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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를 길들이는 법 (97)화 (97/101)

제97화. 덫 (1)

집으로 돌아온 호원은 빠르게 짐을 챙기고 있었다. 산악 등반용의 큰 배낭에 로프와 케이블타이를 한 움큼 넣고, 섬에 올 때 가져왔던 스포츠 배낭을 뒤져 약 봉투를 꺼냈다.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섬에 오기 전 여러 인맥을 거쳐 얻어낸 주사기와 자그마한 약병을 내려다보며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휼이 이걸 발견하지 못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서랍 안의 서바이벌 나이프도 그대로 있는 걸 보니 호원이 없는 사이 방을 뒤지거나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500ml짜리 생수병을 냉장고에 넣어둔 그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오후 3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임에도 추운 날씨에 입김이 나왔다.

무휼은 괜찮을까. 이 정도 추위면 아무리 컨테이너 안에 있더라도 꽤 추울 텐데. 그 안에 뭔가 덮을 만한 게 있던가. 혹시 모르니 섬사람들에게 조금 빨리 언질을 줘야 할까.

등산 배낭을 옆에 두고 신발을 꿰어 신으려던 때였다. 그의 귓가를 섬뜩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원이 형.”

신발 끈을 당겨 매던 호원의 손이 뚝 멈췄다.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았다. 등줄기를 타고 내달리는 오싹한 느낌에 호원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펴는 것과 동시에 커다란 덩치가 달려들었다.

“윽…!”

갑작스러운 힘에 몸이 뒤로 젖혀진 호원이 문지방에 머리를 박고 신음했다. 둔탁한 충격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고통에 경직된 몸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마루 위에 드러누운 호원 위로 무게를 실은 상대가 그의 양손을 붙잡아 바닥에 내리눌렀다.

“너….”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일찍 와봤어.”

놀랐지?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기까지 했다. 호원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상대의 어깨를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히 붙들린 팔은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다.

호원은 뒤통수의 고통이 가시지 않아 흐릿한 시야를 다잡으려 눈을 깜박거렸다.

눈꺼풀이 닫혔다 열릴 때마다 진하게 웃고 있는 상대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졌다. 마치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여명훈.”

호원은 씹어 뱉듯 그 이름을 불렀다. 명훈은 기껍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퍼를 채우지 않아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차가운 숨이 닿아 서늘했다.

“드디어 잡았다.”

팔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통에 호원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명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루 위로 다리를 올렸다. 완전히 호원 위에 올라탄 그가 씩 웃으며 호원을 내려다보았다.

“우리 너무 낭만적이지 않아? 이렇게 이어지는 연인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명훈의 얼굴은 조금의 거짓도 없이 해맑았다. 설렘과 기쁨, 행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호원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지거리를 겨우 씹어 삼켰다.

“형이 나빴어. 내가 병원에 들어가 있는 사이 다른 놈이랑 바람이나 피우고.”

나 속상해. 명훈은 정말 상처받았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해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얼굴과는 달리 슬금슬금 호원의 다리 사이로 무릎을 밀어 넣는 행동이 농염했다.

“잠깐만, 일단 좀 비켜봐.”

“싫어.”

명훈이 짧게 대답하고 호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부드럽고 축축한 입술의 감촉이 목 줄기를 따라 내려가 쇄골에 닿자 호원의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며, 명훈아.”

호원이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굳어 있던 머리가 이제야 제대로 작동하는 듯했다. 그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밖이 아직 밝잖아. 우리 산책이라도 다녀오지 않을래? 내가 섬 구경시켜 줄게.”

모처럼 이런 경치 좋은 곳에 왔는데 아깝잖아. 덧붙이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호원이 눈꼬리를 휘었다.

다행히 긴장한 상황에서도 말은 매끄럽게 튀어나왔다. 오랜 바텐더 경력이 이런 데에도 도움이 되는구나 싶어 호원은 상황에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실소해 버렸다.

“흐음-”

명훈은 길게 목소리를 끌며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그 버릇이 호원 본인과 꼭 닮아 있어 호원은 순간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나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는데.”

명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방금 전의 천진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갈라지는 목소리에 호원은 다시금 마른침을 삼켰다.

명훈이 무릎으로 호원의 다리를 벌리며 몸을 더 밀착했다. 예민한 곳을 지그시 누르는 압박에 호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명훈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장 안에 들어가고 싶어.”

명훈의 손이 호원의 옷자락을 들치고 맨살을 쓸어내렸다. 찬바람에 식은 손이 뜨거운 살결을 자극하자 호원의 허리가 파드득 튀었다.

호원은 명훈이 손을 놓은 틈을 타 얼른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갑작스럽게 방해받은 명훈이 인상을 구겼다.

아차. 호원은 이를 악물었다가 얼른 미소를 띠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농염하게 휜 눈꼬리가 유혹적이었다.

“앞으로는 참을 필요 없잖아. 난 계속 네 것일 텐데.”

그 말에 명훈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퍽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에 대고 호원은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다정한 목소리를 뽑아냈다.

“그러니까 밤에… 밤에 마저 하자.”

응? 호원은 나직하게 속닥거리며 어깨를 밀어내던 손을 올려 명훈의 뺨을 감쌌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한 행동이었지만 입 안이 바짝 말라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만 같았다.

“형은 정말….”

명훈은 자신의 뺨을 감싼 호원의 손등에 제 손을 포갰다. 그러나 음욕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호원을 방으로 끌고 들어갈 것처럼 흉흉했다.

호원은 바짝 긴장하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명훈이 막무가내로 밀어붙인다면 어떻게든 밀어낼 셈이었다.

명훈이 고개를 돌려 호원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날 다루는 법을 잘 안다니까.”

뭉그러지는 발음으로 말한 그가 눈을 휘어 웃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완전히 마당에 두 발을 붙이자 그제야 호원도 안도의 한숨을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대신 밤에는 제대로 서비스해 줘야 해?”

뻗어온 손가락이 호원의 뺨을 쓸어내렸다. 호원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바로 옆에서 뒹굴고 있는 배낭을 들어 올렸다.

“여기 바로 뒤쪽에 작은 동산이 있어. 경치가 좋더라.”

같이 가자. 호원은 그렇게 말하고는 부엌으로 돌아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내밀었다.

“가는 동안 목마를 테니까 그거 들고 가.”

“형은?”

“난 가방 안에 있어.”

명훈은 흐음- 하며 뜻 모를 소리를 냈지만 순순히 호원이 내민 생수병을 받아 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순수한 즐거움으로 위로 올랐다.

“우리 원이 형이 또 무슨 속셈일까?”

기대되네. 호원을 똑바로 마주 보는 그의 눈이 다정하게 휘었다.

***

쾅! 소리와 함께 컨테이너의 철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자그락거리는 쇠사슬 소리만 날 뿐, 문은 열리려는 기미조차 없었다.

철문을 걷어찼던 무휼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발을 굴렀다.

몇 번이고 걷어차느라 발바닥과 종아리 부근이 시큰거렸지만 지금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헐떡거리는 숨 때문에 입김이 시야를 가리는 것마저 짜증스러웠다.

당장 이곳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호원 그 인간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데. 무휼은 밀려오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런 곳은 잘도 알아서는….”

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무휼은 가슴이 옥죄는 기분에 인상을 찡그렸다.

호원은 이 섬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이라고는 해도 어릴 적의 일인 데다 이후로는 자주 왕래하지도 않았다는 모양인데, 마치 원래부터 이 섬의 주민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컨테이너만 해도 사람 손을 탄 지 꽤 오래되어 보였다. 아마 방치된 지 오래된 컨테이너인 듯했고, 이상하리만치 지나다니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이런 장소를 알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호원이 그동안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호원이 종적을 감춘 지는 약 한 달 남짓. 그 시간을 전부 투자해서 이 섬에 대해 조사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무휼은 그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러나 그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단번에 그 가설을 지워버리려 했으나 한번 떠오른 생각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일단 이곳을 나가야 한다. 나가서 호원을 붙잡아 앉혀놓고 추궁할 셈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나갈 것인가.

“답도 없네, 진짜.”

무휼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컨테이너 안을 몇 번이고 둘러봤지만 쇠사슬이 감긴 철문 외에는 출입구가 없었다.

창문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천장 가까이 붙어 있는 데다 폭이 좁고 가로로 길어 빠져나가긴 어려워 보였다.

“잠깐… 창문?”

무휼의 시선이 창문을 향했다. 보통의 컨테이너였다면 장신의 무휼이 무리 없이 천장에 손을 짚을 수 있었을 테지만, 그가 갇혀 있는 컨테이너는 이상할 정도로 높이가 높았다.

3m는 될 법한 높이를 확인한 무휼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하여간 이호원, 치밀한 것도 이쯤 되면 병이었다.

어떻게든 창문에 손만 닿으면…. 무휼은 입술을 짓씹으며 마구잡이로 컨테이너 안을 뒤졌다. 그러나 컨테이너 안에 있는 것이라고는 농기구 몇 개와 지푸라기 더미가 다였다.

지푸라기는 농사에 필요한지 밧줄로 한데 묶여 동그랗게 말려 있었는데, 너무 푹신해서 발판으로 쓸 수가 없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창문을 올려다보는데, 그제야 잠금장치가 걸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범한 창문처럼 미닫이로 된 잠금장치였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무휼은 기어이 입 밖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가기만 해봐.”

이번에는 한 대로 안 봐준다. 무휼이 이를 바득 갈았다.

호원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무휼이 그의 생각보다 집요한 성격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대로 가만히 앉아 구조를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간과한 사실은, 무휼이 학교생활을 마냥 모범적으로 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무휼은 주변을 살피다 허리를 숙였다. 창고라 그런지 썩 괜찮은 물건이 많이 굴러다녔다.

자신의 주먹만 한 돌을 집어 든 무휼이 씩 웃었다.

“이까짓 컨테이너, 단번에 나가주지.”

그는 창문을 향해 힘껏 돌멩이를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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