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격돌 (2)
“못 본 사이 꽤 깜찍해졌네, 형.”
여명훈은 키우는 강아지의 애교를 보는 주인 같은 표정으로 호원을 바라보았다.
호원은 주먹을 꽂아 넣고 싶은 그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몸 안은 분노로 들끓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금의 감정도 내보일 수 없었다. 아니, 내보여선 안 됐다.
호원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여명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호원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갈색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거의 6년 만에 다시 만난 거 아닌가? 내기니 뭐니 할 시간에 회포라도….”
“내가 지금 농담하는 거로 보여?”
호원의 말에 여명훈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의 눈이 커다랗게 뜨이더니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진심이야?”
“그래.”
단호한 대답에 놀란 듯 여명훈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이윽고 그 입술 한쪽 끝이 위로 비죽 솟았다.
“그럼 얘기나 들어볼까?”
어디 말해보라며 여명훈이 고개를 까닥였다. 다행히 흥미가 있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한 호원은 새어 나오려는 숨을 입술을 꽉 깨물어 막았다. 주먹을 꾹 쥔 그가 말을 이었다.
“앞으로 한 달 뒤. 네가 날 찾아내면 여명훈 네 승리야.”
“찾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래.”
호원의 뒤를 쫓는 일은 여명훈의 특기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은 호원 역시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 상대에게 숨바꼭질이라니, 명훈은 귀엽다는 듯 쿡쿡 웃더니 물었다.
“찾는 기한은?”
“일주일.”
“형이 그사이 해외로 나가면 어떻게 찾지?”
“국내에 있을 거야. 원한다면 힌트도 줄게.”
여명훈은 호원의 말을 듣고는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여명훈은 눈썹을 꿈틀하더니 팔짱을 척 꼈다.
“너무 추상적인 거 아냐? 우리 사이에 이렇게 번거로울 일이 뭐가 있어.”
여명훈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가 호원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대신.”
호원의 말에 여명훈의 걸음이 그 자리에 뚝 멈췄다. 성가시다는 듯 찌푸린 눈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호원을 마주 보았다.
“그 기간 동안 내 주변 사람들은 건드리지 마.”
“그거였군.”
여명훈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그는 이윽고 긴 숨을 내쉬더니 손을 들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조건은 그게 다야?”
“그래.”
호원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명훈은 ‘주변 사람에게 손대지 말라고….’ 하고 중얼거리더니 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다, 형.”
여명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허리에 척 손을 얹더니 고개를 옆으로 살짝 까딱거렸다.
“나한테만 너무 불리하잖아. 형 주변 사람에게 정보도 얻지 못하게 할 셈이야?”
“그럴 리가.”
호원은 입꼬리를 올렸다. 억지 미소를 짓는 일쯤이야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사실, 호원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앞에 있는 여명훈의 목을 비틀지 않도록 참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호원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가장 고혹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풍성한 속눈썹이 곱게 휘며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너와 나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는 거 싫어서 그래.”
여명훈은 그 말이 진심이라고는 믿지 않는 듯했지만, 호원이 그런 말을 했다는 데에는 만족한 듯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성큼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호원은 그의 손이 자신의 뺨을 감싸자 전신의 피가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감각에 일순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입 안의 살을 씹어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어?”
이렇게 허무맹랑한 내기 따위, 여명훈 입장에서는 굳이 응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호원의 뺨을 엄지로 살살 매만지며 대답을 기다렸다.
“받아들이게 될 거야.”
호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도 단호하게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여명훈은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 가증스러운 표정을 바로 눈앞에 두고, 호원은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이기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게.”
여명훈의 눈이 크게 떠졌다. 호원의 눈에 살짝 벌어진 여명훈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게 고스란히 보였다.
그래, 어차피 넌 이 내기에 응할 수밖에 없어. 호원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 자리에 굳은 채 호원을 가만 내려다보던 여명훈은 이윽고 하, 하는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호원의 뺨을 잡았던 손을 내려 그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천천히 상체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호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두 사람 사이는 이제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호원의 귓가에 여명훈이 달콤하리만치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은 날 다루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아.”
호원의 두 눈을 질끈 감겼다.
***
무휼이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실내와 몸에 남아 있는 마취의 영향 때문인지 시야가 흐릿했다.
머릿속이 안개 낀 것처럼 멍해서 사고는 자꾸만 흐트러졌다. 무휼은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조차 제대로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유일하게 선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깼어?”
차분하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갓 내려 소복하게 쌓인 눈처럼 부드러웠고 겨울 새벽의 안개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왜? 무휼은 그가 왜 그런 목소리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목소리를 내.
입술을 움직여 물어보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그제야 무휼은 자신이 칼에 찔렸었다는 걸 떠올렸다.
이렇게 답답한 일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는데. 무휼은 상처 부위를 가늠해 보려 했다. 그러나 배와 옆구리 전체가 아릿하게 아파오고 있었으므로 어디에 상처가 있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마취가 풀리는 중인지 통증은 꾸준히 강도를 더해갔다. 곧 아파서 끙끙거리겠구나. 무휼은 경험에 기반한 예측을 하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저 사람에게는 아파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데. 그것도 저런, 물에 담갔다 뺀 수건처럼 축축한 목소리를 내는 걸 보니 더 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목마르지?”
예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무휼은 대답을 하기는커녕 고개 한번 끄덕일 힘도 없었지만 그는 용케 알아들은 건지 몸을 일으켜 물병을 집었다.
물병의 뚜껑을 열고 입구를 무휼의 입에 대주려던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도로 손을 물렸다.
그리곤 물병을 제 입에 대고 기울였다.
무휼은 유연하게 젖혀지는 긴 목과 그새 더 마른 듯 날카로워진 턱선을 눈으로 훑었다. 분명 마취 기운이 남아 있을 텐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윽고 그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무휼 쪽으로 몸을 숙이고 베개 양옆에 손을 짚자 낡은 병원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천천히 다가오는 갈색 눈을 무휼은 멍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지척에 다가와서야 그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운 거야…? 무휼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달싹거린 입술은 물기를 머금은 따듯한 입술에 막혀 목소리를 내뱉을 수 없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겹쳐지며 미적지근한 물이 넘어왔다. 목이 마른 건 맞았던 듯, 무휼은 달게 느껴지는 물을 허겁지겁 삼켰다.
넘어오는 물은 딱 목을 축일 수 있는 정도였다.
한참 모자라. 아쉬운 게 물인지 다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채로 무휼은 생각했다. 갈구하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쓸자 그는 오히려 고개를 더 깊게 숙여왔다.
맞붙었다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축축했다. 젖은 살덩어리가 얽혔다 풀릴 때마다 가쁜 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그답지 않게 열성적인 입맞춤에 무휼은 덜 깬 머리로도 조금 놀랐다.
왜 하필 이럴 때 적극적인 거야. 손 하나 제대로 까딱할 수 없는 몸이 야속해 그는 떨어지는 입술을 아프지 않게 살짝 물었다.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그는 잠시 동안 색색거리며 숨을 골랐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 흐드러진 앞머리 사이로 높다란 콧대가 보였다.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은데. 무휼은 아쉬운 마음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무휼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고개를 들어 무휼을 마주 봤다.
“…무휼아.”
물기 어린 채 억눌린 그 목소리는 그 어떤 것보다 외설적으로 들렸다. 무휼은 시야가 일순 흔들린 건 마취 때문이라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
그는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물기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말하기 어려운 얘기인가. 무휼은 잠자코 기다렸지만 입술을 짓씹던 그는 결국 말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저렇게까지 어려워할 이야기가 대체 뭘까. 무휼은 멍한 머리로도 불안감을 느꼈다. 혹시 또 거리를 두려는 건가? 이번 일도 자신 탓이라 생각하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무휼은 자신의 손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움직이려 했던 손은 얌전히 침상에 놓여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무리하지 마. 너 지금 중환자야.”
나직한 목소리에 무휼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무휼은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휼을 가만히 마주 바라보더니 이윽고 입꼬리를 올렸다.
무휼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애매하게 보이는 그 미소를 숨 막히는 기분으로 물끄러미 응시했다.
“있잖아, 무휼아.”
그는 잔뜩 억눌러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물기 어린 눈꼬리와 먹먹한 목소리는 그 말들을 무휼의 가슴속에 하나하나 새겨 넣었다.
“…방금 한 얘기, 잊어버려.”
알겠지? 나직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처연하게 떨렸다.
무휼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번에는 마취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이 그의 의식을 자꾸만 발아래로 끌어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자.”
그는 손을 내밀어 무휼의 눈을 감겨주었다. 그 특유의 서늘한 체온과 건조한 손끝이 피부에 닿자 둑이 무너지듯 수마가 덮쳐왔다.
안 되는데. 어째서인지 이대로 잠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휼은 눈을 부릅뜨려 했지만 저항하기엔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고 코끝에 닿아오는 체향은 딱 기분 좋게 달콤했다.
푹 익은 과실 같기도 하고, 너무 독해서 오히려 다디달아지는 술 같기도 한 달콤한 향기.
그 향을 깊이 들이마시자 무휼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잘 자, 무휼아.”
그 목소리를 끝으로 무휼의 의식은 온전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