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우사의 너머로 남여연이 보인다. 남여연은 한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쥔 채 우사를 맹렬히 노려보고 있었다. 남여연의 눈매가 점점 사납게 위로 치켜 올라간다.
요지부동으로 서 있던 우사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사뿐사뿐 뒷걸음질 치더니 그대로 빙글 몸을 돌려 내게 달려왔다.
“사형.”
우사가 내 뒤에 숨은 것과 동시에 남여연이 이를 갈며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런 그를 가만히 서서 주시했다.
나한테 직접 와 주니, 덕분에 내가 갈 수고를 덜었다.
“비켜. 저 자식이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내 뒤의 우사를 삿대질하며 남여연이 말했다. 그 손등이 검붉게 부어 있다.
“그 전에 나랑 먼저 할 이야기가 있지 않아? 남여연 너, 애초부터 남해검문 문주가 이렇게 나올 거란 거 알고 있었지?”
남여연의 손등 상처를 일별하고 등 뒤의 우사를 슬쩍 쳐다본 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한테 먼저 와 남소위의 생사를 확인한 뒤에, 곧바로 우리와의 동행을 원했던 거겠지. 너는 남소위의 죽음을 남해검문에 알리지 않은 게 아니라 알릴 수 없었던 거야. -하기야, 이렇게 바로 추격이 따라붙을 정도였으니.”
비약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그럴싸한 추론이 있었다.
우선 남여연은 남소위의 위명을 떨어트리기 위해 우리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유계는 잡혀 온 직후부터 남여연으로 위장되어 갇혀 있었다.
이 두 사실은 결국 모든 일을 꾸민 게 남여연임을 가리키고 있다.
남여연은 우리에게 접근해 남소위의 위명을 떨어트리고자 할 때부터 다른 누군가의 추격으로부터 시간을 벌 속셈이었던 거다. …그건 아마 높은 확률로 남소위였겠지. 오연의 혼 조각을 가지고 있던 나머지 한 사람이 남소위였으니까.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남소위가 죽음을 맞이했고, 현재 남여연을 추격하는 자들은 남해검문이 되었다. 그건 둘 중 하나를 뜻한다.
전자는 남해검문이 통째로 오연의 혼 조각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는 그들이 보기에 남여연이 남소위를 해할 만한 마땅한 동기가 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남해문주가 신원미상인 우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랑(둘째아들)부터 쫓을 리 없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 추격의 이유는 후자다. 남여연을 쫓아온 남해검문 선사들에게서 회유의 기색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남여연을 도로 모셔가려는 시도는커녕, 싸울 때도 거침이 없었다. 오죽하면 마차 안에서 저들을 잠시 살수라 착각했을 정도다.
내 말에 남여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사를 향해 삿대질 중인 손끝만 움찔 떨렸다. 그 반응이 나타내는 건 결국 하나였다. 내가 추측한 게 정답이란 거다.
“첫째 아들이 죽었다고 바로 선사들을 보내 둘째 아들을 추격하는 아버지라니. 네가 언젠가 반드시 남소위를 해칠 거란 확신이 남해문주에게 있었단 뜻이겠지.”
“확신?”
남여연이 비소했다. 나는 그런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저 선사들은 널 쫓아온 거잖아. 그것도 즉결처분하러. 남해검문의 추격은 남해문주의 뜻이니, 결국 문주는 네가 남소위를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에 대한 해명도 필요 없어 한다는 반증…….”
“당연하다고? 난 처음부터 형님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뭐가, 형님의 죽음 어디가 당연하단 거야?!”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남여연이 말했다. 치미는 무수한 감정을 한껏 억누른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남여연이 삿대질하던 손을 천천히 내리며 꽉 오므려 주먹을 쥐었다.
“내가 바란 건 동귀어진이 아니야. …동귀어진. 빌어먹을. 그 시체들과 형님이 동귀어진했다는 게…, 내가, 내가 그런 걸 바랐을 거라고? 하-.”
헛웃음을 짓는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흔들린다. 말을 잇는 남여연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내 형님은 완벽했어. 흠이라곤 하나 없는 군자였고, 그런 형님은 내 영웅이었어. 멋있고 완벽한 정말로 자랑스러운 형님이라, 나는 언젠가 형님이 만인이 찬탄하는 천하 영웅이 될 거라 예상했어.”
두 손을 꽉 주먹 쥔 채 남여연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예상대로 형님은 세상이 알아주는 영웅이 되었지. 빙옥의 그 시체들이 형님의 출셋길을 닦아 줬거든.”
“빙옥의 그 시체들이 누군데?”
내가 물었다.
남여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제 발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 차츰 눈물이 고인다.
“예전에… 정소양을 납치했다는 사마외도들…….”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남여연이 읊조렸다.
‘정소양’이면… 현재 사해필성의 성주다.
“…빙옥은 단순한 지하 감옥이 아니야. 그곳에 그렇게 기관 장치가 많은 건, 형님이 전리품들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해서야. 형님의 명성을 높여 주는 데 일조한 모든 게 그곳에 있지. …그 시체들 또한 그렇고.”
잠시 말을 멈춘 남여연이 깊이 심호흡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몹시 괴롭다는 듯 눈썹이 한껏 찡그려져 있다.
곧 남여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시체들은… 남소위가 몰살한 일가야. 그래도 나름 검에 일가견이 있는 가문이었다던데… 남소위는 그들을 전부 죽이고 그 시체들을 가져왔어. 거긴 그런 전리품을 전시하는 곳이니까. 그래, …그래서였을 텐데. 그래서였을 거야. 그래서일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 ‘전리품’들이랑 동귀어진을 했다고?”
말을 이으며 남여연이 이를 악물었다.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빨갛다.
결국 남여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금까지 남여연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건, 그가 남소위에게 갖고 있는 깊은 감정의 골이 저 ‘전리품’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거다. 그게 곧 남소위의 위명을 떨어트리려 한 이유와 이어진다면.
그리고 이를 남해문주도 알고 있다면, 남소위의 죽음을 자연스레 남여연의 짓이라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되레 당연한 것이다.
그 ‘전리품’이 있던 빙옥이 무너지고, 남소위는 그곳에서 죽었으니까.
남여연이 남소위의 죽음을 알자마자 사해필성행을 고집한 것도 이제 이해가 된다.
남소위가 죽기 직전 ‘사해필성’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와 함께 동귀어진한 ‘전리품’까지 사해필성과 관련 있었으니까.
결국 모든 해답이 사해필성에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한 가지 의문이라면, 남소위는 왜 그런 장소의 출입을 남여연에게 허락했을까. 남여연은 빙옥의 기관 장치에 익숙해 보였다. 자주 드나들었단 방증이다.
남소위가 ‘전리품’과 관련된 사연을 몰랐을 리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이미 죽은 망자의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남여연은 아예 숨을 죽이며 울기 시작했다.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숨을 최대한 삼켜 가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야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한참 어린 동생이 저렇게 울고 있으니 그냥 보고만 있기가 좀 그렇다.
평소 남여연의 인상이 아무리 별로였어도, 이런 때에 개인적 사감에 휘둘릴 정도로 어리진 않다.
결국 무거운 숨을 내쉬며 남여연에게 다가갔다. 떨고 있는 어깨를 한 팔로 가볍게 끌어안아 토닥였다. 남여연의 몸이 잠시 경직되긴 했지만 날 밀어내진 않았다.
울음이 좀 그쳤다고 생각될 때쯤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남여연도 대충 진정된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다. 의문이 전부 가신 건 아니지만 들어야 할 말도 어느 정도는 들었고.
더 다그칠 생각은 없었다. 이후는 알아서 감정을 추스르게끔 내버려 두고 뒤돌았다.
돌아선 뒤에는 우사가 있었다. 자연히 서로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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