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반항
“…둘이 싸운겨?”
새벽부터 호원의 집에 들른 심 씨 할아버지가 시큰둥한 얼굴로 물었다. 심란한 얼굴로 마루에 앉아 있는 호원의 얼굴을 보자마자 한 말이었다.
호원은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한마디에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심 씨 할아버지는 호원 옆에 털썩 앉으며 옆구리에 끼고 온 플라스틱 바구니를 턱 내려놓았다.
“에잉, 모처럼 젊은이들 왔다고 선물 가져왔더니만….”
심 씨 할아버지가 쌈박질이나 할 줄 알았으면 안 가져왔을 거라며 슬쩍 눈을 흘겼다.
파란색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는 갓 딴 듯한 석화가 가득 들어 있었다. 약국을 가려 해도 배를 타고 나가야 하는 이런 곳에서 마트 같은 게 있을 리 없으니, 아마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 딴 것일 터였다.
괜히 미안해져 호원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얼굴에 떡하니 쓰여 있구먼.”
심 씨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며 바구니를 호원 쪽으로 툭 밀었다. 석화 껍데기가 저들끼리 부딪쳐 덜그럭거렸다.
“그냥 먹으면 제일 맛있지만 쪄 먹어도 맛이 그만이여. 둘이 안주로 술이라도 한잔하든지.”
“…쟤는 오늘 다시 나갈 거예요.”
호원이 마루로 떨어지는 석회질 가루를 괜히 검지로 둥글리며 말했다. 덤덤하게 말한다고 한 건데 자기도 모르게 시무룩한 목소리나 새어 나왔다.
심 씨 할아버지는 그 말에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쟈 생각은 다른가 본데?”
네? 호원이 반문하며 고개를 들었다. 심 씨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가니 반쯤 열린 문 안에서 우뚝 서 있는 무휼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 일어난 건지, 아니면 아예 잠을 못 잔 건지 얼굴이 수척해 보였다. 흐릿하게 탁한 파란 눈에는 아직도 물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다.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어젯밤 무휼의 얼굴이 뇌리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달려 들어가 눈가를 닦아주고 싶어질 것처럼 처량한 얼굴이었다.
호원은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단호하게 다시 말했다.
“오늘 나갈 거예요.”
등을 돌리고 있느라 호원은 자신의 말에 무휼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심 씨 할아버지가 둘은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려그려. 싸우는 것도 지금 해야지. 나중 되면 쌈박질도 못 혀.”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호원이 한숨 대신 말을 뱉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무휼을 돌려보낼 셈이었다.
‘형은 날 다루는 방법을 너무 잘 알아.’
저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것 같은 스산하고 진득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거렸다.
약속한 한 달의 시간은 이제 오늘 하루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여명훈이라면 이미 지척까지 와 있을 터였다.
쉬운 게임은 질색하는 그놈 성격상 날짜가 바뀌자마자 당장 찾아오진 않을 테지만, 무휼이 이곳에 있다가 휘말리는 것만큼은 사절이었다.
호원은 심 씨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지금은 무휼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머니 오셨다면서요. 그 배 타고 왔다고 하던데.”
“그랬지. 우리 개딸 말로는 저놈 사정이 딱해서 태워줬다는디….”
근데 어쩌나. 심 씨 할아버지는 머쓱한 얼굴로 백발이 성성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호원은 불길한 예감을 애써 내리누르며 미간을 살짝 구겼다.
아니나 다를까, 호원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은 못 나가. 배가 없어야.”
“네?”
심 씨 할아버지는 새된 소리를 뱉는 호원의 기세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냥 얌전하기만 했던 호원이 돌연 큰 소리를 낼 거란 생각조차 못 한 얼굴이었다.
“그, 그게… 개딸이 어제 과음을 쪼까….”
그래서 오늘 배는커녕 변기통 붙잡고 있을 지경이지 뭐냐. 심 씨 할아버지는 흘긋흘긋 호원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왜 호원의 눈치를 보나 싶었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호원의 안색을 보니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그 저기야, 급한 거면 내일 배 띄울 수 있을 것 같긴 헌디….”
“내일이요….”
호원이 말을 끝맺으며 까득 이를 갈았다. 내일. 내일이면 어떻게든 시선을 돌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새 여명훈이 이 섬에 들어온다면….
호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약 이 섬에서 여명훈과 무휼이 마주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안 나가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 망할 개는 호원의 마음 따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듯 담담하게 말해버렸다.
호원은 눈을 세모꼴로 부릅떴지만 무휼은 날카로운 시선을 물끄러미 마주 보며 말했다.
“이 사람이랑 같이 나갈 거예요. 그때까진 혼자 안 나갑니다.”
“난 그렇게 하겠다고 한 적-”
“상관없어.”
무휼이 호원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그런 주제에 호원의 얼굴이 구겨지자 아차 싶었는지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뭐라고 하든지 들을 생각 없어요. 정 그렇게 내보내고 싶으면 힘으로 하든지.”
“못 할 것 같아?”
“해보라고요. 할 수 있으면.”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허공에서 부딪혔다. 호원은 치켜뜬 눈으로 무휼을 쏘아보았고, 무휼은 지지 않겠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
“이 집에서 내보내면 당장 묵을 곳도 없는 주제에.”
“근처에 비닐하우스 많던데요. 거기서 비닐 돌돌 말고 자면 죽진 않겠죠.”
“섬사람들한테 괴한이 돌아다닌다고 잡아서 내보내라 할 거야.”
“그 섬사람 중 한 분이 옆에서 듣고 계시는데요.”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았다. 호원은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나가. 당장.”
그답지 않게 날카로운 어조에 무휼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시 부동자세로 서 있던 그는 이윽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집에 있는 게 싫으면 나갈게요. 대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요. 어디 다른 곳 가지도 말고요.”
그러고는 들고 온 가방 하나를 달랑 들어 어깨에 멨다. 정말로 당장 집을 나갈 기세였다.
말을 뱉어놓고도 호원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딱 보기에도 밖에서 잤다간 얼어 죽기 십상인 코트 바람으로 무휼이 문지방을 넘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손이 반쯤 올라가기도 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오믄 되긋네.”
갑자기 들려온 느긋한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팽팽한 신경전을 재밌다는 얼굴로 구경하던 심 씨 할아버지가 싱글싱글 웃으며 끼어들었다.
“호원 총각은 저 친구가 여 있는 게 싫고. 저 친구는 이 섬을 나갈 생각이 없는 거 아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 총각, 저 꼴로 비닐하우스에서 잤다간 내일 송장 치워야 돼. 알고 있지?”
만류하려던 호원이 이어진 심 씨 할아버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무휼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심 씨 할아버지를 보다가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아뇨, 그럴 수는….”
“듣자니 자네, 환자라며? 그럼 더더욱 안 되지. 자, 가자고.”
심 씨 할아버지는 숫제 무휼의 등을 떠밀기까지 했다. 그러고는 대문을 나서기 직전, 호원을 흘긋 돌아보았다.
“잘 먹이고 재울 테니 걱정 말어.”
나직하게 말을 뱉은 심 씨 할아버지는 그대로 무휼의 등을 밀며 대문을 나섰다. 마당 한가운데에 멍하니 서 있던 호원은 그제야 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심 씨 할아버지도 젊고 잘생긴 술친구가 생겨 기뻐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차라리 여기보다는 다른 집에 있는 게 그나마 안전하겠지. 심 씨 할아버지에겐 큰 신세를 지게 됐지만, 호원은 내심 심 씨 할아버지가 먼저 제안해 준 것이 기뻤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은 다르네….”
호원은 힘없이 중얼거리며 대들보에 머리를 툭 기댔다.
심 씨 할아버지는 눈치챈 것이다. 무휼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 하는 그의 본심을.
호원은 발치의 돌멩이를 톡 걷어찼다. 자그마한 돌덩이가 데구르르 굴러 저 멀리로 멀어졌다.
무휼이 처음 이 마당에 들어섰을 때, 호원은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주먹을 꾹 쥐고, 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무휼에게 달려가 그 큰 몸을 끌어안고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무휼은 어디까지 알고 이곳에 온 것일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함께 돌아간다’는 말을 내뱉은 것일까.
호원은 허벅지에 올린 두 손을 힘주어 마주 잡았다.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무휼의 생각이 어떻든 이젠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저, 마무리를 지으면 그뿐이다. 호원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새하얀 손등에 손톱자국이 남았지만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
무휼이 돌아온 것은 대문을 나선 지 정확히 삼십 분 만의 일이었다.
마루에 앉아 케이블타이를 만지작거리던 호원은 아무렇지 않게 대문을 넘는 그를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너 뭐야?”
“아침 먹어요. 어차피 아무것도 안 먹었을 거잖아.”
무휼은 그 말만 툭 내뱉고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마루 위에 툭 올려놓았다.
“섬 아래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더라고요. 일단 달걀이랑 즉석밥 몇 개 사왔으니까 뭐라도 해볼게요.”
“내 말 안 들려? 나가라고 했잖아.”
호원이 날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저 녀석은 지금 자신이 어딜 들어와 있는지 자각은 있는 건가? 호원은 괜히 초조해져 대문을 흘긋거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문으로 여명훈이 들어올지 모르는데. 그럼 무휼은….
“들려요.”
그러나 무휼은 그렇게 툭 내뱉고는 제집인 양 부엌문을 넘었다. 냄비에 물을 담고 불 위에 올리는 모습에 호원은 헛웃음을 뱉었다.
“여기 치안 꽤 허술하던데요. 대문이 그냥 휙휙 열리잖아요. 아, 그렇다고 판자 같은 거 덧대놓을 생각 하지 마요. 담벼락도 낮아서 나 정도 키면 쉽게 넘을 수 있으니까.”
무휼은 담담하게 말하며 끓는 물에 즉석밥을 하나 뜯어 넣었다. 플라스틱 통에 붙은 밥알 하나까지 싹싹 긁어 넣고는 그 그릇에 달걀을 깨 풀었다.
“미쳤어? 당장 안 나가?”
호원이 냉장고 문을 열어 파를 꺼내는 무휼의 손목을 붙들었다. 다음 순간, 호원은 등에 둔중한 충격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 대파가 바닥을 굴렀다. 호원은 그제야 자신이 벽에 밀어붙여졌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무휼과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과 다른 점은 무휼이 호원을 마주 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푸른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씹어 먹을 것처럼 사나운 기세에 호원은 꼼짝할 수도 없었다.
무휼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건조하게 마른 입술은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감정을 삭이는 건지 긴장한 어깨 근육이 크게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윽고 무휼이 붉게 물든 입술을 열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든 나 혼자는 안 나가. 멱살을 잡고 끌어내는 한이 있어도 같이 나갈 거니까 고집 좀 그만 부려요.”
계속 그러면 진짜 멱살 잡고 끌고 갈 테니까. 커다란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내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