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내 형님은 지극히 아정한 군자이시라.”
구태여 비아냥대는 남여연의 낯이 일순 흐려진다. 붉게 충혈된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남여연은 깊이 심호흡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스스로 먼저 유계에게로 걸어갔다.
곧 유계의 앞에 마주 선 남여연은 잠시 멈춰 섰다가, 제 어깨로 유계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지나쳤다. 몇 발자국 내딛지 않아 남여연이 다시 멈춰 섰다. 서로 등을 지고 선 형상이 되었다.
“……말해 두는데, 나 대신 죽게 할 생각은 없었어.”
먼저 입을 뗀 건 남여연이었다.
“정말 대신 죽게 만들 생각이었으면 분장의 코 부분을 삐뚤어지게 붙였을 리 없잖아.”
그 말에 유계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남여연을 바라봤다. 때마침 남여연도 비스듬히 몸을 돌려 유계를 마주했다.
유계와 시선을 마주하며 남여연은 손끝으로 제 코를 툭툭 쳤다.
“…….”
유계는 남여연을 일별한 뒤 이어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자신을 향해 돌아서 있는 남여연의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짚었다가 뗀 뒤, 그 곁을 지나쳤다.
“옷부터 갈아입는 게 좋겠습니다, 남 공자.”
그렇게 유계와 남여연은 선사들과 옷을 바꿔 입으러 가 버리고, 나와 우사만 남았다.
“……백아.”
우사를 부르며 그를 돌아봤다. 내 옆으로 와 서 있는 우사가 나를 마주 본다.
“네, 사형.”
그 순한 대답에 쓰게 미소 지었다가,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지금 하려는 말의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바로 말을 잇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선 결단이 내려진 상태였다.
한 번 내린 결단을 무를 생각은 없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나는 사해필성으로 갈 거야. 오연과 관한 건 거기서 전부 끝낼 생각이야.”
내가 말했다.
오연을 죽인 걸로 그치지 않고 그 영혼마저 완전히 소멸시키겠단 뜻이었다.
“내가 너한테 묻지도 않고 같이 거래의 대가로 걸어 버렸지만,”
말을 잇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주저했다.
그땐 몰랐는데 이제 와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우리를 한 세트처럼 여기고 있었다. 당연하단 듯 나와 우사를 한데 묶어 버렸고, 그에 대한 거리낌도 없었다.
“…우리가 한 몸인 것도 아닌데, 내가 너무…….”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우사는 말없이 날 바라보기만 했다. 그 시선 속에서 뒷말을 마저 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나 봐. 하지만 넌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돼.”
멋쩍기도 하고 한편으론 민망하기도 하다.
날 보는 우사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이내 눈매가 가늘게 호선으로 휘었다.
“…네, 사형.”
나직한 대답은 짤막했다. 우사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섰다.
“저 역시 그래요.”
우사가 대답했다.
“함께 사해필성으로 가요, 사형.”
‘함께’하잔 말에 순간 고맙다는 말과 함께 미안하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이 좋은 길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한때 스승이었던 자를 영혼까지 소멸시키려는 길이다. 그런 곳에 하나뿐인 사제를 동행시켰다.
나만 보는 우사를 마주 바라보다가 미안하다는 말은 그냥 삼켜 버렸다. 왠지 지금의 이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는… 좋은 사제야.”
그래서 미안하단 말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고마워, 백아.”
-04
지면으로부터 까마득한 창공. 나란히 비행 중인 선검 세 자루 중 하나엔 나와 우사가 함께 있다.
우사가 내 앞에 섰고, 나는 그 뒤에 일렬로 선 형상이었다. 그 때문에 바람에 날리는 우사의 머리카락과 흔들리는 옷자락이 내게 닿았다. 그 모습이 선연해, 잠시 바라보다가 등 뒤에서부터 두 팔을 뻗었다.
그대로 우사의 허리를 느슨하게 감싸 안으며 풍겨 오는 체향이 청아하다고 생각했다.
우사를 안은 내 팔은 우사의 허리에 닿을 듯 말 듯했다. 그래서 안았다기보단 내 두 팔 안에 우사를 가뒀단 느낌이 더 강했다. 놀이동산의 안전벨트처럼 걸치기만 한 수준이었다.
“……꽉 안아 주지 않으니까 불안해요.”
우사가 두 손으로 내 양팔을 잡아 조심스레 당겼다. 그 바람에 내 몸이 우사의 등에 밀착됐다. 내 팔을 쥐고 있는 우사의 손은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첫 비행이라 많이 긴장했나 보다.
하기야 원래대로라면 인간의 모습으로 변용도 잘 못 하고 있을 때다.
긴장 풀란 의미로 우사의 허리를 꽉 끌어안아 줬다. 그러자 굳어 있던 손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힘이 풀린다. 뒤이어 우사의 등에 내 머리를 기댔다.
이제야 긴장이 풀렸나 보네.
나는 가는 숨을 내쉬며 시선을 들어 앞을 응시했다. 앞서가고 있는 남여연과 유계가 보인다.
현재 우리는 사해필성으로 향하는 중이다. 우리 중 어검을 못하는 이는 우사뿐이었다. 유계도 어검은 처음이라 했지만 그래도 곧잘 했다. 일개 소매치기의 능력이라기엔 짚고 넘어갈 부분이 많지만 우선은 그냥 두기로 했다.
우사는 검 위에서 중심을 잡는 게 어려운지 처음에 지상에서 연습할 때부터 연신 비틀거렸다. 그래서 결국 내 선검에 태우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그때 남여연이 그런 우리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씰룩이다가 뭐라 말하려 했었다. 그 타이밍에 유계가 남여연의 발등을 밟아서 듣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때 유계의 행동은 실수라 치기엔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성큼 다리를 내뻗어선 대놓고 밟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힘을 줘서 밟는데 어딘가 사감마저 느껴졌었다.
‘아. 실수.’
담담한 목소리로 낮게 읊조리며 유계가 발을 치웠고, 드러난 남여연의 목화(신발)에는 신발 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남여연 본인이야 제 발이 밟히는 광경을 직접 목도하진 못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계의 고의적인 낌새를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남여연이 유계의 멱살을 잡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여연은 곧바로 유계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주변이 난장이 되었다. 그땐 이미 남여연 본인도 하려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잊은 눈치였다. 이목이 몽땅 유계에게 쏠린 탓이었다.
그래서 남여연이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 끝내 듣진 못했지만, 그렇다 해서 예상 못 할 것도 아니다.
우사에게 마음을 쓸 때만 유독 무른 구석이 많아진다는 걸 나도 아니까. 나도 내가 우사에게 잘해 주고 있단 걸 안다. 실제로 정말 잘해 주고 싶기도 하고. 왜냐하면 이게 회귀 전부터 내가 되고 싶었던 사형의 모습이니까.
기왕지사 사형제지연이 이어지고 있는 거, 내가 보기에 썩 괜찮다 싶은 그런 사형의 모습으로 있고 싶다. 그리고 보편적으로도 악질보단 좋은 사람이 되는 게 더 나으니까.
또, 지금 이렇게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도 다 나름 생각이 있어서다.
내 생각에 자전거나 어검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일단 균형이 가장 중요하단 점에서 말이다. 그러니 내가 자전거를 배웠던 방법으로 가르쳐 볼 생각이다.
일명 ‘사형 있다, 사형 있다… 사형 없다!’
나도 그렇게 자전거를 배웠단 감상이 있다. ‘꿈’을 꾸면서 떠오른 잔흔들 속 하나의 감상이라 흐릿하게 잔영으로만 남아 있지만 대략적인 건 알고 있다.
뒤를 굳게 잡아 주고 있다고 방심시킨 뒤에 남몰래 손을 놓으면, 알아서 잘 굴러가는 거잖아.
그걸 우사에게 적용시켜 보면 괜찮을 것 같다.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슬며시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놔 볼까?”
우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을 풀려고 했다. 그런데 꼼짝도 할 수 없다. 우사가 선력으로 잡고 있는 거다.
“…백아?”
“……사형이 절 놓으면…, 저는 떨어질 거예요.”
……역시 아직 무서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내가 같이 있어 줄 순 없다. 이제 혼자 있는 법도 익혀야지.
“괜찮을 거야. 자, 선력 풀어. 어서.”
최대한 상냥하게 얼렀다. 잠시 후 양팔이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걱정 마, 백아. 아예 놓진 않을 테니까. 지금부터는 옷자락을 잡고 있을게. 내가 계속 여기 있을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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