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옆에서 들려온 우사의 말에 나는 앞으로 쭉 손을 뻗었다. 호리병을 집어 든 손끝에 서늘한 기운이 번진다.
서늘함은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차갑게 식혔다.
이게 정말 단애약수라고? 너무 쉽잖아.
손에 넣기까지가 지나치게 간단하고 쉽다.
간밤에 꾼 게 예지몽이 맞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내 행동은 예지몽을 완전히 뒤트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에 관한 강제력이 하나도 없다니.
“이게 단애약수야?”
내가 물었다.
예지몽일 거란 가정이 무너지는 데서 오는 불안감에 가슴이 울렁인다.
[네.]
돌아오는 대답은 간단했다. 우사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이걸 내가 어디에 쓸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서 내가 물어봤다.
울렁이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며 우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와중에 이미 내 손은 병의 마개를 열었다.
이게 어디에 있었던 건진 몰라도, 꽤 찾기 힘든 곳에 있었단 건 알겠다. 혼자였다면 나도 꽤나 고생했을 거다. 우사 덕분에 쉽게 얻었다.
그래, 그게 가장 문제다. 결과적으로 지나치게 간단히 손에 들어왔다.
나는 이걸 우리의 운명을 바꾸는 데 쓸 건데.
[괜찮아요.]
우사가 대답했다. 뭐든 상관없단 태도다.
“이게 어떤 건진 알아?”
마개를 연 병을 살짝 흔들며 물었다. 그런 날 보는 우사의 눈빛이 미묘하다.
[왜 그건 벌써 열었…,]
우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나는 그걸 단번에 마셔 버렸다. 경악한 우사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좁아진다.
“마시려고 열었지.”
반 모금 정도의 양이어서 순식간에 비워졌다. 단애약수를 삼키고서야 나는 모든 부정을 끝내고 받아들였다.
그건 예지몽이 아니었다.
예지몽이 아니다. 빌어먹을.
…하지만 괜찮다. 괜찮을 거다. 나는 이미 단애약수를 음용했으니까. 단애약수로 마음을 잊은 덕에 내가 회귀했단 사실에서 오는 괴로움이 빠르게 흩어진다.
그래, 이젠 그럭저럭 괜찮다.
…좀 씁쓸하긴 하지만.
[…….]
우사가 이해할 수 없단 눈으로 날 본다. 나는 병을 쥐고 있는 손에서 힘을 풀었다. 병이 힘없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으로 추락한다.
쨍그랑-!
병이 산산이 깨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내 마음이 부서지는 대신 단애약수를 담았던 병이 부서졌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사는 머뭇거리다가 느리게 술법을 해지했다.
다시 수 개의 법진이 앞에 나타났다. 반대로 감기는 시계태엽처럼 모든 게 아까와는 반대 방향으로 무너져 내렸다. 우사가 불러낸 공간이 뒤로 물러나며 사라졌다.
이제 다시 사학당이었다.
돌아온 사학당의 한실에는 이미 스승님이 와 있었다.
“대체 어딜 다녀온 것이냐?”
나와 우사를 번갈아 보며 스승님이 물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게 신기하단 눈치였다. 우사가 재빨리 내 팔에서 내려가 제 방석으로 돌아간다. 나도 내 방석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섰다.
“우사. 진연, 저놈이 또 괴롭히진 않았고?”
스승님이 대놓고 물었다. 곁눈으로 본 우사는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있었다. 왠지 모를 처연함이 물씬 느껴진다.
스승님도 그걸 느꼈는지 곧장 나를 본다. 날 보는 눈매가 가느스름해진 걸 보니, 의심을 넘어 이미 확신 상태다. 하기야, 내가 전적이 좀 있긴 하지.
“…스승님이 이렇게 아끼는데, 제가 어떻게 우 형[兄]을 괴롭힐 수 있겠어요?”
훈화를 빙자한 잔소리가 날아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서 말했다. 우사를 우 형[兄]이라고 칭한 건 내 나름 회심의 농이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한 내 태연자약한 대꾸에 스승님이 못마땅해하며 혀를 찬다. 내 농을 비꼼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진연. 우사는 네 사제다.”
스승님이 기어코 한마디 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말에 속에서 뭔가가 욱- 받쳐 오르며 반발심이 들었을 텐데, 지금은 평온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내 인생에서 버리고 싶었던 걸 드디어 전부 버린 거다. 잘된 일이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옆의 우사를 돌아봤다. 때마침 우사도 곁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는 가늘게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내 마음이 혼란해서 우사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똑바로 마주할 수 있다.
우사는 나를 빤히 응시하다가 이내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옆모습을 잠시 보다가 나도 고개를 틀어 앞을 봤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스승님은 서책으로 말없이 시선을 옮겼다.
스승님의 고개가 살짝 숙여지며 머리카락이 사락- 흘러내린다. 손을 들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스승님은 아까보다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나와 우사 사이에 흐르는 기류에서 무엇을 읽었는진 몰라도, 그게 스승님을 편안하게 해 준 게 틀림없다.
곧 스승님의 훈화가 한실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나는 방석 위에 앉은 채 그 훈화를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이미 들은 것이기도 하고, 지금 이 상황을 다시 되짚어 보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일단 내가 꾼 건 예지몽이 아니다. 강제력이 없는 예지몽이란 없다. 확실히 이건 <회귀>다.
나는 회귀를 한 거다.
한때 예지몽이라 생각했던 꿈의 끝이 바로 죽음의 문턱이었던 거야. 그 죽음의 문턱에서 역행해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상념은 더욱 깊어졌다.
애초에 <회귀>가 금지된 술법인 데엔 다 이유가 있다.
속계의 모든 건 천라지망 안에 있어, 모든 일은 인과율에 따른다. 설령 인과율에 따르지 않을지라도 전부 과보[果報]로 이어져 있다.
그러니 내가 회귀를 한 데에도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거다. 그 이유가 나를 회귀의 굴레에 넣은 ‘원[願]’이 될 거고, 그 ‘원[願]’을 해소하지 못하면 한 번 돌아간 내 시간선은 ‘8’자로 꼬이고 말 거다.
즉, ‘원[願]’을 해소할 때까지 생이 계속 반복되는 거다.
계속 반복되는 삶이라니. 절대 그렇게 되게 둘 수 없지.
어떻게든 회귀한 이유를 찾아내 원을 해소하고 반드시 제대로 죽어야 한다.
이 경우에 ‘제대로 죽는다’는 건 대체로 ‘회귀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걸 뜻한다. <회귀>란 건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사는 것을 가장 중점으로 둔 욕망의 발현이니까.
내 회귀 이전의 삶은, 예지몽이라 믿었던 그 꿈속의 삶이다. 그 꿈속의 내가 회귀 이전의 나이니 그 꿈대로 살면 안 된다.
‘꿈’대로 살지 않는 걸 기본으로 하면서 회귀한 이유를 찾아야만 이 삶에 다신 커튼콜이 찾아오지 않을 거다.
좋아. 이제 뭘 해야 할지 알겠다. …알겠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꿈’대로 살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내 회귀의 원[願]은 무슨 수로 찾아내지?
“…….”
가만 보면 우사가 참 쓸 만한데 말이지. 단애약수도 단번에 찾아내고, 선술도 자유자재로 쓰고, 나중에는 천룡이 되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내 눈에 주인공 같은 녀석이다.
회귀 전의 내 삶에서 우사는 남성향 무협 소설의 왕도 같은 길을 걸었었고, 그 행보는 마치 이야기 서사 속 주인공 같았다.
주인공이란 무릇 온갖 행운과 기연이 잇따르기 마련이다.
마음 같아선 그 주인공에게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도 일단은 사형이다.
단애약수가 내 정[情]을 잊게 해 준 효과인지, 이제 내게 우사는 ‘사제’로만 보였고, 그에 따라 ‘나는 사형이다’란 자각도 더욱 뚜렷해졌다.
위계를 세워야 한단 생각이 자연히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 생각에 사형제 간에 가장 중요한 건 서로의 위치, 즉, 위계다.
마침 사형제지연을 받아들인 상태기도 하니 앞으로는 위계를 세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그저 내가 좀 편하자는 이유만으로 사제에게 무작정 기대선 안 되겠지. 기댄다는 단어 자체가 거북스럽기도 하고.
이때까지 사형 노릇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가. 밀려드는 거부감이 더욱 꺼림칙하다.
…뭐, 사형 노릇을 제대로 했어도 사제에게 기댄다는 것 자체에 아예 거부감이 안 들진 않았겠지만.
어쨌든 단애약수를 얻었을 때처럼 우사가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니 됐다.
사형으로서 사제에게만큼은 기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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