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뒤늦게 눈치를 보며 곁눈으로 문곡을 살폈다. 정말 그럴 의도는 없었다. 그런데 대화를 하다 보니 대화 흐름 자체가 방금 맥을 짚은 문곡에게 많이 결례인 방향이 되었다.
문곡은 이제 공손함은 완전히 집어치운 태도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직접 맥을 짚어 봤자 제가 내린 진단과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문곡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에 백아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간다. 나와 시선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반대편 입꼬리도 호선을 그리며, 양 입꼬리가 완벽한 대칭을 그렸다. 근사한 미소였다. 날 보는 눈빛이 깊다.
“그럼 사형, 제가 지금 사형을 읽어도 될까요?”
“…맥을 짚는단 게 아니라 읽는다고?”
“제 나름 맥을 짚는 방식이에요. 걱정 마세요, 사형. 사형이 허락하는 만큼만 읽을 테니.”
백아의 얼굴에서 차츰 미소가 가시며 눈빛이 진지해진다. 나도 덩달아 진중해졌다. 일단 백아의 말에서 걸리는 게 많았기 때문이다.
‘맥을 짚는다’를 ‘읽는다’로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제 나름 맥을 짚는 방식’이며 ‘허락하는 만큼’이라니. 여러모로 수상쩍으면서 왠지 모르게 감지되는 불온함에 경계심이 확 들었다.
“허락하는 만큼이라니, 아니, 잠깐만, 대체 뭘 어떻게 읽겠다는…….”
점점 가까워지는 백아의 얼굴에 뒤로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그런 내 위로 백아가 올라탄다. 의자 팔걸이에 한쪽 무릎을 살짝 걸친 채, 한 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잡는다. 내 몸 위로 겹쳐 오는 터라 뒤로 한껏 몸을 젖혔다.
백아의 머리카락이 내 위로 스르륵 흘러내린다. 은근한 체향이 고아하다.
아니, 잠깐만…!
스스로도 과하게 허둥댄다는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정말 너무 당황스러웠다. 백아가 느리지만 꾸준히 계속 몸을 밀착해 왔기 때문이다.
“…괜찮아!”
짧게 헛숨을 삼켰다가 뱉으며 말했다. 일단 급한 대로 외친 거다.
이제 당혹감은 둘째 치고, 좀 전부터 심장이 이상하게 울렁거린다. 아프게 죄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두근거리며 요동치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저 의원의 말대로 재차 맥을 짚어 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을 거고. 그러니까 괜한…,”
이어서 재차 빠르게 말하다가 끝에서 멈칫했다. ‘괜한’이란 말이 입안에서 가시처럼 걸렸기 때문이다.
“……괜한 걱정이야. 난 괜찮으니까.”
그럼에도 기어코 뒷말을 내뱉었다. 말을 내뱉은 건 난데, 덩달아 기분까지 저조하게 가라앉는다.
“…사형이 제게 매번 괜찮다고 하는 건, 제가 사형에게 이미 괜찮아져 있는 것과 같은 건가요?”
백아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난날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날 바라보는 백아의 시선이 침착하다. 하지만 잘게 일렁이는 눈빛까지 숨길 순 없는지, 그 침착함 너머로 동요하는 마음이 보였다.
나는 그런 백아를 멍하니 응시했다.
백아가 내게 늘 이미 괜찮아져 있는 건, 나를 붙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내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마음을 숨기고 삭이는 거란 걸 안다.
그리고 내가 매번 네게 괜찮다고 하는 건, …네가 날 위하는 게 꺼려지기 때문이다.
네게 변변찮은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건 없으니까.
깊이 감춰져 있던 응어리진 말들이 삽시간에 무수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기다렸단 듯 일제히 떠오른 그 말들은 전부 내 내면의 목소리였다.
네가 내 걱정하는 게 싫어.
나는 네 사형이야.
내가 너무 부족하게 느껴져서.
날 좀 더 믿어 줘.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될까.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나는 네 사형인데.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 혼자 그렇게 잘났어?
나도 널 위하고 있어.
그렇게 부족해 보여?
네가 뭔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나는… 네 사형이야.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마.
스승님도 너만을 위하고 아꼈지.
나는 이렇게 발버둥 치고 있는데 너는…….
…네 존재 자체가 날 비참하게 만들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말들이 벅차다.
순간 크게 숨을 삼켰다. 그 말들에 스며든 질투와 번민, 그리고 열등감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내 안에 너무 깊이 뿌리박힌 탓이다.
단애약수로 마음을 지웠음에도 도무지 초탈해질 수가 없다. 이미 오래전에 나를 집어삼켜, 나 자체가 되어 버린 감정이기 때문일까.
이건 저주나 마찬가지다.
“사형…!”
백아가 다급히 나를 부르며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쉬어지지 않는 숨을 내쉬려 애쓰며 백아를 보았다. 두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인다.
곁으로 문곡이 다급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백아는 나와 눈을 맞추다가 돌연 내 위로 고개를 숙였다.
“사형, 제발…, 사형. …숨 쉬세요. 사형.”
귓가로 백아의 숨결이 닿았다. 떨리는 숨결이 깃든 나직한 속삭임이 나를 달랬다. 이어서, 의자 등받이를 짚지 않은 백아의 다른 손이 내 눈가를 덮으며 시야를 가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까맣게 덮인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속눈썹이 백아의 손바닥에 닿았다.
“무엇이 사형을 괴롭히는지 몰라도, 무엇도 사형을 해치지 못하게 할게요. 설령 사형이 이대로 괜찮다고 할지라도…, 저는 더 이상 괜찮지도, 제 자신을 놓지도 않을 거니까요.”
“…….”
“전부 사형이 준 가르침이잖아요. ‘이미 괜찮아지지 말라’던 말과, ‘사형과 뜻을 일치시키고자 스스로를 놓지 말라’던 그 말이 저를 구했고, 저는 이제 이 가르침을 명분 삼아 사형을 도울 거예요.”
백아의 목소리가 점점 멀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를 잠식한 건 짙은 피로감이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스펀지처럼 감각이 무뎌진다. 머잖아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감긴 눈꺼풀 안쪽으로 보이는 건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처음엔 단순히 화려한 문양의 붉은 옷자락인 줄 알았다. 그 끝자락만 보이고 나머지는 어둠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본 후에야 그게 혼례복이란 걸 알았다. 황금색 문양을 수놓은 붉은 혼례복이었다.
어둠에 묻힌 혼례복 자락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려 내 손을 봤다. 왼손 약지에 낀 반지와 피 묻은 손에 쥐여진 우사의 천옥.
…또 그 빌어먹을 잊혀진 기억인가.
내가 언제 잠든 거지?
“사형.”
그때 바로 뒤에서 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돌아본 등 뒤에는 우사, …그래, 백아가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이름을 ‘우사’에서 ‘백아’로 바꿔 불렀다가, 그런 스스로를 인지하곤 속으로 쓰게 웃었다. 우사와 백아가 동일 인물이란 걸 알면서도 그 둘을 다르게 구분 짓다니. 이건 내 마음의 문제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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