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남여연은 이제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며 눈가가 파들 떨리고 있다.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가 싸해졌다. 언제 다시 모였는지, 아닌 척 이쪽을 구경하던 군중들도 저들끼리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흩어졌다.
남여연은 좀 전보다 한결 얌전해진 태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제 남여연은 이 상황 자체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눈을 굴리는 게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눈치다. 마침 나도 바라는 바였다.
“남해검문 존장의 마음이 풀렸다면 이만 가 볼까 합니다. 우리 쪽에 상태가 위급한 환자가 있어서요.”
나와 우사의 합작인 소매치기를 눈짓하며 말했다.
“……존장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바보 같으니까.”
미간을 찌푸리며 남여연이 말했다.
“나는 남해검문의 남여연이다. 스스로 무지몽매했음을 인정했으니 이번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지. ……그리고, 따라와. 그 꼴로 의원을 찾아 거리를 전전할 거 아니면.”
퉁명스런 말 속에 우리를 향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이제 상황이 일단락된 것 같으니 우사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왜 쳐다보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우사의 입을 막은 손은 하필 홍시를 터트린 손이었다. 보나 마나 얼굴 절반이 홍시로 칠갑이 되었겠지. 노리고 한 건 아니고 대충 얻어걸린 거다.
남여연이 우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꼴이 말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홍시로 더러워진 건 씻어 내면 그만이다.
어차피 소매치기를 치료해 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고. 으슥한 골목으로 데려가 품만 뒤져 볼 생각이었다.
그러니 굳이 남여연과 엮일 필요 없고, 애초에 남해검문은 정파이니 불필요하게 엮여선 안 된다.
이미 목표한 대로 남여연과 헤어지고 귀곡과 마교를 뒤져 보러 가면 된다.
그렇게 앞으로 할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데,
“사형. 곧 비가 쏟아질 거예요.”
우사가 등 뒤에서 말했다.
…비가 온다고?
순간 멈칫했다. 그런 날 지켜보던 남여연이 턱 끝을 살짝 든다. 한쪽 눈썹을 까닥이며 조소하는 모습이 굉장히 재수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재수 없는 게 오늘의 일기다.
아니, 갑자기 비라니. 하늘이 이렇게 청명… 하진 않고, 그럭저럭 흐리긴 한데…….
“우산은 있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채 코끝으로 웃으며 남여연이 물었다.
“…….”
대답을 못 하는 내 머리 위로 무언가가 씌워진 건 그때였다. 얼룩 한 점 없는 새하얀 장포였다.
장포에서 우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선력으로 만든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사에게 끌어 안겨진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리 위를 덮은 장포 자락을 옆으로 열어젖히며 뒤를 돌아봤다. 우사는 백의 차림새로 헌앙하게 서 있었다. 그저 서 있는 것뿐인데 그 모습이 무척 단정하고 아정했다.
그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옆에 부축 중인 소매치기는 아예 보이지도 않고 내 눈에는 우사만 보였다.
두근.
순간 심장이 덜컹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사에게 넋이 나갔던 것도 잠시, 곧 주위가 분산된다. 고개를 가볍게 흔든 뒤 가는 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홍시는 언제 다 닦은 거야?”
일단 가장 눈에 띄는 것부터 물었다.
“아까요. 그리고 이게 있으니 우산은 없어도 괜찮지 않아요?”
“아.”
외마디 탄성을 내뱉으며 우사가 준 장포를 들척였다.
이거 방수인가?
“너는?”
“저는,”
“아, 맞아. 사제는 비 맞는 거 좋아했지?”
우사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떠올리자마자 냉큼 말했다.
“네.”
바로 들려온 우사의 대답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만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남여연이 갑자기 달려와 내 어깨를 붙잡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비스듬히 돌아본 남여연은 날 쓰레기 보듯 보고 있었다.
“너……. 우산 빌려줄 테니까 따라와.”
날 보는 눈이 매섭다. 다짜고짜 내 팔을 잡아끄는 남여연에 미간을 찡그렸다.
대체 이건 무슨 오지랖이야?!
이거 놓으라고 말하려는데 그보다 우사가 먼저 남여연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남여연이 뭐라 반응을 보일 새도 없었다.
우득-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내 어깨를 잡았던 남여연의 손목이 뒤틀려 꺾였다.
“-!!”
얼굴이 희게 질린 남여연이 곧바로 다른 한 손을 검으로 가져갔다. 우사의 동공이 그런 남여연의 움직임을 쫓았다.
붙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제가 먼저 남여연의 검집에서 검을 빼 들더니, 그대로 남여연의 목을 향해 겨눴다.
“아무리 호의라 할지라도 강제하는 건 폭력이야.”
우사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느새 말도 놨다. 나는 미쳐 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애 손목을 부러트려 놔?!
게다가 그걸로도 모자라서 검을 빼앗아 들어 검 주인의 목에 겨누기까지 했다.
안색이 파리해진 남여연은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우사를 노려봤다. 부러진 손목을 다른 손으로 받친 채 선 그의 숨소리가 가빠지면서 얼굴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우사는 그런 남여연을 응시하다가 그의 허리춤에 매인 검집에 검을 도로 꽂아 넣었다. 검이 검집으로 돌아오자 남여연의 눈매가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이… 미친…….”
말을 잇던 그의 몸이 다음 순간,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무도 잡아 주는 이가 없어서 남여연은 그대로 대[大]자로 뻗어 버렸다.
하지만 나는 봤다. 땅 위로 철퍼덕 넘어지기 직전 남여연이 교묘히 낙법을 쓰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
넘어지는 와중에 낙법을 쓸 정도면…… 실신한 건 아니지 않나? 왜 갑자기 고꾸라진 거지?
의아해하며 곁으로 다가가 남여연의 목덜미에 손을 가져다 댔다. 맥박이 좀 빠르다.
맥박을 확인한 다음에 엎어진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감겨 있는 눈꺼풀을 위로 까 본 뒤에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결과, 남여연은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차라리 기절을 택한 거였다. 몇 번 건들면 도로 일어날 것 같긴 한데, 좀 전에 펼친 혼신의 연기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어 봐야 좋을 거 없으니 말이다.
“혼절했어.”
그래서 남여연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우사는 잠시 내팽개쳐 둔 소매치기를 다시 주섬주섬 부축하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 했는지 알아?”
내 물음에 우사가 말간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그런 우사를 똑바로 마주 노려봤다.
지금 이 일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나는 여기 남해까지 오면서 우사에게 이 동행을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알려 줬다.
어떤 일이 생겨도 나서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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