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39화 (39/141)

<39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며 의원이 말했다.

큰 키의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의원은 아까 방에 있던 이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다. 특이점은 의원이란 직책과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차림새였는데, 표독스런 인상과 잘 어울렸다.

문제는 너무 잘 어울려서 어딜 봐도 평범한 의원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나저나 문곡이란 이름이 어딘가 낯이 익는데. 그것도 아주 많이 익숙한 느낌이다.

“……문곡.”

입안으로 한 번 되뇌어 보며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며 좀처럼 안 났기 때문이다.

“아는 이에요?”

백아가 살짝 허리를 숙여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곁눈으로 본 백아는 내가 아닌 문곡을 직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백아가 바로 나와 눈을 맞춘다. 나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은 뒤 다시 문곡을 봤다.

그는 단정히 서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저 얌전한 모습이 본성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표독스런 인상은 둘째 치고, 그 ‘문곡’이란 이름이 내게 굉장히 구린 이미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문곡, 문곡……. 정말 구리게 낯익은데. 회귀 전에 너무 스치듯 들어서 그런가. 그때는 내 코가 석 자라서 남 얘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워낙 날림으로 들었어야 말이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제대로 귀 기울일걸.

뒤늦은 후회를 하며 문곡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쨌든 진단받겠다고 불러 세워 둔 상태니 말이다. 손목의 맥을 짚어 보는 정도면 되겠지.

아래로 흘러내린 넓은 소매를 다른 손으로 받치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의원… 나리.”

부를 호칭을 고민하다가 그냥 ‘나리’라고 불렀다. ‘대협’, ‘공자’, ‘선생’ 등등 많은 단어가 머릿속에서 오갔지만 ‘나리’가 그중 가장 무난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게 존칭은 안 쓰셔도 됩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며 문곡이 다가왔다. 내가 내민 손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잡아 엄지로 손목 안쪽을 지그시 누른다. 맥을 짚는 방법이 다소 거칠어 잠시 놀랐다.

문곡은 그 상태로 맥을 가늠하더니, 곧 손을 떼며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맥을 짚어 본 결과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다소곳이 서서 공수하며 문곡이 말했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실제로 아무 이상도 없고 말이다. 잊혀진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며 그 여파로 잠시 기절했던 것뿐이니까.

“다만, 심신에 피로가 쌓였으니 약재를 한 첩 지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문곡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그 지나치게 깍듯한 태도가 아까 의원들의 태도와 맞물리며 새삼 의아함이 들었다. 왜들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거지? 손님을 대하는 공손함이라기엔 과한 면이 있다.

게다가 아까 문곡이 나보고 ‘귀인’이라고도 했고. 그냥 인사치레라기엔 뭔가 좀 걸린다.

살짝 고개를 돌려 백아를 돌아봤다. 어쨌든 저 겸공한 태도의 근본적 대상은 백아였으니 말이다. 의원들의 저자세를 당연하단 듯 내려다보던 백아가 이 의문의 답을 갖고 있을 거다.

내가 문곡에게 귀인 소리를 듣는 건 내가 백아의 사형이어서 일 테고. 내가 백아의 사형이기에 따라오는 대접이라면, 이 대접은 내 것이 아니다.

결국 문곡의 귀인은 내가 아닌 백아란 거지.

이런 걸 호가호위라고 하던가. 하지만 난 사제의 그늘 아래에서 호기를 부릴 생각 따윈 없는데. 이 위세가 달갑지 않다.

가슴 안쪽에 엉기는 감정 하나가 내 숨통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기분이다.

“…별다른 이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게 아니라?”

마침 등 뒤로 백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팔짱을 끼고선 뒤를 돌아봤다.

백아는 분명 무표정한 얼굴로 문곡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무표정했던 얼굴에 온유함이 흐른다.

“알지 못하는 걸 없는 것과 혼동하는 군상이 더러 있다 듣긴 했지만. …제 불찰입니다, 사형.”

백아가 나를 보며 울적한 목소리로 고했다. 이미 문곡을 ‘그런 군상’으로 단정 지은 어투였다. 나는 코끝으로 숨을 내쉬며 도로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불찰? 무슨 불찰 말입니까?”

문곡이 내리깔았던 시선을 슬며시 들며 반문했다. 다소 날카로운 어투엔 본연의 성질이 묻어 있었다.

“맥을 짚어 본 결과 별 이상은 없었습니다. 사해필성 내의 어느 의원에게 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하.”

“덧붙이자면, 제가 사해필성 내에 제일가는 의원입니다.”

문곡이 똑똑히 말했다.

“제일가는 의원인지 아닌지는 두고 볼 일이고. 이곳이 칭호에 후한 곳이란 것 하나는 확실히 알겠네. 아, 혹 그 칭호가 자화자찬은 아닌지?”

백아의 날 선 비꼼에 문곡이 공수 자세를 풀곤 눈매를 사납게 찡그린다. 백아를 노려보는 그 모습이 자못 흉흉했다.

백아가 내 쪽으로 비스듬히 상체를 숙여 온 건 그때였다. 시야 가장자리로 옆모습이 비쳤다. 백아는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문곡을 보고 있었다. 그 옆얼굴이 몹시 냉담하다.

“사형.”

백아가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는 정면에 둔 채 슬쩍 시선만 돌려 곁눈으로 백아를 봤다. 문곡을 일별한 백아가 나를 돌아본다. 내게 고개를 돌리는 그 찰나에 얼굴에 서려 있던 냉담함이 온유하게 풀린다.

“사형에겐 의원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타고나길 진신(요, 마, 귀, 신선의 영혼)인 저로는 사형의 상태가 어떤지 확실히 알아내는 데 부족함이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백아가 내 귓가에 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가라앉은 목소리는 쓸쓸함을 띠고 있었다.

진신과 본신. 이는 영혼을 칭하는 말이다.

인간의 영혼은 ‘본신’이라 하고, 요, 마, 귀, 선인들의 영혼은 ‘진신’이라고 한다. 본신과 진신은 그 본원이 다르다고 배웠다. 이는 그 신체에도 영향을 끼쳐서 ‘인간’과 ‘요, 마, 귀, 신선’은 서로 달랐다.

백아는 ‘그 다름’을 염두에 두고 의원을 찾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같은 사람이 봐야 잘 알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제가 맥을 짚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결국 결론은 남에게 맡길 바엔 본인이 하겠다는 거다.

의원의 진단에 예민하게 굴던 방금 전의 백아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앞으로도 이런 시비에 휘말릴 것 같은 직감이 강하게 든다.

그럴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백아에게 맡기는 게 낫겠지. 그래, 그 편이 여러모로 낫겠다. 어차피 나한테는 아무 이상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이후에도 내 맥은 너만 짚는 걸로 해.”

내 말에 백아가 느리게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엷게 미소 짓는다. 만족스런 눈치다.

그런 백아를 보다가 순간 문곡이 생각났다. 우리가 지금 누구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지 말이다. 현역 의원을 앞에 두고 이런 대화라니. 무례도 이런 무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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