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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18화 (18/141)

<18화>

“이것 좀 놔 봐, 백아.”

몸을 들썩이며 말했다. 물론 우사를 백아라고 고쳐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팔을 억누르던 힘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귀를 덮고 있던 우사의 손이 자연스럽게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손을 거둔 건 아니었다. 내가 돌아서기 직전에 그 손으로 내 손목을 붙잡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내려 우사를 내려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우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리가 저려서 혼자 일어나기가 어려워요.”

내 손목을 잡고 있는 우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옥죄는 손힘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우사가 잡고 있던 내 손목을 곧바로 놨다. 마치 불에 데기라도 한 것 같은 화급한 움직임이었다.

손을 놓은 뒤 우사는 더 이상 내게 어리광 부리지 않았다. 스스로 일어서려는 사제를 지켜보다가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러곤 우사의 겨드랑이 아래로 두 손을 넣어 번쩍 일으켜 세워 줬다.

순식간에 일어난 우사의 두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놀란 눈을 크게 깜박이며 날 보는 얼굴은 넋이 나가 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포도 마저 주워 들어 우사의 어깨에 덮어 줬다. 이 정도면 아주 특급 서비스다. 완전 상전이네, 상전.

“사형 잘 만난 줄 알아.”

생각 없이 말했다가 속으로 뜨끔했다. 아무리 그래도 우사가 사형을 잘 만난 건 아니지. 내가 했던 행동을 돌아보면……. 난 악질 사형이었으니까.

“…지금부터 알라고.”

어색하게 뒷말을 덧붙이며 우사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물론 나도 사제 잘 만났고. 그러니 우리 서로 잘하자, 응?”

나중 가서 또 납치하고 감금한 뒤 죽이지 말고. 나도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

“……네.”

짧은 침음 끝에 우사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사형.”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연거푸 대답한다. 그런 우사의 어깨를 가볍게 꾹 누른 뒤 손을 뗐다.

때마침 남여연도 이곳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다. 분수의 물줄기가 빠르게 잦아들었다.

분수가 사라진 곳엔 좁은 폭의 창살이 견고히 박혀 있었다. 분수의 냉기를 머금고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했다.

촘촘한 창살 너머로 남여연이 서 있었다. 우리가 있는 감옥은 원형이었고, 나가는 길은 남여연이 서 있는 길목밖에 없는 듯했다.

남여연은 나와 우사를 번갈아 보더니 입가에 비소를 걸쳤다.

“그 사형에 그 사제였을 줄이야.”

밑도 끝도 없는 시비였지만, 생각보다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이유나 말해, 남 공자.”

감옥에까지 갇힌 마당에 더 잘 보일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감정도 좋지 않은 상태라 그냥 말을 놨다.

내가 지금 이 빙옥에 갇혀서 추위에 떨고 있는 건 결국 ‘우산 빌려주기를 고집하던 남 공자’ 때문이었으니까. 그로 인해 촉발된 일이잖아.

몸에 스민 한기 때문에 기분이 더욱 저조했다.

“왜, 아예 남여연이라고 부르지?”

남여연이 코끝으로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아니, 그럴 것까지야. 그보다 더 좋은 칭호도 아는데. ‘존장’.”

내 이죽거림에 남여연의 한쪽 눈썹이 까닥 움직였다.

“그래서, 남해검문의 존장께선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행차하셨는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물었다.

“너희들이 여기에 끌려온 이유와 같아.”

남여연이 대답했다.

우리가 여기에 끌려온 건…….

“공주님 안기로 안는 바람에 위신이 땅에 떨어져서?”

남해검문 문주가 말한 죄 중 가장 큰 것을 말했다.

“……손목이 부러진 정도로 기절할 줄은 몰랐던 제 불찰이에요, 사형.”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우사가 나직이 말을 보탰다. 남여연이 기절만 안 했어도 내가 남해 공자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들 일은 없었을 거란 말이었다.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여연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진다. 그 상태로 남여연은 길게 숨을 내쉬며 심호흡했다. 그러곤 한결 차분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내가 기절 안 했으면 빙옥에 갇히는 호사를 누렸을 것 같아? 거기서 바로 자연스럽게 즉결처분으로 이어졌을 거다.”

차분해진 낯과 달리 목소리는 미묘하게 끓고 있었다. 성질을 완전히 죽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리고 난 위신이 땅에 처박히든, 안겼던 자세가 어떻든 관심 없어. 아까 그 말은 다 아버지가 한 말들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잠시 말을 멈추며 남여연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곤 한 손을 옷깃에 가져가 목걸이를 꺼냈다.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목걸이 줄은 튼튼한 검은색 끈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끝에 작은 유리 조각이 꿰어져 있었다.

“이게 너희한테 반응하던데.”

남여연이 목걸이 줄을 집게손가락으로 집어 들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문파는 망하고 스승은 죽었다라. 흥. 너희 둘, 선인 ‘오연’이랑 관련 있지? 요 근래 ‘오연’과 관련된 자들을 찾으려고 눈을 벌겋게 뜬 놈들이 많던데. 물론 그중 하나가 내 형님이고.”

“…그 목걸이가 뭔데?”

“이게 뭐냐면-,”

남여연이 목걸이를 아예 빼서 내 쪽으로 내밀었다. 쭉 뻗어진 팔은 당연히 이곳까지 닿지 않았다.

“나랑 뭐 좀 같이하면 알려 줄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소를 지으며 남여연이 말했다.

나는 그에 대꾸하지 않고 목걸이만 노려봤다.

“어차피 여기 계속 있어 봐야 찾아올 사람은 형님밖에 없어. 조만간 형님이 오면 너희 둘은 산 제물만 될 거다. 내 형님께서 요즘 강령술에 푹 빠지셨거든. 하, 정파 후지기수가 강령술이라니.”

“산 제물?”

“오연을 부활시킬 거라던데? 아, 이건 우연찮게 들은 거라서 증거는 없어. 그래서, 강령술을 하는 장소를 기습하고 싶은데 그거만 도와줘. 남해검문 귀공자의 위신이 아주 대단하긴 하지만, 그 아무리 견고한 위신일지라도 강령술 정도의 흠이면 간단하지.”

말을 이을수록 남여연의 표정이 서늘히 가라앉는다.

“내가 원하는 건 형님이 현재 갖고 있는 위신을 무너트리고, 그만큼의 오명을 씌우는 거야. 그러기 위해선 이 목걸이가 반응한 너희 둘의 도움이 필요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속의 동요를 숨기기 위해 최대한 태연한 낯으로 되물었다.

“너희가 누구인지 아무래도 상관없어. 날 도와준다고 약속해. 약속하면 이 목걸이가 뭔지 말해 주는 건 물론이고, 줄 수도 있어. 그리고… 원한다면 너희에 대해서 입도 다물어 주고.”

남여연의 대답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네 형님의 위신을 무너트리려는 건 남해검문의 후계 위를 얻기 위해서야?”

내 물음에 남여연이 코끝으로 차갑게 웃었다.

“난 그저 형님이 현재 가진 위신과 위명을 무너뜨리고 싶을 뿐이야. 이 일이 끝나면 난 강호에서 한 발자국 물러날 예정이라.”

이후의 일을 말하는 남여연의 표정은 어딘가 씁쓸해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후련해 보였다.

“지금의 이름도 전부 버리고 자유롭게 살 거야. 이름도 이미 정해 놨지. 자고[自高]. 남이 떠받들어 주는 게 아닌, 나 스스로 떠받들어질 거다. 그때 가서 다시 만나게 되거든, 자고라고 불러라.”

“자고[自高]?”

“그래, 자고[自高].”

말을 마친 남여연이 내민 손을 까닥 흔들며 ‘그래서 어떡할 거야?’라고 입 모양으로 뻐금 물었다.

나는 남여연의 손에 들린 목걸이를 주시했다. 목걸이에 꿰어져 있는 유리 조각엔 검은 연기가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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