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혼란스러움이 조금 가신 몹시도 침잠한 표정으로 남여연은 유계를 변호했다.
알고 보니 수영을 못하는 남여연은 빙옥에서 튕겨져 호수에 빠졌을 때 유계의 도움을 받았고, 그 덕에 겨우 살았다고 했다.
유계가 아니었다면 수영을 못하는 자신은 죽었을 거라며 남여연은 유계의 편에 섰다.
‘하도 얻어맞아서 터진 이 뺨과 나한테 쥐어뜯겨서 너덜너덜해진 저 머리가 그 증거야.’
호숫물을 먹고 정신을 못 차리는 자신을 유계가 뺨을 때려 깨웠고, 그 고통에 깨어난 남여연이 유계의 머리를 잡아 뜯었다는 거였다.
‘그냥 속죄 좀 하겠다잖아. 적당히 아무 보속이나 받으면…….’
‘그럼 남해검문의 법도대로 해. 여기선 소매치기에게 무슨 형벌을 내려?’
성가셔지는 상황에 일부러 남여연의 말을 도중에 끊었다. 고저 없는 내 목소리에 유계는 마치 이끌리듯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생각보다 간절한 눈은, 생각 외로 도발적이었다.
‘제 보속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겁니까?’
그 눈으로 그리 말하는 유계의 모습이 마음에 밟혔다.
그 모습 안에는, 필요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제 안에서 필요를 찾으려 하는 요지부동함이 있었고, 자신의 보속은 하잘것없냐는 물음 또한 있었다.
유계는 성가심을 넘어 내게 거슬렸다. 나를 건드려 흔들었고, 그럼으로써 나를 그 자신의 모습에 투영하게끔 만들었다.
‘제가 우사의 사형이에요.’
제일 처음 떠오른 건 그 말이었다. ‘제가 우사의 사형이에요’, 그 말을 하는 건 내 목소리였다.
환청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꿈에서 봤던 내 모습이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회귀 전의 내가 사학당 앞에서 시위하듯 서 있는 모습이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아서 전부 젖은 상태였다.
‘제가, 우사의 사형이에요.’
고집스럽게 같은 말만 반복하는 그 환청이, 유계의 목소리에 투영되어 겹쳤고 결국 난 침묵을 깼다.
‘그럼 알아서 네 몫을 하든 말든. 방해만 되지 마.’
그 말은 그때 내가 오연한테서 들은 말이기도 했다. 그 뒤로 계속 내 안에 남아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그렇게 소매치기 유계는 우리와 동행하게 됐다. 그리고 막상 동행해 보니 그의 보속은 생각보다 더 많은 도움이 됐다.
선검이 없었기에 어검을 할 수도 없었고, 먼 거리를 허공답보로 이동하기엔 제각각 무공의 경지가 다른 상황이었다.
빙옥에서의 전투 때문에 내 체력도 많이 깎여 있는 상태였고 말이다.
지금 내 몸은 아직 어리고 약했다. 아무리 한 번 경지에 다다른 기억이 있다 해도, 육신은 덜 자란 소년의 몸이었다.
기이하게도 내력은 순간순간 본래 있던 것보다 증폭되었지만, 체력은 아니었다. 고작 검 몇 번 휘두른 것뿐인데 온몸이 근육통으로 뻐근하다.
나는 기진맥진하고 우사는 부상을 입었으며, 남여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우리가 마차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유계의 덕이었다. 게다가 지리까지 알아 마부 역할도 손수 떠맡아 주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지금 마차 안에는 나와 우사, 그리고 남여연뿐이다.
우사는 나와 나란히 앉았고 남여연은 맞은편에서 계속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차에 탄 뒤로 혼자 상념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지며 다시 상태가 심각해진 거다.
“왜 전부 사해필성으로 이어지는 걸까. 형님이 강령술을 하려던 곳도 사해필성이었고, 형님의 유언마저 사해필성을 가리키고 있고. ……대체 왜 전부 다…….”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은 남여연의 목소리는 아주 작아서 신경 쓰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게 계속 끝없이 이어지니, 점점 신경에 거슬렸다.
“……형님은 애초부터 사해필성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으려 했던 걸까? 그래서 자신은 그 아래에 묻힌 거나 진배없다는 유언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남여연은 제 안에서 어떻게든 답을 구하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등받이에 깊이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무슨 자격으로……. 내가 몰랐던 건…, 아니 애초에 왜 그런 유언을……. 나는 형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게…….”
이제 남여연의 말은 띄엄띄엄 들렸다. 반항적인 어투에 알게 모르게 후회가 스미는 게 느껴졌다.
그 자책을 닮은 후회가 거슬려 미간을 찡그렸다.
처음의 남여연은 남소위가 강령술을 펼칠 예정이었던 장소를 찾아가겠다고 할 정도로 그 의지가 뚜렷했었다.
오직 남소위의 위신이 오명으로 더럽혀지기만을 바랐었던 게 몇 시진 전의 일인데. 이제 와서 남소위가 죽길 바란 건 아니었다고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럼 그때의 각오는 대체 뭐였지? 이렇게 금방 무너질 정도로 허술한 거였나.
“…시끄러워.”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며 말했다. 남여연이 퀭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대체 남소위에게 원했던 게 뭔데. 그자가 오명을 쓰길 바랐다며. 위신 높은 선사에게 있어 오명이란 결국 ‘죽음’이나 마찬가지란 걸 모를 리 없었을 테고. 남 공자, 대체 정말 원하는 게 뭐야?”
나는 남여연을 똑바로 보며 냉소했다.
“실은 남소위에게 과하게 어리광이라도 부린 거였어? 나 좀 봐 달라고, 사실은 형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형님을 이해하고 싶다고.”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리며 속에서 뭔가가 치받는다. 남여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가 이내 억눌린 표정으로 어둡게 굳는다.
생각보다 쉬이 발끈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 모습에 더 비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뒤의 말을 이으려는 것과 동시에 남해검문에 처음 들어섰을 때가 떠올랐다. 남해문주 옆에 서 있던 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아연은 저를 이해할 것도 용서할 것도 없습니다. 저 또한 스스로에게 그러하니까요.’
그자는 아마 남소위였을 거다. 그리고 아연은 아마도 남여연의 아명이겠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남소위는 이해도, 용서도 바라지 않은 채 죽었다. 그러니 남여연이 남소위를 이해하려 발버둥 치는 것 자체가 헛짓거리다.
“…이제 와 어쩌겠어. 남소위는 이미 죽었어. 사마외도로써 죽었다고. 죽음으로 완성된 오명이니 남소위의 위신이 회복될 일은 영영 없겠지.”
천천히 뒤의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남여연의 당초 목표는 이뤄진 셈이다.
남여연은 내 말을 끝까지 듣고만 있었다. 입을 꾹 다문 채 깊이 심호흡하는 남여연의 눈가가 차츰 붉어진다. 날 보는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마차 안에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옆에서 우사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시간이 흘러도 적막은 깨지지 않았다. 남여연은 더는 혼잣말을 중얼거리지 않았다. 깊어지는 정적 속에서 나는 느리게 고개를 숙였다. 모은 두 손을 입가에 댄 채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남여연에게 말을 한 방금에도 내 뇌리 한편에는 빙옥에서 봤던 환영이 있었다. 환영인지 망상인지 모를 게 쉬이 잊혀지질 않는다.
나를 내려다보던 우사가 내 목에 겨눈 건 검이 아니라 빗자루였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살기등등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내게 빗자루를 겨누며 비질을 하라고 말하는데, 그 말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린 없잖아.
빙옥에서의 그 기억은 대체 뭘까. 만약 정말 실재했던 일이라면…….
나는 어떤 순간을 마지막으로 회귀한 거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