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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89)화 (89/101)

제89화. 진척

“어이고, 또 산엘 다녀온겨?”

징허다, 징해. 할머니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야트막한 돌담이 집 주변에 둘러쳐져 있어서 돌담집 할머니로 불리는 그녀는 이제 막 대문을 들어서는 호원을 보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젊은 사람이 매일 그렇게 산을 다녀싸.”

“그냥 운동하는 거죠, 뭐.”

호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돌담집 할머니가 말하는 산은 섬 정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산처럼 우뚝 솟아서 정상의 호수까지 다녀오려면 호원의 걸음으로도 4시간은 족히 걸렸다.

호원은 그 산을 매일 적어도 한 번씩은 오르내리고 있었다. 매번 다른 길을 찾아다니는 그의 모습에 섬사람들은 어지간히도 산을 좋아하나 보다 하고 있었다.

“저어기 툇마루에 밑반찬이랑 무 싸놨어. 아주 일을 야무지게 잘해놨길래 내 특별히 고기반찬 좀 했지.”

“와, 정말요?”

호원은 활짝 웃으며 툇마루로 향했다. 그곳에는 곱게 보자기에 싼 반찬통과 통통한 무가 가득 쌓인 커다란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할머니 저 이거 혼자 다 못 먹는데….”

호원은 입이 떡 벌어지는 양에 난처해하며 말했다. 그러자 돌담집 할머니는 눈을 치켜뜨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 젊은 청년이 그 정도도 못 먹어서 어째! 그러니 그렇게 삐쩍 마른 거 아녀!”

이, 이 팔 좀 봐봐라. 이게 부지깽이지 사람 팔이냐.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호원의 팔을 검지로 콕콕 찔렀다.

어디 가서 말랐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던 호원은 퍽 억울했지만, 이내 하나같이 푸짐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이 섬 사람들의 풍채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비록 ‘마른 게 아니라 날씬한 거예요.’라며 툴툴거리긴 했지만 결국 그는 반찬통과 무 광주리를 그대로 들고 집으로 가야만 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마당을 나서려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할머니.”

“또 왜. 못 먹겠다고 징징거리려는 거면 혼꾸멍날 줄 알어.”

“저건 버리시는 거예요?”

호원은 돌담길 할머니의 으름장을 자연스럽게 흘려 넘기며 물었다. 호원의 물음에 할머니는 고개를 돌려서 돌담 아래쪽에 반듯하게 쌓여 있는 커다란 돌들을 쳐다보았다.

“아아, 저거? 저건 누름돌인디. 이번 태풍 때 장독 몇 개가 깨져서 쓸 일이 없긴 하지.”

“그럼 제가 가져가도 돼요?”

“저걸?”

돌담집 할머니는 의아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윽고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 보수라도 하려나 보다 싶은 모양이었다.

“그려. 가져가면 나야 좋지.”

“감사합니다!”

그럼 이거 내려놓고 다시 올게요! 호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양손에 들린 반찬과 광주리를 들어 보였다.

예쁘게 웃는 얼굴에 돌담집 할머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지만,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누름돌을 가지러 왔던 호원은 찐 고구마를 또 한 광주리 가득 들고 나와야 했다.

***

무휼은 쌍욕을 내뱉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애초에 욕을 한다 해도 그 대상이 없으니 하나 마나일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는 난간에 팔을 걸친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새 날씨는 더 추워져서 내뱉은 숨은 옅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그는 안개처럼 흩어지는 입김 너머로 보이는 새파란 바다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제 눈동자 색과 같은 바닷물이 넘실거리며 방파제에 철썩철썩 부딪혔다.

파도는 방파제에 부딪힐 때마다 새하얀 물방울을 튀겼다. 부서지는 물방울들을 가만 쳐다보던 무휼은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여기서 멈춰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러나 무휼은 겸허히 인정해야만 했다. 그는 섬을 너무 얕봤다. 설마 섬으로 들어가는 배편이 없을 줄이야.

서울에서 나고 자란 무휼은 섬으로 가는 배가 하루에 딱 한 척뿐이라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그것도 삼월도로 바로 들어가는 배도 아니고, 중간 섬인 사벌섬으로 들어가는 배였다.

듣기로는 삼월도로 가려면 사벌섬에서 배편을 갈아타야 한다는 듯했다.

심지어 그 배도 차를 운반할 만큼 큰 배는 아니라서 차를 두고 맨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설명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여객선이라기보다는 통통배라 부르는 게 맞을 정도의 규모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하루 딱 한 척이라니. 무휼은 절망적인 심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8시간이 넘게 쉬지 않고 운전했더니 옆구리 근육도 당기고 아팠다. 상처가 벌어지진 않은 것 같지만 이대로 계속 무리했다간 병원 신세를 지게 될 수도 있었다.

기껏 호원을 찾자마자 쓰러지면 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무휼은 잠이 부족해 자꾸만 흐려지려는 눈을 비볐다.

다음 배편은 내일 오전 9시에 있다는 모양이었다. 아니, 하루에 한 척 있는 게 시간마저 그렇게 어정쩡하다니. 그나마 오전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무휼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들었다.

새파란 바다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게 광활했다. 눈이 시원한 풍경이라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멍하니 생각했다가 스스로의 태평함에 조소가 새어 나왔다.

처음에는 항구 근처에서 삼삼오오 모여 휴식 중인 선주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고 삼월도로 가달라고도 했었다.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발 배를 띄워 달라는 말에 그들은 날카로운 눈으로 무휼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붙잡힌 팔을 탁 떨쳐내고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무휼은 선주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삼월도는 어종이 풍부한 풍요로운 섬이었지만 주변 해류를 읽기가 쉽지 않은 곳이었다.

베테랑 선장들도 이따금 길을 잘못 들어 표류할 뻔하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배가 전복되어 죽기도 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삼월도로 직행하지 못하고 중간 섬인 사벌섬을 들르는 것이라고 한다. 사벌섬에는 삼월도 토박이들이 몇몇 있어서, 삼월도로 들어가는 배는 그들이 길 안내를 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여기서는 사벌섬을 경유해서 가는 게 최선이라는 말이었다.

사실상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데 가까웠지만 무휼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 바다 너머에 호원이 있는데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순 없었다.

“어이, 거기 총각.”

그때, 바로 뒤에서 껄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휼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다부진 덩치의 사람이 서 있었다. 수산시장에서 많이 볼 법한 가슴장화에 두꺼운 겉옷을 입고 있는 데다, 챙이 넓은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어서 성별을 구별할 수 없었다.

“삼월도 간다며?”

걸걸한 목소리가 물었다. 무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는 상대의 성별이고 뭐고 당장 눈앞의 사람이 꼭 그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 천사처럼 느껴졌다.

“네!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는 대뜸 대답부터 했다. 다행히 상대는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휙 등을 돌렸다. 그러더니 흘긋 무휼을 돌아보며 고갯짓을 까딱했다.

“그럼 따라와.”

영 수상쩍은 태도에 무휼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상대의 뒤를 따랐다.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상대는 선착장을 쭉 가로질러 걷더니 이윽고 한 허름한 집 앞에서 멈췄다.

천장이 낮아 집 자체가 주저앉은 것처럼 보이는, 파란색 양철지붕 집이었다. 대문 옆에는 손 글씨로 적은 ‘민박. 방 있읍니다.’라는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영 허름해 보이는 집이었지만 무휼은 주저 없이 발길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서니 예의 상대는 마당 한쪽의 수돗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잔뜩 수그린 등을 보니 무휼은 어쩌면 상대의 나이가 꽤 지긋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삼월도 간다니까 다들 상대도 안 해주지?”

상대는 가슴장화에 튄 물을 손으로 툭툭 털며 일어섰다. 웃음기가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얼핏 이 상황을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하지. 거기가 끝내주는 황금 어장이거든. 선장들이 거기서 한몫 단단히 챙기려다 황천길 가는 일이 워낙 많았어야지.”

별명이 황천섬이라니까? 상대는 그렇게 덧붙이며 껄껄 웃었다.

저게 웃으며 할 말인가. 무휼은 잠시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어 그 생각을 떨쳐냈다. 성격이야 어떻든 상대는 삼월도로 가는 방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괜히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그런 데를 가겠단 청년이 있다길래 내 궁금해서 한번 불러봤지.”

“예?”

무휼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럼 단순한 호기심이었단 말인가. 괜히 헛걸음했다는 생각에 그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어어, 너무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마. 나라고 청년을 그냥 데려온 건 아니니까.”

일단 좀 앉지? 상대는 그렇게 말하며 마루 쪽을 가리켰다.

무휼은 영 꺼림칙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등을 돌려 나가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따라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루 쪽으로 가 앉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상황에서 상대의 말이 마음에 걸린 이유도 있었지만, 아까부터 찌르듯이 아파오는 옆구리의 상처를 더 방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휼이 마루에 걸터앉자 상대는 팔을 척척 걷어붙이더니 잠시 기다리라며 집 안쪽으로 사라졌다.

혹시 이거 사기는 아닐까. 어리바리한 관광객을 등쳐먹는 일이야 비일비재하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생각은 아니었다.

무휼은 상대가 이 지역 특산품이니 바가지를 씌운 숙박료 따위를 내밀면 당장 나갈 셈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상대가 들고 온 것은 물이었다. 그것도 낡은 컵에 대충 떠서 내온 찬물.

“대접할 게 딱히 없네. 이 집에 고상하게 차 마시는 사람이 있어야지.”

상대는 껄껄 웃더니 무휼 앞에 물잔을 턱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옆에 털썩 주저앉아 한쪽 팔을 무릎에 걸치고 껄렁하게 무휼을 바라봤다.

“그래, 삼월도는 왜 그리 급하게 들어가려고? 배 뜰 때까지 느긋하게 묵으면 되잖나.”

“개인적인… 일입니다.”

무휼은 그렇게 말했지만 상대는 전혀 납득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수상쩍다는 듯 가늘어지는 눈을 본 무휼은 한숨을 내쉬고는 털어놓았다.

“소중한 사람이 그 섬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 말에 상대는 과하게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호오- 하며 감탄사를 내뱉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사랑이구만, 사랑이야!”

그러고는 좋을 때라며 껄껄 웃더니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좋아! 그럼 이 몸이 힘 좀 써주지!!”

무슨 소린가 싶어 무휼은 눈썹을 구겼다. 역시 사기였던 건가. 지금이라도 나가야 할까? 무휼이 대문 쪽을 흘긋거리는데, 상대가 모자를 휙 벗으며 말했다.

무휼은 햇빛 아래 드러난 얼굴이 혜영 나이대의 여성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 얼굴에 커다랗게 그어진 흉터에 놀라 말을 잃었다.

왼쪽 뺨부터 콧등을 지나 오른쪽 눈썹 위까지 이어지는 커다란 흉터였다. 대체 얼마나 험난한 삶을 살아온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얼굴로, 그녀는 씩 웃었다.

“나랑 우리 남편이 그 섬 출신이거든. 뱃길을 모를 수가 없지!”

자, 당장 준비해!! 애인 찾아야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걸걸한 목소리로 통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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