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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23화 (23/141)

<23화>

‘연아.’

앞으로 달려가는 내 귓가에 오연의 음성이 환영처럼 울렸다.

나는 잠깐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한 번 휘둘러 검에 묻은 우사의 피를 털어 냈다.

‘네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자세를 낮추며 부서지는 벽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곁을 스치는 생강시(살아 있는 시체)들을 베고 또 벴다.

검에 기를 주입해, 단번에 머리를 자르자 더는 움직이지 않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펄럭이는 소매 너머로 언뜻 오연이 보인다. 헛것이 보이는 거였다.

달려드는 생강시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두꺼운 벽을 통과했다.

그 안에는 수 개의 관이 열린 채로 놓여 있었다. 빈 관에서 기어 나온 생강시 대부분이 한곳에 몰려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는 건 남소위였다.

남소위는 생강시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혈이 눌린 생강시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저런 정도로는 시간을 조금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게다가 감옥이 무너지고 있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때마침 생강시 하나가 남소위의 등 뒤를 기습했다. 갈고리처럼 길어진 손톱이 남소위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며 지면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단숨에 남소위의 곁에 도착해 그 생강시를 베었다.

곁눈으로 날 일별한 남소위의 눈이 경악으로 커진다. 나를 막으려는 손을 그대로 피해 멱살을 잡았다. 그러곤 방금 내가 건너온 부서진 벽 쪽으로 집어 던졌다.

“안 돼! 죽여선 안 돼……!”

바닥에 착지하며 남소위가 다급히 외쳤다. 아까보다 더 엉망인 얼굴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이미 죽은 자들이야. 이제는 악귀고.”

끝없이 몰려오는 생강시들을 베어 내며 무심히 말했다.

“본래는 영면에 들었어야 할 자들인데, 네가 오연의 힘을 빌려 되살렸기 때문에. 그 때문에 영면에서 깨어나 악귀가 된 거지.”

“……!”

“오연에게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그자가 빚어낼 수 있는 건 이런 참극뿐…….”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남소위가 내게 달려들었다. 맨손으로 덤비는 그 몸놀림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 있다.

그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내공을 한껏 끌어 올리며 나를 향해 팔을 뻗는다. 그 힘껏 뻗어진 팔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사납게 펄럭이는 소맷자락 너머로 보이는 남소위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악문 입술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르는 게 보였다.

내게 향해진 그 손바닥에서 기가 폭발하며 강한 바람이 불어 닥쳤다. 주변의 생강시들이 그 바람에 밀려 날아갔다. 나도 조금씩 뒤로 밀려나는 그 와중에도 남소위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그를 직시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리고 검 끝을 아래로 내렸다가 그대로 위로 강하게 휘둘렀다.

세로로 강하게 그어지는 검날에 기가 씌며 불어오는 장풍을 갈랐다. 동시에 나는 땅을 박차며 위로 도약해 남소위를 넘어 그 등 뒤에 착지했다.

그러곤 뒤에서 손을 뻗어, 여전히 앞으로 내밀고 있는 남소위의 손에 내 검을 쥐여 줬다. 잡지 않는 걸 억지로라도 움켜쥐게끔 그 위로 내 손을 겹쳐 잡은 뒤, 남은 한 손으로 남소위의 턱을 움켜쥐어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똑똑히 봐.”

검 끝을 다시 달려드는 생강시들에게 향하게 둔 채 겹쳐 잡은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리고 잡고 있던 턱도 놨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게 뭔지.”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물러났다.

남소위는 내가 검을 쥐여 준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는 그 등을 지켜봤다.

쿠르릉- 쾅-!

지면의 흔들림이 더욱 강해진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갈라진 벽 틈에서 물이 새어 들어왔다.

“……그런가.”

그 굉음 속에서 남소위가 나직이 말했다. 생각보다 그리 무겁지 않은 어투였다. 침잠한 목소리에 서린 탈력감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검 끝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휘두른 검이 베어 낸 것은 남소위 그 자신이었다.

“여기서 나가거든, 남해검문 문주에게 이 말 하나만 전해 주겠나?”

살짝 고개를 돌린 남소위가 나를 돌아보며 입매를 휘어 웃었다.

“나 ‘남소위’는, ……사해필성 아래에 묻힌 것과 진배없다고.”

“너…….”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일별한 뒤 남소위는 도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바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낙석이 드리운 그림자 안에서 남소위가 검을 옆으로 던졌다.

던져진 검이 벽과 바닥 사이의 어떤 틈에 박히는 순간, 내가 서 있던 바닥이 열렸다. 짧은 통로를 순식간에 지나니 원래 있던 감옥 안이었다.

나와 우사가 처음 갇혀 있던 감옥 안과 연결된 비밀 통로가 있었던 것이다.

남소위는 그 통로를 통해 이쪽으로 넘어와 우사와 싸운 거였다. 싸우던 도중에 기관 장치를 이용해 남여연까지 감옥 바깥으로 쫓아냈던 거야.

나와 우사, 우리 둘 중 한 명의 피만 있으면 되니, 굳이 벅찬 싸움을 할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

나를 노리고 남여연으로 변용한 다음 접근했지만, 중간에 우사가 끼어들어 나 대신 검에 기습당했던 거고.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가 되었다.

무너진 창살을 넘어가, 아까 내가 통과했던 그 부서진 벽 앞으로 다가갔다.

비밀 통로에 빠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본 남소위의 뒷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그가 있던 자리엔 바위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그 주변을 생강시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두 손을 지그시 오므려 꽉 주먹 쥐었다.

남소위에게 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본래는 영면에 들었어야 할 자들인데, 네가 오연의 힘을 빌려 되살렸기 때문에. 그 때문에 영면에서 깨어나 악귀가 된 거지.’

‘오연에게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그자가 빚어낼 수 있는 건 이런 참극뿐…….’

‘…똑똑히 봐. …지금 네 눈앞에 있는 게 뭔지.’

내가 남소위한테 눈앞의 이 참극을 보라고 한 건, 그도 보면 알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견의 여지없이 전부가 베어 마땅한 악[惡]이었으니까.

직접 검을 쥐여 준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남소위는 베지 못했고, 무엇도 베지 않았다.

결국 그가 벨 수 있었던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

자신이 만들어 낸 그 생강시들을, 그 악귀들을 두고서 칼끝을 스스로에게 겨누었다.

속이 무겁게 침잠하며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왔다.

앞의 부서진 벽은 이제 완전히 내려앉아서 다시 들어갈 수도 없다. 답답한 속을 풀 길이 없어서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퍽-

울퉁불퉁한 벽면에 살갗이 갈리며 피가 맺혔다. 바스러진 벽의 잔해가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품에서 우사가 머리만 내밀어 나를 올려다본다.

꽉 주먹 쥐었던 손을 느슨히 풀며 우사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여기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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