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카운터
호원은 바닥에 널브러진 명훈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나라고 이렇게 하고 싶진 않았어.”
그는 천천히 몸을 굽혀 명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배낭을 벗어 안을 열자 로프와 구명조끼, 케이블타이가 보였다.
호원은 명훈의 몸통에 구명조끼를 입혔다. 그러고는 명훈의 팔을 뒤로 돌려 케이블타이로 묶은 뒤 발목도 마찬가지로 묶었다. 칼로 끊지 않는 이상 끊어지지 않는다는 건 이미 실험으로 확인했다.
호원은 구명조끼 위로 로프를 둘러 단단히 묶었다.
산악 등반용 로프는 암벽도 탈 수 있도록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에 어지간한 나이프로도 잘리지 않는다.
매듭 묶는 법은 꽤 특수해서 어려웠지만 틈틈이 연습한 덕분에 눈 감고도 묶을 수 있었다.
호원은 로프의 나머지 한쪽을 자신의 허리에 단단히 묶었다. 어지간해서는 풀리지 않을 터였다.
곧 해가 질 것이다.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호원은 힘없이 늘어지는 명훈의 몸을 질질 끌어 호수 가장자리로 향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발목이 물에 잠겼다. 한겨울의 호수는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웠다.
심장이 놀라지 않게 미리 마사지라도 할까 하다가 호원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소용도 없을 거 마사지는 무슨.
보기보다 훨씬 수위가 높은 호수는 몇 걸음 걷지 않아도 금세 허리께까지 물이 차올랐다.
차갑고 잔잔한 물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위로 위로 올라왔다.
심장께까지 물이 차오르자 서늘하게 피가 식는 감각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다지만 의식을 잃은 장신의 남자를 끌고 헤엄치는 일은 생각보다 힘에 부쳤다.
호원은 명훈과 연결된 로프를 한 손에 감아 잡고 물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조금 먼 위치에 익숙한 부표가 보였다. 부표에 충분히 가까워지자 그는 로프를 잡아당겨 명훈의 구명조끼를 붙잡았다.
손발이 묶여 있는 것은 확인했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였다.
그때, 명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또렷하게 노려보는 눈에 호원이 숨을 들이켜며 허우적거렸지만 이미 팔뚝이 커다란 손에 잡혀 있었다.
“어떻게…?”
“내가 말했지? 형은 나를 너무 잘 안다고.”
호원의 팔뚝을 잡은 손아귀 힘이 너무 강했다. 팔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에 호원이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그리고 난 형을 너무 잘 알지.”
잡히지 않은 팔로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명훈이 더 빨랐다. 명훈은 호원의 손을 모아 한 손으로 붙들어 잡았다.
두 팔을 모두 제압당한 호원은 수면에 떠 있는 명훈에게 매달리다시피 하며 발을 허우적거렸다.
수면 경계에 걸친 입과 코로 시리게 차가운 물이 왈칵왈칵 들이닥쳤다. 정신이 흐릿하게 멀어지는 것 같아 호원은 머리를 휘저었다.
“이 섬에 왔을 때부터 알았지. 형이 날 죽이려 한다는 걸 말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이 없거든. 그렇게 덧붙이며 명훈은 자유로워진 한 손을 들어 보였다. 날카롭게 날이 선 서바이벌 나이프가 번쩍거리며 빛을 발했다.
아무래도 호원이 수영하는 동안 나이프로 손발의 케이블타이를 끊어낸 듯했다. 낭패라는 심정이 호원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 정도 놀아줬으면 만족하지? 이제 슬슬 돌아가자. 감기 걸리겠어.”
명훈은 다정하게 웃어 보이며 호원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근데 형은 역시 너무 무르더라. 나 같으면 실제로 마실지도 알 수 없는 물에 마비약을 타느니 바로 주사기부터 꽂았을 거야.”
그러니까 마시는 연기 하나에 넘어가는 거 아냐. 명훈은 쯧쯧 혀를 차며 말하고는 창백해진 호원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한겨울에 물놀이도 나쁘진 않네. 형 지금 엄청 섹시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입꼬리가 소름 끼치도록 달콤했다. 앞뒤 상황만 몰랐더라면 누구든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다정한 미소였다.
그러나 호원은 저 얼굴을 한 명훈이 어떤 짓까지 벌일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호원은 탈력감에 젖은 얼굴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돌아갈까?”
명훈의 말에 호원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딱 붙어 있는 명훈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자 물에 푹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와 가슴팍에 흩어졌다.
“말 잘 들으니 얼마나 예뻐.”
명훈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호원의 양손을 붙잡은 손은 움직일 기미조차 없었다.
호원은 침착하게 기다렸다.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명훈의 말마따나 이호원은 여명훈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일을 다 벌였으니 어떤 벌을 줄까.”
돌연 명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흐음- 하는 콧소리를 내며 뜸을 들이던 그가 이윽고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권무휼을 죽여야겠어.”
호원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번쩍 고개를 들자 명훈이 귀엽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며 다정하게 허리께를 쓸었다.
“먼저 형의 손발을 묶고 목줄을 달아서 방에 가둬야겠지. 그리고 권무휼을 데려다 형 앞에서 죽여줄게.”
아주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아주아주 천천히. 그렇게 덧붙이는 명훈의 얼굴은 재미있는 장난을 계획하며 신나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말하는 내용과는 상반되는 그 천진한 얼굴에 호원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 예쁜 목에 달 목줄은 내 짐에 들어 있으니까 기대해. 형 취향대로 고르게 해줄게.”
허리를 천천히 쓸며 올라온 손이 창백해진 목덜미를 더듬었다. 벌레가 전신을 기어 다니는 것만 같은 불쾌함에 호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갈까?”
명훈이 생긋 웃으며 호원의 손을 풀어주었다.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듯 무기력해진 호원의 반응에 무척이나 만족하는 듯했다.
그때, 호원이 손을 뻗었다. 두 손은 연인을 유혹하듯 명훈의 목에 가볍게 감겼다.
“뭐야? 애교 부리는 거야?”
명훈이 피식 웃으며 기다렸다는 듯 호원의 허리를 마주 안았다.
긍정이라도 하듯 호원이 명훈에게 몸을 더 기댔다. 명훈의 미소가 진해짐과 동시에 호원의 손이 수면 아래로 쑥 내려갔다.
“…어?”
명훈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을 때, 호원의 손은 이미 구명조끼를 둘러맨 로프를 잡아챈 뒤였다.
복잡하게 얽힌 고리 끝을 잡아당기자, 로프는 일순간에 풀어졌다. 애초에 풀기 쉽도록 고안된 매듭은 손쉽게 호원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었다.
“큽!”
호원은 명훈의 구명조끼를 붙잡은 채로 발을 들어 그의 명치께를 걷어찼다. 구명조끼가 이렇게 쉽게 벗겨질 줄은 몰랐던 듯 명훈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허우적거리며 물을 먹었다.
발버둥 치는 몸짓에 들고 있던 나이프가 명훈의 손을 벗어났다. 첨벙 소리와 함께 서바이벌 나이프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이 구명조끼, 망가져서 고정이 안 되거든. 친절한 할아버지 덕분에 구했지.”
호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는 구명조끼를 멀리 내던졌다. 물에 젖은 구명조끼는 던지기 힘들었지만 다행히 금방 손이 닿을 위치는 아니었다.
“뭘… 어쩔 셈….”
명훈은 허우적거리느라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걷어차인 명치께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헤엄을 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명훈은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상황 판단이 빠른 녀석이었다.
호원은 이를 악물며 손을 뻗었다. 명훈의 멱살을 붙잡자 그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는 게 보였다.
“뭐야, 이대로 날 익사시킬 셈이야?”
쉽지 않을 텐데. 명훈은 오히려 호원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그럼 난 이대로 형을 기절시켜서 데려갈 거야. 그다음 형의 소중한 사람들을 하나씩 눈앞에서 죽여줄게.”
물론 시작은 권무휼이야. 기대해도 좋아. 그렇게 덧붙인 그가 두 손으로 호원의 목을 덥석 붙들었다. 순식간에 호흡이 틀어막혔다.
호원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명훈의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커다란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호원의 시야가 일렁거렸다. 호흡이 가빠지며 차갑게 식은 가슴께가 뻐근하게 당겼다. 호원은 서둘러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단단한 플라스틱의 감촉이 느껴지자 그는 주저 없이 그것을 뽑아내 휘둘렀다.
“아악!”
명훈이 비명을 지르며 손을 떼어냈다. 나이프에 길게 베인 팔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물 위에 검붉은 얼룩을 그렸다.
“커헉! 쿨럭, 쿨럭!!”
호원은 격하게 숨을 들이켰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공기에 폐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호원은 옆을 돌아보았다. 새하얗고 둥근 부표는 손 뻗으면 바로 닿을 위치에 둥둥 떠 있었다.
호원이 부표 아래로 손을 담가 밧줄을 붙들었다. 부표를 끊어내고 허리에 매고 있던 로프와 연결하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무슨 짓이야!”
명훈이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었다.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조차 신경 쓰지 않는 듯 갈고리 같은 손이 다시금 호원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명훈아.”
호원이 명훈을 붙들고 와락 끌어안았다. 불시에 호원에게 안긴 명훈의 얼굴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호원의 목을 붙들려고 했지만 그가 고개를 명훈의 목덜미에 파묻고 있어 여의치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리만큼 호원이 무거웠다. 꼭 바위라도 달고 있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휘저은 발끝에 딱딱하고 투박한 무언가가 닿았다. 돌을 매달고 있구나. 명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두 팔을 들어 호원을 떼어내려 했지만 호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꽉 옥죄는 팔을 밀어내려던 명훈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호원의 양손이 케이블타이로 꽁꽁 묶여 있었다.
“혼자 묶는 법을 터득하느라 고생 좀 했지.”
호원이 씩 웃고는 힘을 줘 명훈의 몸을 옭아맸다. 버둥거리던 명훈의 몸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똑똑히 들어, 여명훈.”
호원의 다리가 명훈의 다리를 휘감았다. 물장구도 치지 못하자 두 사람의 몸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명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너만 죽일 수 없다면, 아예 같이 죽으면 돼.”
동반자살. 알지? 호원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은근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악마의 그것처럼 소름 끼쳤다.
“혹시라도 착각하진 마. 난 너를 사랑해서 함께 죽어주는 게 아냐.”
호원을 밀어내던 무휼의 팔이 뚝 멈췄다. 흔들리는 동공에 호원의 얼굴은 비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호원이 입을 열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널 죽이는 거야.”
뭐? 명훈은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오싹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죽는다니, 누가? 내가? 명훈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호원과 함께 죽는 건 사실 그에게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6년 전, 호원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던 그였다. 이제 와서 호원과 죽는 게 무서울 리 없었다.
그러나 호원이 ‘다른 사람을 위해’ 그를 죽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자신이 고작 호원의 소중한 사람을 위해 개죽음당한다니, 그것도 호원과 함께. 그것은 호원을 향한 그의 사랑을 이중으로 능멸하는 의미였다.
“형 이건… 이건 아니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명훈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서 새어 나온 소리가 단말마처럼 갈라졌다. 그러나 그를 붙든 호원의 팔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날 사랑해서 이러는 거라고 해, 이호원!!”
사정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는 악에 받친 것처럼 처절했다. 그러나 호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해줄게.”
여명훈은 이호원 손에 죽는 거라고.
호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여명훈은 이제 필사적으로 호원을 떼어내려 하고 있었지만 호원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야.”
호원이 말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몸이 수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