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어떤 직감
바닥에 누운 무휼은 가로등 불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창틀 부분이 희끄무레한 것이, 달이 떠 있는 모양이었다.
도심지와는 달리 섬의 밤은 빠르고 조용하고, 어둡다. 땅거미가 진 마당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보기 어려워, 발걸음 한 번 내디디는 것이 위험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호원은 굳이 심 씨 할아버지 댁에 가겠다며 방문을 넘으려 했다.
무휼이 그를 붙잡고 놔주질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뒀더라면 손전등을 들고 가는 한이 있더라도 대문을 나섰을 터였다.
‘절대 안 건드려. 손만 잡고… 아니, 손도 안 잡을게요. 맹세해.’
무휼이 한쪽 손을 들고 맹세까지 하고 나서야 호원은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벽장 문을 열었다. 그가 벽장 안에서 꺼낸 것은 푹신한 겨울 이불과 시트였다.
넌 여기서 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거실에 무휼을 남겨두고 옆방으로 사라졌다. 잠시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옆방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휼은 치사하게 군다며 잠시 입술을 비죽였다.
푹신한 요가 깔린 바닥에 드러누워 천장을 보고 있자니 방 안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저 멀리서 풀벌레인지 개구리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옆방에서 호원이 뒤척이는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의식하고 있는 건 자신만이 아니다. 그 사실에 무휼은 각방을 쓰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아졌다.
무휼은 흐뭇한 기분으로 왼팔을 올리다가 윽! 하는 신음을 냈다. 무심코 팔을 베려다 왼쪽 옆구리 쪽에서 찌르르하게 통증이 올라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바로 옆방에서 부스럭부스럭 들리던 이불 소리가 멎었다. 호원이 이쪽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무휼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으면 웃음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경련하는 배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옆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드디어 호원이 잠든 모양이었다.
무휼은 슬쩍 문이라도 밀어볼까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호원이 잠든 방은 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잠금장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요령껏 밀고 당기다 보면 금방 걸쇠가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무휼은 문손잡이에 손을 대는 대신 문 바로 옆에 주저앉아 등을 기댔다. 이 얇은 벽 너머에 호원이 잠들어 있다는 것에 그는 먹먹한 안도감을 느꼈다.
무휼은 무릎을 세워 팔을 얹었다. 머릿속에서는 이곳에 오기 전, 진혁과 했던 대화가 맴돌고 있었다.
***
“호원이 형이 가게 처음 열었을 때 아르바이트했던 남자애가 있었어. 이름이… 서진인가 그랬었지.”
진혁은 한숨을 삼키는 듯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서진인지 여서진인지 아무튼 그런 이름이었어. 이름에 어울리는 마르고 왜소한 체구의 어린애였다고 진혁은 말을 덧붙였다.
호원의 가게에서 꽤 오래 일하기도 했고, 호원과 워낙 사이가 좋아 보여서 기억한다는 모양이었다.
“근데 어느 날 갑자기 그만뒀다 하더라고.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혁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바닥 어딘가를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흘긋 무휼을 향했다가 도로 허공으로 흩어졌다. 명백하게 무휼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 호원이 형 다리에 흉터 있는 거 알고 있냐?”
무휼이 답답해할 정도의 침묵이 흐른 뒤, 진혁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무휼은 그의 말에 어느 새벽을 떠올렸다. 늦여름이라고 해도 유난히 살갗에 들러붙는 공기가 서늘했던 날이었다.
새벽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슬랙스에 셔츠 차림으로 덜덜 떨며 서 있던 그를 발견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 호원은 무휼에게 진심을 고백했고, 그 너무도 달콤한 말에 홀려 직전의 말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아리도록 쓴 미소를 지은 호원의 얼굴과 함께 무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여기 있는 상처와 비슷한 게 내게도 있어.’
그렇게 말하며 그가 가리킨 것은 무휼의 왼쪽 옆구리. 그러니까 김진수가 찌른 흉터가 있는 쪽이었다.
…다리였구나. 무휼은 그때야 깨달았다.
눈에 띄는 곳에 없으니 옷 아래 어딘가에 있겠거니 생각했었는데. 그러고 보면 호원은 집 안에서도 항상 긴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만, 근데 그걸 김진혁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순간 무휼의 눈이 날카롭게 진혁을 쏘아보았다. 진혁은 금방 상황을 파악했고, 질렸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알겠는데, 내가 그 흉터를 알고 있는 건 형이 입원했을 때 내가 도와줬기 때문이야.”
진혁의 해명에 무휼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진혁은 혀를 쯧쯧 차고는 이어 말했다.
“그때 당시에는 형이 사고라고만 하고 입을 꾹 다물어서 더 캐묻지 않았어. 근데 돌아가는 상황이 묘한 게… 아무래도 그 서진인지 뭔지랑 관계가 있는 모양이더라.”
어쩐지 호원의 상태가 이상했다며 진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구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때 당시의 호원은 과도할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한다.
멍하니 창문 쪽을 쳐다보다가도 문가에서 인기척이 있으면 화들짝 놀라기도 하고, 옆에 사람이 없으면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도 했다는 듯했다.
“그런데도 막상 얼굴 보면 괜찮다고 웃어 보이니까 더 불안했지.”
진혁은 무휼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결국 품에서 담배를 꺼냈다. 그때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답답한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졌어.”
이번처럼. 진혁은 그렇게 덧붙이며 담배 필터를 입에 가져갔다. 담배 끝이 새빨갛게 물드는가 싶더니 그가 한숨처럼 연기를 내뱉었다.
“보름 정도였나. 홀연히 사라졌던 것처럼 갑자기 돌아와서는 다 해결되었다고 하더군.”
뭐가, 어떻게 해결됐다는 건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의 진혁은 그저 조금 지친 듯 보이는 호원을 끌어안아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내가 물어봤다 해도 아마… 아무 대답도 못 들었을 거야.”
하지만 너라면. 그가 말을 끊고 무휼을 돌아봤다. 진혁의 담배 끝이 다시 한번 붉게 타올랐다.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
여서진. 무휼은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중얼거려 보았다.
어떤 인물인지, 무슨 짓을 했던 건지 몰라도 그 인물이 아직 호원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럼 호원은 그 인물을 피해 이 먼 섬까지 온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왜 주변 사람에게는 말도 하지 않고….
거기까지 생각하던 무휼은 문득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인상을 구겼다.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쭈뼛 돋았다.
‘갑자기 돌아와서는 다 해결되었다고 하더군.’
진혁의 말이 뇌리를 맴돌았다. 다 해결되었다. 호원은 그렇게 말했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다시금 호원의 앞에 나타났다.
그럼 호원은….
무휼은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불길한 기운을 품고 가라앉았다.
“…무휼아.”
그때였다. 불현듯 들려온 목소리에 무휼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리고 체온이 확 올라갔다. 그러나 뜨거운 몸에 비해 머리는 차갑게 굳어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안 잤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목소리는 살짝 갈라져 있었다. 건너편에서도 당황한 기색을 느꼈는지 호원이 낮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휼은 머쓱하게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왜 아직 안 자요.”
“그러는 너야말로 왜 안 자.”
막상 그렇게 반문하니 할 말이 없었다. 얇은 벽 너머에서 호원이 몸을 일으키는지 이불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희미하게 방 안을 밝히는 희끄무레한 달빛만이 늦은 시간임을 짐작게 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무휼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벽 너머에 귀를 기울였다.
“…잠깐 나갈까?”
호원이 나직하게 말을 건네왔다. 거절하기에는 옅은 웃음기를 담은 그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문 너머의 호원에게는 보이지 않을 텐데도 무휼은 습관적으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호원도 그런 무휼이 익숙한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겉옷을 든 채로 무휼의 방문을 열었다.
“밖은 추우니까 잘 껴입어.”
그러고는 안에 받쳐 입을 만한 얇은 겉옷을 내밀었다. 추운 날 섬에 오면서 코트 바람인 무휼이 걱정스러운 듯했다.
무휼이 겉옷을 받아 들자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무휼은 조금 두꺼워 보이는 점퍼를 걸쳤을 뿐 저보다도 추워 보이는 호원의 등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자기나 잘 껴입지.”
투덜거리며 가져온 짐을 뒤지다 밖으로 나갔을 때, 호원은 이미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도 없는 동네였지만 달빛이 환한 덕분에 사물을 분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갈까?”
“잠깐만.”
무휼은 앞장서려는 호원을 붙잡아 세웠다. 그러고는 들고나온 목도리를 그의 가느다란 목에 돌돌 감아버렸다.
호원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포근한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다.
“너 냄새 난다.”
속닥거리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귀가 간질간질했다. 무휼은 목도리를 잘 여며주고는 슬그머니 호원의 손을 잡아 쥐었다.
“어딜 가려고요.”
목적지를 묻는 말에 호원은 잠자코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해주질 않았다. 그저 따라오라는 듯 잡은 손을 슬며시 이끌었다.
“턱이 있어. 조심해.”
대문을 넘을 때 호원이 당부했다. 무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 대문을 넘었다.
놀랍게도,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호원은 말없이 좁고 가파른 시골길을 오르기 시작했고, 무휼은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달빛 외의 광원이 없기 때문일까. 하얀 모래가 깔린 좁다란 길은 은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바다가 지척에 있어서인지 코끝에는 바닷바람 특유의 짜고 비린 냄새가 맴돌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앞서가는 호원의 머리카락이 살짝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그 머리카락이 부드러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무휼은 몇 번이고 허공에 손을 들었다 내려야 했다.
당장에라도 잡은 손을 당겨 호원을 돌려세우고 싶었다. 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고 그대로 깊게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짓을 했다간 호원이 또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무휼은 스스로의 생각에 조소했지만 허공에 뜬 손은 좀처럼 호원에게 닿지 못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입김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호원이 걸음을 멈추고 무휼을 돌아보았다.
“도착했어.”
무휼은 웃음기를 담아 휘어진 그 갈색 눈을 바라보다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휼의 새파란 눈 안에 별빛이 가득 담겼다.
두 사람의 눈앞에 작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