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방금 내 금낭을 소매치기한 게 저놈인 것 같은데……. 이건 너무 과하잖아. 남들 눈에 띄는 행동은 가급적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곁을 지나치던 행인들이 하나둘 멈춰 서서 이쪽을 봤다. 이러다가 구경거리 되게 생겼다. 지금 상황에서 남들 이목을 끌어 봐야 좋을 거 없다.
“그만 놔줘!”
소년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우사의 팔을 강하게 쥐며 말했다. 내 소리 죽인 다그침에 우사가 시선만 돌려 나를 봤다.
“여기서 목이라도 부러트릴 생각이야?”
최대한 낮춘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사는 그런 날 물끄러미 보았다. 어느 순간 우사에게 잡혀 있던 소년이 아래로 털썩- 떨어졌다. 뒤이어 허공에 떠 있는 우사의 팔을 힘주어 잡아 빠르게 내렸다. 그러곤 잡고 있던 팔을 놓으며 우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사제, 장난이 지나치잖아. 이 정도면 이제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야.”
태연자약한 척, 남들 귀에 들릴 정도의 크기로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곤 쓰러진 소년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너도 좀 일어나라, 제발.
기절한 게 분명한 소년의 손등을 지르밟았다. 이만하면 고통 때문에라도 일어날 텐데 정말 미동도 없다. 아무래도 기절했나 보다.
이러면 일이 복잡해지는데.
미간을 찡그리며 속으로 혀를 한 번 찬 뒤, 한쪽 무릎을 굽혀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기절한 소년의 몸을 일으켜 부축했다.
그제야 주변 행인들의 시선이 하나둘 떨어진다. 본인들 기준으로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사라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소년의 한 팔을 어깨 위로 둘러 부축하며 일어섰다.
…사고 친 건 쟨데 고생은 왜 내가 해야 하는 거지. 억울한 마음에 곧바로 우사를 노려봤다. 우사는 멀뚱히 서서 나를 보고만 있었다.
저게 빠져가지고-! 사형이 고생하고 있는데 그냥 보기만 해?
아무리 내가 지금 우사가 주최하는 인성 검사 중이라 하더라도, 엄연히 기수가 있는 법이다. 나는 사형이고 쟤는 사제다.
…좋아! 말하는 거야. 얘는 네가 들라고.
마음을 굳게 다잡은 뒤 입을 열었다.
“야.”
그와 동시에 우사가 내게서 소년을 데려갔다. 자연스럽게 대신 부축하며 의아한 눈으로 날 본다.
“네, 사형.”
일단 대답부터 하고 보는 우사의 낯은 순했다. 내 말을 기다리는 모습이 퍽 얌전하다. 나는 바로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지저분한 소매치기를 부축한 상태에서도 아정한 우사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더는 할 말도 없는데 자꾸 쳐다보니,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여기는 남해야.”
“네.”
“정파란 자부심은 강하지만 실력이 안 돼서 구파에 못 끼는 남해검문이 있는 곳이라고.”
“알고 있어요, 사형.”
“그러니까,”
알면, 알아서 몸 좀 사리라고 뒷말을 이으려는데,
“알긴 뭘 알아!”
누가 등 뒤에서 소리 질렀다. 뒤이어 뭔가가 내 뒤통수를 겨냥하고 날아왔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까닥여 그걸 간단히 피해 냈다. 문제는 내 바로 맞은편에 우사가 있다는 거였다.
그 찰나의 순간에 우사의 눈동자가 옆으로 향하는 걸 봤다. 그리고 제가 부축하고 있는 남자애를 본 뒤 그냥 가만히 있는다. 자신이 움직이면 그 남자애가 다칠 거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아니, 아까는 목 졸랐으면서 이제 와 챙겨 주기라니!
젠장!
속으로 짧게 욕설을 뇌까리며 앞으로 힘껏 팔을 뻗어, 그게 우사의 이마를 정확히 때리기 직전에 단단히 움켜쥐었다.
퍼억-
손가락 사이로 물컹한 게 터져 흐른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붉은 액체는 사방으로 튀어 소맷단은 물론이고 우사의 얼굴과 목덜미까지 엉망이었다.
엉망인 꼴에 반해 사방에서 달짝지근한 냄새가 진동했다.
뻗었던 팔을 천천히 거둬 손안에서 곤죽이 된 것을 봤다. 이건… 홍시다.
“……눈에 들어간 것 같아요.”
앞에서 우사가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 안 감고 뭐 했어.”
더 우울한 목소리로 답하며 손안에서 짓뭉개진 홍시를 내려다봤다. 대체 어떤 새끼가…….
이를 악물며 바로 뒤를 돌자, 등 뒤에는 우리와 비슷한 키의 또래가 서 있었다.
“방금 한 말 취소해!”
말총머리를 한 남자애가 씩씩대며 외쳤다. 한쪽 어깨에 멘 바구니에 홍시가 들어 있었다.
붉은 문양이 들어간 하늘색 무복. 옷깃 끝의 반원 문양과 머리를 묶은 청색 긴 끈, 그리고 그 위를 장식한 청옥색 관까지. 단번에 훑어봤다.
저 꼬맹이의 정체가 뭔지 대충 알겠다.
남해검문이다. 저 나이에 머리 장식인 ‘관’까지 했다는 건 배분을 무시할 만큼의 고귀한 출생이라는 거다. 높은 확률로 문파 수장의 아들, 아니면 문중 최고 어른이 귀하게 키우는 제자일지도 모른다.
음, 느껴지는 기운으로 봐선 후자일 가능성은 없겠다. 근골이 뛰어난 인재이긴 하지만 기재는 아니다.
우사 정도는 되어야 기재지. 아니, 단순히 기재란 단어론 우사를 표현할 수 없다.
우사를 수식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다. ‘주인공’.
“감히 남해에서 남해검문을 욕하다니! 존장이 오늘 네놈들의 정신머리를 고쳐 주마!”
허리춤에 맨 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소년이 일갈했다. 그 작태가 어이없어서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씰룩였다.
딱 봐도 이쪽과 또래로 보이는데 스스로를 존장이라 높이다니.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머리 장식인 ‘관’을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다. 핏줄 귀한 공자님인 모양인데, 자고로 귀공자는 안 건드는 게 상책이다.
괜히 건드려 봐야 재수만 옴 붙는다.
“존장이란 칭호는 소인이 쓰는 게 아닌데. 누가 누구의 정신머리를 고쳐야 할지…….”
그때 뒤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저 없는 어조로 매끄럽게 이어지는 말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한 손으로 우사의 입부터 막고 눈을 부라렸다.
적당히 무시하고 튀자고 말하려 했는데 그새 입바른 말을 하다니.
“소인? 지금 나, ‘남여연’에게 소인이라고 한 거냐?”
기가 차단 듯 남여연이 말했다.
다 들었으면서 굳이 확인사살을 요구하는 남해 귀공자, 남여연의 행태에 한숨을 삼켰다. 일단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음 지으며 남여연을 보았다.
“우리는 소주에서 온 진…, 진 형제인데, 아우가 모자라서 실수를 했습니다. …존장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지요. 그리고 남해의 실정을 몰라서 한 망언이니, 이 또한…….”
“형제? 아까 저놈이 네놈을 사형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는데! 너희 어느 문파냐? 딱 보아하니 형편없는 문파의 삼대제자겠군!”
“아……. 문파는 이미 망했습니다. 그래서 사형제의 호칭은 뒤로하고 형아우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때그때 변명을 끼워 맞추며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남여연은 문파가 망했단 말에 흠칫 놀라더니 조금 난처해했다. 그래도 기본적인 윤리는 있는 안하무인인 모양이다.
“그, 그래도 문파가 망해도 스승님은 있을진대…….”
“스승님은 돌아가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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