말했다. 그때까지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호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휼은 불안한 얼굴로 호원과 교수들을 번갈아 보았다. 대체 왜 호원이 추궁을 받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짜증 어린 눈빛으로 교수진들을 둘러보던 그의 눈에 아는 사람이 들어왔다.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쓴 상태여서 모자 아래 비죽 튀어나온 밝은 갈색의 단발이 아니었다면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무휼이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상대는 고개를 들었다. 역시 박서윤이 맞았다. 그녀는 무휼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울상을 짓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교수들은 호원과 서윤을 데리고 돌아갔다. 무휼은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서서 그 뒷모습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우리도 그런 소문을 믿는 건 아니지만, 제보가 들어와서 말이야.”

나이 지긋한 교수는 그렇게 말하며 흘긋 호원의 눈치를 보았다. 호원은 그 눈초리에 짙게 묻은 의심을 눈치채고 속으로 헛웃음을 뱉었다.

능력 있다느니 학생들이 잘 따르느니 그렇게 칭찬 일색이더니, 이딴 헛소문 하나에 의심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호원은 애써 담담한 얼굴을 지어냈다. 지금 감정적으로 나와봤자 자신만 불리해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보다도 옆에 앉은 서윤이 더 걱정이었다.

그는 흘긋 옆을 돌아보았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서윤은 교수실에 들어온 이후로 단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그저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입술을 잘근거릴 뿐이었다.

“듣자니 자네, 강사로 오기 전부터 박서윤 학생을 알고 있었다며? 카페에서 단둘이 만나는 걸 봤다는 학생들도 있었네.”

“오해입니다.”

호원은 단번에 대답했다. 애초에 그로서는 저 말 말고는 할 말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눈앞의 교수를 만족시키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나도 자네가 결백하다고 믿고 싶네. 그런데 여기저기서 제보가 들어오니까….”

교수는 끝말을 얼버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자기가 속한 과에서 이런 잡음이 나온 게 꽤나 불쾌한 듯했다.

“박서윤 학생과는 이전에 인터뷰 건으로 한 번 만났을 뿐입니다. 제 수업을 듣게 된 것도 우연이고요. 부적절한 관계라는 말은 항변할 것도 없이 거짓입니다.”

호원은 기계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의 옆에서 서윤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물기 어린 눈으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정말 오해예요, 교수님! 저, 전 남자친구도 따로 있고… 과제도 제가 열심히 준비한 거라고요!”

그런데 이런 소문이 돌다니 믿을 수 없다며 서윤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이미 과 내에서 더러운 루머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들은 호원은 안쓰러운 얼굴로 서윤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소문이 돌기 시작했는지, 과 내에서 서윤은 이미 더러운 여자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소문은 하루가 다르게 덩치를 부풀려 친구들도 모두 등을 돌린 상태라고 한다.

“저, 전… 전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제가 선배를 꼬셔서 점수를 잘 받았다니 그런…!”

서윤은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격해지는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교수는 서윤이 흐느끼자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서둘러 물병을 찾아 건넸다.

“서윤 학생은 좀 진정하고… 일단 알겠어요. 두 사람은 결백하다니 이번 일은 단순 루머였던 걸로 생각하겠습니다.”

애초에 과제 점수는 교수들이 모두 개별로 점수를 주고 추후 합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채점표도 모두 과실에서 보관 중이었던 만큼, 호원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호원은 물론, 교수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 교수가 두 사람을 부른 건 단순히 과 내에 도는 소문 때문에 학생들이 소란을 일으켰기 때문일 터였다.

“점수 조작이 없었다는 건 이미 확인했고, 조만간 관련해서 공지문을 내라 할 테니 두 사람 다 너무 심려하지 말도록 해요.”

교수는 서윤과 호원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막상 두 사람이 교수실을 나설 때 호원의 등 뒤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젊은 강사는 이래서….”

문이 닫히는 바람에 뒷말은 듣지 못했지만, 앞부분만 봐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당장 저 문을 도로 열고 안으로 들어가 항변하고 싶었지만, 호원은 그러지 않았다.

그런다고 속이 후련해지는 것도, 상대가 말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미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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