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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34화 (34/141)

<34화>

“……정말 계속 잡고 있을 거예요?”

“응. 당연하지.”

“…….”

“약속할게.”

시원스럽게 대답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믿을게요, 사형.”

앞에서 들려오는 우사의 온유한 목소리에 순간 찔리긴 했지만, 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사를 위한 일이다.

어검을 잘 타게 되면 내 덕이라고 고마워할 거야.

한 손으로 우사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 그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반듯한 뒷모습이 참 단정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우사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내게 닿는다. 맑은 향기가 은은하다. 그 은근한 고아함 속에서 우사의 아정한 풍모를 바라봤다.

계속 느끼던 건데, 우사한테선 정말 좋은 냄새가 난다. 따로 향수를 뿌렸을 리는 없을 테니, 타고난 체향이겠지.

나도 모르게 우사의 등에 다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빙옥에선 너무 추워서 미처 몰랐었는데, 체향이 진짜 좋다.

그러고 보니 늪지대에서 꼬질꼬질할 때도 풍기는 기운만은 청아했었지.

아무 생각 없이 코를 킁킁거리다가 무심코 시선을 올렸다. 시야 가장자리로 우사의 새빨개진 귓불과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제야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자각됐다.

등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다니. 의도치 않게 나온 행동이라 하더라도 엄청 실례되는 짓이다.

민망함에 나까지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오른다. 당혹스럽다. 아니, 일을 저지른 게 나이긴 한데……, 진짜 내가 왜 그랬지.

속으로 끄응- 앓으며 일단 얼굴부터 뗐다.

“…좋은, 냄새가 나서…….”

“…….”

간신히 내뱉은 변명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기분이 많이 나빴나?

한 손을 들어 내 목덜미를 매만지다가, 지금 이 손이 방금까지 우사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다 보니 놓게 됐네. 우사도 별 반응이 없고. 아직 내가 놓은 줄 모르는 건가.

우사의 등을 힐끔 보며 뒤로 조금씩 몸을 물렸다. 생각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어검 가르치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어검만 완벽히 가르쳐 주면, 방금의 내 추태는 그 공적에 자연히 가려질 거다. 그러면 실추된 내 이미지 또한 회복될 테고 말이다.

가르침의 마지막은 내가 이 검에서 내려가는 것이다.

결국 자전거도, 어검도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는 걸로 마무리 지어지니까.

아직까지 검 위에 잘 있는 우사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저를 놓으면 자신은 떨어질 거라고 했지만, 역시 떨어지지 않고 잘 있다.

그래, 안 될 것 같아도 결국은 괜찮아지는 거다. 굳이 내가 붙잡지 않아도 우사는…….

다른 데에 정신이 팔린 채로 계속 뒤로 몸을 물리다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뎠다. 여기가 공중이란 걸 잠시 망각한 탓이다.

중심을 잡을 새도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뒤로 넘어지며 추락했다.

떨어지며 반사적으로 뻗은 팔의 끝엔 잡지 못한 우사의 뒷모습이 있다. 여전히 어검 중인 우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래, 그때도 결국 떨어지는 건 나였어.

문득 이상한 기억이 떠오른다. 잔뜩 노이즈가 낀 기억 속의 나는 지금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올려다본 벼랑 끝에는 내게서 등을 지고 서 있는 우사가 있다. 어깨에 두른 짙은 적색의 망토가 바람에 사납게 펄럭인다.

‘가.’

머릿속에 우사의 목소리가 울린다. 기억 속 환청이다.

노이즈가 낀 기억 속 우사가 비스듬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역광 때문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섶에 묻은 피는 선명했다.

우사는 한 손에 쥐고 있는 검을 고쳐 잡으며 곧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벼랑 안쪽으로 가 버린 거다. 동시에 머릿속에서 우사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안 찾을게.’

그 환청을 끝으로 노이즈가 낀 기억이 흐려진다.

대체… 방금 그 기억은 뭐지?

빙옥에서 떠올린 ‘빗자루 기억’에 이어 두 번째다. 게다가 마냥 망상이라고만 치부하기엔 이상하리만치 현실감이 있었다. 정말 내 기억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내가 ‘꿈’에서 본 건 우사와의 재회 순간까지다. 그런데 그 재회 순간에 내 목에 드리워졌던 게 검이 아니라, 빙옥에서의 기억처럼 빗자루였다면, 나는 그때 죽은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 ‘꿈’이 회귀 전의 생을 전부 다 보여 준 게 아닌 건가?

‘꿈’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회귀한 게 아니라면 내가 모르는 기억이 더 있었다는 게 된다. 우사와 재회한 순간 이후의 시간들이, 내가 모르는 그 기억들이 더 존재했었던 게 되는 거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함께였을까.

내가 ‘꿈’에서 더 보지 못한 그 시간들 속에서 말이다.

노이즈 낀 기억에 한눈팔린 사이에 검 위에 있던 우사가 사라졌다. 하늘엔 검 혼자만 덩그러니 허공을 비행하고 있다.

“…백아?”

내 물음에 답해 오듯 무형의 힘이 나를 잡았다. 덕분에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멈추었다. 이어서 등 뒤로 두 팔이 뻗어와 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 품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위로 젖혔다. 날 안은 게 누구인지 알지만 그래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코끝을 스치며 우사의 턱 부근이 눈에 들어왔다. 우사도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럼 방금 내 코끝에 스친 게 우사의 입술인가?

우사의 단정한 입매가 살짝 벌어졌다가 이내 꾹 다물어지더니, 짧은 침묵 끝에 조심스럽게 달싹여 나를 불렀다.

“…사형.”

“…어?”

“괜찮아요?”

“…어. 응. …백아, 너는?”

두루뭉술한 물음이었지만, 괜찮지 않을 것도 없으니 무심코 답하며 되물었다. 그러자 우사의 입매가 단정하게 다물린다. 곧 입꼬리 끝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리며 내 물음에 답했다.

“저는…, 전부 다.”

허공에서 홀로 비행 중이던 선검이 내 부름에 답해 우리에게로 쇄도해 왔다. 그 검 위에 다시 올라탔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처음과 정반대였다.

안긴 건 나였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우사의 팔을 보다가 문득 말문을 뗐다.

“백아. 아까 전에 ‘전부 다’라고 한 거…, 진짜 전부 다 괜찮다는 거야?”

“네, 사형.”

우사가 얌전히 답했다.

“…하지만 너무 하나로 뭉뚱그렸잖아. 나는 그 ‘전부 다’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앞으로는 하나씩 따져서 말해. …그렇게 뭉뚱그리면, 괜찮지 않은 어느 하나가 속에 남을지도 모르잖아.”

“……설령 그렇다 해도 어차피 오래 남지 못하고 사라질 테니… 사형, 언제나 저는 이미 괜찮아져 있을 거예요.”

“그러니 더더욱 이제부터는 말해. 오래 남지 못한다 해도, 어쨌든 남긴 남는다는 거잖아.”

“…….”

“내가 네 속을 알기도 전에, 네 안에선 괜찮지 않은 것들이 쌓이고 사라진다는 건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아. …너 혼자 감내하지 말고 나도 알려 줘, 백아. 그래야 내가 너를 알지.”

“……사형이 원한다면 말할게요.”

어딘가 미심쩍은 어투에 곧바로 반문했다.

“백아. 혹시 전부 괜찮다는 게, 내가 너를 아는 것 자체가 꺼려져서 그런 거야?”

내 조심스런 물음에 우사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안의 상념들을 사형이 알게 되면, 사형의 눈에 제가 더는 좋은 사제로 비치지 않게 될까 봐 저어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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