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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28화 (28/141)

<28화>

“그리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잘 나가다가 남여연이 갑자기 발끈하며 외쳤다. 느닷없이 내게 돌려진 화살에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내 시선을 받는 남여연의 눈시울이 붉다. 두 눈에 고인 눈물이 뺨 위로 후드득 떨어진다.

“내가 속으로 앓든 말든, 어차피 각자 목적 때문에 동행하는 것뿐이면서……. 씨-. 눈물은 또 왜 이렇게 안 멈춰!!”

굵은 눈물이 멈추지 않자 본인도 조금 당황한 눈치다.

그리고 나도 속으로 조금 놀랐다.

남여연의 두 눈에서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재수 없는 자식.”

제 눈가를 벅벅 문질러 닦으며 욕하는 남여연의 눈꼬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까까지의 음울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씩씩대고 있다.

“뭘 봐?!”

맹한 코를 훌쩍이던 남여연이, 갑자기 부아가 치미는지 버럭 소리 질렀다.

예민하게 구는 모습에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두 눈을 감았다. 그래, 내가 눈 감고 말지, 뭐.

시야가 차단되고 주위도 고요해지자, 남여연에게 일방적으로 일갈했던 말들이 되짚어졌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고 나 스스로도 잘 몰랐지만, 아무래도 내심 남여연의 눈물이 마음에 걸렸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미 내뱉은 말을 되새길 리 없다.

눈을 감고 잠시간 침묵하다가,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남여연. 아까 내가 한 말은…….”

일단 입은 열었는데 선뜻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열심히 속으로 할 말을 고르는데 앞에서 느껴지던 기척이 갑자기 사라졌다.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가늘게 뜬 시야에 보여야 할 게 안 보인다.

“……?”

제대로 눈을 뜨고 마주한 맞은편 자리는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백아, …남여연은?”

옆의 우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이기 싫은 쪽이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요. 사형.”

우사가 아정한 자세로 얌전히 답했다.

“그래서… 어디로 없앴는데?”

내 물음에 검지를 들어 위를 가리킨다.

…천장이라. 그래도 마차에서 떨어트리지는 않았네.

“남여연이 가만있을 리가 없는데.”

조용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진짜 제대로 잘 있는 거 맞나?

눈을 가늘게 뜬 채 천장을 유심히 올려다보고 있는데, 우사가 갑자기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붙었다.

좌석에 한쪽 무릎을 댄 채 반쯤 일어선 우사는 한 팔은 내 등허리 뒤로 넣고, 나머지 다른 팔은 내 양 무릎 위를 가로질러 반대편을 짚었다.

나는 어느새 우사의 양 팔에 감싸져 있었다. 그 품 안에 끌어안기기 직전이었다.

바짝 밀착해 온 우사를 보았다. 우사의 시선은 내가 아닌 문 쪽으로 향해져 있었다.

당황하며 뭐라 입을 떼려는 순간, 뒤늦게 내 기감에도 뭔가가 잡히며 천장에서 세게 내리치는 신호가 들려왔다. 우사의 말에 따르면 지금 마차 천장에 있는 건 남여연일 테니, 아마 그가 보낸 신호였을 거다.

다음 순간,

히히힝- 히힝--

말이 길게 울음을 흘리며 마차가 덜커덩 멈춰 섰다.

쿠웅- 털썩.

이어서 육중한 무언가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말의 사체일 거다.

우사는 무표정한 낯으로 문만 응시했다. 여차하면 나만 챙기고 이곳에서 벗어나겠단 의지가 뚜렷하게 보였다.

…나 같은 것도 사형이라고 챙겨 주는 건가.

고맙지만, 그래도 사형이 되어서 사제에게 챙김만 받을 순 없는 노릇이다. 사형에게는 사형의, 사제에게는 사제의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

손을 들어 눈앞에 우사의 어깨를 약하게 밀어냈다. 우사가 바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괜찮아, 백아.”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쓰게 미소 지었다. 우사는 머뭇거리다가 나를 감싸고 있던 팔을 거뒀다.

우사에게서 떨어져 나와 바깥의 기척에 집중했다.

기감에 잡히는 건 남여연과 소매치기까지 해서 도합 여섯이다. 마차를 끌던 말은 이미 죽었다.

쏴아아-.

숲을 뒤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린다. 소리 없는 결전 끝에 여섯 중 넷이 쓰러졌다. 순식간에 끝난 전투였다.

남은 기척 중 하나가 마차로 다가온다. 그게 누구일지 몰라, 앞으로 반걸음 나서며 한 팔을 들어 우사를 보호했다.

우사가 주인공급이란 것도 알고,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도 안다. 알지만, 그래도 어쨌든 나는 지금 그의 사형이다.

‘너도 이제 사제가 생겼으니 사형으로써 더 정진하거라.’

머릿속에 오연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지워지지도, 떨쳐지지도 않는 말이다.

‘우사는 네 사제야.’

‘사형은 사형다워야 한다.’

‘…그래가지고 우사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연아, 정진하거라. 아직 한참 부족하구나.’

‘연아, 정진하거라. 서로 너무 차이가 나니.’

‘연아, 정진하거라. …쓸모없는 짓을.’

‘…본받을 것 없는 사형의 곁에 어느 사제가 남아 있겠느냐.’

‘그 검으론 무엇도 벨 수 없다.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우사를 보거라,’

연이어 떠오르는 오연의 말들이 머릿속을 헤집으며 두통이 일었다.

미간을 찡그리며 불쑥 치밀어 오르는 어떤 감정을 짓씹었다. 그러다가 문득 헛숨과 함께 그 감정을 꾹 억눌러 내렸다.

이 갑작스러운 환청이 조금도 놀랍지 않다는 게 새삼 인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런 환청을 아주 오랫동안 아주 많이 들었다. 특히 오연이 죽고 우사와 절연한 뒤론 더욱 심각해졌다.

…그 말대로 정말 우사와 절연했으니까.

오연의 잔소리가 결국 예언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 병증이 회귀 이후까지 이어지는 건 아마, 오연의 잔소리가 인이 박인 탓도 있을 테고. 그리고…….

‘…본받을 것 없는 사형의 곁에 어느 사제가 남아 있겠느냐.’

“…….”

우사의 앞을 가로막은 팔의 손끝을 천천히 오므려 꽉 주먹 쥐었다.

“…사형?”

뒤에서 들려오는 우사의 말을 무시하며 문만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내 주먹 쥔 손을 감싸 오는 손길에 흠칫 놀라며 우사를 돌아봤다.

내 주먹 쥔 손은 우사의 포갠 두 손 사이에 감싸여 있었다. 나는 내 주먹에서 시선을 올려 우사를 봤다. 자신이 감싸 쥔 내 손을 내려다보는, 그 내리뜬 눈의 긴 속눈썹을 보았다. 우사의 표정 없는 얼굴엔 묘한 삭막함이 흐르고 있었다.

“손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요.”

“…아.”

우사의 말에 침음하며 천천히 손을 폈다. 손바닥에 반달 문양의 상흔이 나 있다. 손톱에 눌려 찍힌 거다.

당황하며 도로 주먹을 쥐려 했다. 일단 우사가 눈치채지 못하게 감출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사가 먼저 손깍지를 껴 버렸다. 그러곤 날 물끄러미 바라본다.

지나치게 올곧은 그 시선에 순간 사로잡혀, 방금까지 나를 갉아먹던 감정들을 잠시 잊었다.

“사형.”

영원 같은 찰나를 깨며 우사가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우사가 바라보는 방향은 문 쪽이었다.

그, 그래. 누가 문으로 들어오려고 했었지.

빠르게 제정신을 차리며 우사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내공이 운공되며 손끝에 서린 기가 폭발적으로 쏘아졌다. 마차 문이 순식간에 부서지며 그 너머에 있던 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우아악-!”

목소리의 주인은 남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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