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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7화 (17/141)

<17화>

* * *

알아볼 것도 없었다.

우리는 곧장 지하에 있는 빙옥[氷獄]에 갇혔다. 일사천리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처음 남해검문에 들어섰을 때, 남해문주는 대문 안쪽 외원에서 누군가와 한담 중이었다.

“아연(남여연의 아명)은 저를 이해할 것도,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에게 그러하니까요.”

남해문주 옆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가 말했다. 둘 다 우리로부터 등을 지고 서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둘도 우리의 기척은 느낀 것 같았지만 바로 돌아보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그래서, 앞으로도 주방의 육포가 사라질 일은 없을 거란 뜻이냐? 예전에는 그렇게 육포를 챙겨 먹이며 싸고돌면서 검술을 가르쳐 주더…….”

정확히는 남해문주 혼자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 했다. 그 옆의 장신의 남자는 이만 이 자리를 파하려는 기색이었다.

“외행이 바쁘기도 하고, 아연도 혼자이길 바랄 겁니다. ……이제 그 아이도 다 컸습니다.”

남자가 문주의 말을 자르며 빠르게 말했다.

“그럼, 이번 외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이것도 가져가거라.”

자리를 뜨려는 남자를 남해문주가 불러 세웠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작은 주머니였다. 남자를 불러 세우고는 그 주머니에 담긴 것을 손바닥 위로 쏟아부었다. 꼭 누구 보라고 그러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귀여운 나무 열매, 유독 반질반질하고 색이 고운 자갈, 그리고 어린아이가 갖고 놀 만한 장난감들이었다.

“하는 말과 행동이 다르구나.”

손 위의 것을 주머니에 도로 담은 뒤 남자에게 던져 주며 남해문주가 말했다. 남자는 주머니를 돌려받자마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자취를 감추었다.

남자가 사라진 자리를 일별한 뒤에야 남해문주가 이쪽을 돌아봤다.

“이랑(둘째 아들), 보았느냐. 보나 마나 저건 너를 위해…….”

남해문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우리를 보는 두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리고 그 뒤는 뭐, 뻔할 뻔 자였다.

우리는 곧바로 죄를 추궁당했다.

내가 지은 죄 중 가장 큰 죄는 남해검문 공자를 불순하게 안아 든 거라고 했다. 공자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으니 그 빚을 어떻게 갚을 거냐고 남해문주가 방방 뛰었다.

나는 그에 질세라 그때 그 자리에 있던 남해검문 사람들의 방치와 묵인을 일러바쳤다. 그러자 괘씸죄가 더해져서 바로 여기 빙옥으로 끌려오게 된 거다.

가뜩이나 감옥 이름에 빙[氷]자가 들어가는데 계절도 계절이라 그런지 더욱 춥다.

역시 빨리 한서불침을 익히든가 해야지.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살고 얼어 죽겠다.

감옥은 빙석[氷石]이란 돌로 만들어져 체온으로도 덥힐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자리를 따라 감옥 전체를 두르고 있는 깊은 틈에서는 분수가 거꾸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틈이 워낙 깊은 데다가 그 아래로 다른 곳과 이어져 있어서 넘치진 않았지만 물줄기가 워낙 세서 사방에 물이 튀었다. 그 탓에 주변으로 물안개가 자욱이 껴 있어, 마치 한겨울의 서리 같았다.

호기심에 물안개에 손을 갖다 대 봤다가 동상에 걸릴 뻔했다. 무슨 법술을 걸어 놓은 건지 손끝이 바로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여기에 갇힌 우사는 급속도로 잠들었다. 동면은 하지 않지만 추위에 약한 탓일 거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겨울잠이 급속 냉동처럼 찾아온담.

잠든 우사를 내 다리 위에 앉혀 놓고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우사에게서 아주 느린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덜덜 떨었다. 이가 저절로 딱딱 맞부딪쳤다.

물안개에 닿지 않게끔 감옥 정중앙에 웅크리고 앉아선, 품 안의 우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우사의 체온이 낮은 편이긴 하지만 이 빙옥에서 혼자 덜덜 떨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

한기에 코가 차가워져 나도 우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우사가 내게 벗어 줬던 장포까지 우사의 어깨에 둘러 주며 한데 덮었다. 겉에서 보면 지금 우린 한 몸으로 보일 거다.

“하아…….”

따듯한 입김을 내쉬며 우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아무래도 얼굴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니 더 춥다. 귀가 얼다 못해 뜯겨 나갈 것 같다.

빌어먹을 한서불침.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바로 익힐 테다. 그러면 이까짓 추위쯤은…….

이어지던 상념이 끊겼다.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우사의 몸이 일순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좀 따듯해졌다고 정신 차린 건가?

“……사형?”

곧 귓가로 우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깼으면 내 귀에다가 입김이라도 불어 봐.”

마침 잘됐다 싶어서 바로 시범 삼아 우사의 귀에 입김을 불었다. 우사의 귀 끝이 순식간에 화악 붉어진다.

바로 혈색이 도네?

“어때? 좋지?”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내가 말했다.

“……뭐가, 좋다는 건지…… 사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목소리가 퍽 신중하다.

“그래? 안 따듯해?”

혈색은 확 도는데?

다시 입김을 불어 주자, 내 목덜미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나를 마주 본다. 조금 상기된 얼굴에 떠오른 건 당혹감과 미심쩍음이었다.

우사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가 두 손을 들어 내 양 귀를 덮어 줬다. 선술을 쓴 건지 우사의 손에 덮어진 귀가 조금씩 따듯해진다.

“이 안은 술법을 쓸 수 없게끔 되어 있어서 이게 최선…….”

침착하게 말을 잇는 우사를 보며 나는 배시시 웃음 지었다. 추워 죽을 것 같았는데, 조금이라도 따듯해지니까 살 것 같다.

“응. 좋다.”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사는 그런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없이 날 응시하는 그 시선이 유하다. 우사의 입꼬리 끝이 미미하게 호선을 그린다.

“그런데 넌 괜찮아?”

우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며 말했다. 똑같이 손으로 귀를 덮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무형의 힘이 내 양팔을 억누르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팔이 풀리지도 않은 채 어정쩡한 자세로 굳었다.

이상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살짝 인상을 쓰며 팔에 힘을 주는데,

“…그냥, 그대로…….”

앞에서 우사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안아 주세요, 사형.”

다시 시선을 들어 우사를 똑바로 보았다. 그 역시 내 시선을 올곧게 마주했다. 미소가 가신 표정엔 이해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럼 내 팔을 움직이지 못하게 억누르고 있는 이 힘은 우사의 건가?

…아무렴 어떤가 싶어서 그냥 다시 끌어안아 주려는데,

“이렇게 거창한 곳에 가두다니. 형님 수완도 대단하네.”

멀리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 딴에는 혼잣말이었겠지만, 사방이 막힌 이곳에선 한껏 죽인 목소리도 넓게 울려서 똑똑히 들렸다.

낯익은 이 음성은 남여연이다. 기척으로 보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깨어나자마자 여기로 온 것 같은데, 무슨 이유에서지? 설마 내가 자기를 공주님 안기로 안은 것에 대해 따지기라도 하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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