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내가 건네받지 않은 반지를 손안에서 매만지며 백아가 말했다.
“…단애약수는 회귀 이전에 가졌던 정[情]에 얽힌 언행의 의미와 감정들을 무용하게 만들고, 회귀 이후에 가질 정[情]에 관한 언행의 의미와 감정 또한 무용하게 만들 텐데.”
백아는 내 손을 잡아 다시 반지를 끼워 줬다. 반지는 지금 내 손가락엔 약간 헐거웠다. 나는 다시 끼워진 반지를 보았다.
“사형과 제가 회귀 전에 쌓아 올렸을 모든 정[情]에 관한 응보가 아니고서야.”
“…….”
“사형.”
백아가 나를 불렀다.
짤막한 부름에 깃든 건 늘 그렇듯 온유함이었다. 그 온유함이 지금은 먹먹하게 잠겨 있어서 백아의 애달픔이 은근히 전해졌다.
“그래서 이 반지 또한 몽경 안에서만 끼워 드릴 수 있어요. 반지에 새겨진 특별한 주술 때문에 정[情]을 잊은 이는 낄 수 없거든요. 그래도 저는 여기가 반지의 본래 자리란 걸 알아요. 이 반지는 사형 거예요.”
내게 끼워 준 반지를 엄지로 쓸며 백아가 말했다.
“…그러나 반지도, 천옥도, 그 손에 묻은 피도… 너무 무거운 의미를 갖고 있어요. 진작 무용해졌어야 할 것들이 사형의 마음 안에서 짐이 된 거예요.”
반지도, 천옥도, 손에 묻은 피도 전부 다 내 마음의 짐일 뿐이라고 백아가 말했다. 반지를 일별하며 내 손도 함께 놓은 그가 시선을 들어 나를 본다. 날 보는 눈빛이 일순 일렁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음의 짐을 전부 내려놓으면 본신의 병이 나을 거예요, 사형.”
“…….”
전부 내려놓으라고?
회귀 이전의 기억을, 그러니까, 회귀 전의 그 생을 전부 내려놓으라고?
내가 바로 받아들이지 못하자 백아가 재차 입을 열어 말했다.
“회귀를 했다는 건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전부 내려놓으라고? 이미 무용해진 것들이니까?”
“이젠 전부 사형을 힘들게 할 짐일 뿐이에요.”
“그래도 이 반지랑 천옥, 그리고 손에 묻은 피까지 전부 다 네 건데, 그렇게 바로 무용하다고 말할 수,”
“말할 수 있어요.”
백아가 명료하게 답했다.
날 직시하는 눈빛에 갖가지 감정이 서린 게 느껴진다. 그 모든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알지 못한다. 다만, 백아의 입매가 느슨하게 호선을 그렸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았다.
백아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생에서 사형은 나를 구하고 지켜 줬으니까요. 정[情]이 무용해졌음에도 우리의 인연을 놓지 않고 나를 곁에 뒀어요.”
“…….”
“지금 우리는 함께 있어요, 사형.”
그 짤막한 한 마디에 백아의 모든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 말을 울컥이는 심정으로 마주했다가 이내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백아가 다시 내 손을 꼭 붙잡아 온다.
“……그리고 사형의 말대로 이 마음의 짐들 전부 다 저와 관련된 거니까-,”
말끝을 흐리는 백아의 눈빛에 간절함이 서려 있다.
“저도 여기서 나름 쓸모가 있을 거예요, 사형.”
“…그러니까, 너만은 이곳에서 무용하지 않다?”
한풀 꺾인 목소리로 내가 물었다. 그에 백아가 눈매를 휘며 엷게 미소를 띤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미소 짓는 얼굴에서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다. 날 뒤쫓겠단 의지가 말이다.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미간을 꾹꾹 지압하듯 눌렀다.
“…마음대로 해.”
“네, 사형.”
바로 대답하며 백아가 맞잡은 손을 살며시 이끌었다. 나는 순순히 끌려가 주며 내딛는 걸음의 폭을 맞춰 주었다. 내친김에 내딛는 발의 순서까지 맞추며 나란히 걷다가,
“…내가 너라면,”
문득 말을 꺼냈다.
“난 너처럼 못했을 거야.”
회귀 이후의 생은 내게 있어, 결국 회귀 이전 생의 연장선일 뿐이니까. 그러니 이번이 온전히 ‘다시 시작된 생’이 아니란 걸 안다. 오연의 환청이 아직까지 들린다는 게 그 증거다. 그래서 모든 걸 버리고 다시 시작할 수 없다.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이 나를 둘러싸, 나를 얽맸다. 그 모든 것이 천라지망일지니 그 안에 갇힌 난 과거로 돌아갈 수도, 미래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저 ‘제대로 된 죽음’만을 바랄 뿐이다.
상념에 잠긴 날 보는 백아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나란히 걷고 있는 우리의 발만 내려다봤다. 서로 맞춘 걸음걸이에 망연히 시선을 두었다.
“…단애약수를 마신 건,”
그러다 문득 말을 꺼냈다.
“내겐 ‘이번엔 제대로 살겠다’는 결심이었어.”
“…….”
“회귀 전에 했던 일들, 내가 느꼈던 모든 감정들 전부 다… 절대로 반복하지 않겠단 결심이었는데.”
그런데 지나와서 보니, 그건 응보였다.
“…근데 그게, 회귀 전에 했던 일들과 느꼈던 모든 감정에 대한 응보였다고…, 하… 하하.”
천천히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하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인과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어디에 새로운 삶이 있겠어. 그래도 이 회귀에 쓸모가 하나 있다면, 우리의 사형제지연이겠지.”
우리의 사형제지연은 정[情]이 무용해야만 지킬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어둠 속에서 하늘거리는 혼례복의 붉은 자락이 이제 코앞까지 와 있다. 백아와 맞잡지 않은 손을 뻗어 혼례복의 붉은 자락을 움켜잡았다.
“나는 네게 좋은 사형이 될 거야, 백아.”
혼례복 자락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시선을 돌려 백아를 봤다. 넓게 펄럭이는 혼례복 자락이 나와 백아의 머리 위로 천천히 내려앉는다. 백아는 그 아래에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그 눈빛이 너무도 깊어 그 속내가 짐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물끄러미 시선을 맞췄다. 나와의 눈 맞춤이 길어질수록 백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띠어진다.
“…네, 사형.”
곧 백아가 순순히 답했다.
입가의 미소는 대답이 끝맺어지며 미묘하게 사그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저 깊다고만 생각했던 백아의 눈빛이 일렁였다. 짐작되지 않았던 속내가 얼핏 드러났다.
온통 이지러짐이었다.
* * *
붉은 혼례복 자락은 우리를 덮은 직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라져 가는 혼례복 자락 사이로 흐린 빛이 비쳐 든다.
머잖아 탁 트인 시야로 낯익은 거리가 보였다. 아까의 어둠은 온데간데없었다. 우리는 지금 저잣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의 거리가 이상하게 낯익다. 짐짓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을 살피다가 근처 가게의 편액을 봤다.
붉은 비단으로 치장된 환문 위의 편액에는 <어화루>라고 쓰여 있다.
<어화루>
순간적으로 오늘 대로에서 봤던 기루가 떠올랐다.
설마 여긴…….
“…사해필성?”
여기는 사해필성이었다. 회귀 전의 ‘잊혀진 기억’ 속 장소에 사해필성이 있었다.
“사형.”
옆에서 백아가 나를 불렀다.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린 내 시선은 자연히 백아가 바라보는 방향을 쫓았다. 그곳엔 두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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