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
그 두 사람은 ‘회귀 전의 우리’였다. ‘나’와 ‘우사’.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잊혀진 기억 속 내가… 우사와 사해필성에 왔었다고?
“여긴 사형의 몽경 안이라 이곳의 주인인 사형은 곧 스스로의 기억에 동화될 거예요.”
곁에서 백아가 말했다.
“동화?”
“네. 몽경 속 자신과 밖의 자아 간의 경계가 흐려지게 되거든요. 지금 사형의 몽경 안은 ‘회귀 이전’이에요. ‘회귀 이전’의 자신에게 동화되면 회귀 전후의 구분이 사라지게 돼요. …회귀로 구분되지 않는 삶은…, 사형의 말대로 ‘새로운 삶’이 아니게 되겠죠.”
“…….”
“…게다가 몽경 안까진 천라지망이 쫓아오지 못하니 거기서 비롯된 응보 또한 이곳엔 존재하지 않아요. 때문에 이곳에 오래 기거할수록 문제가 생겨요.”
“…무슨 문제?”
“단애약수. 응보가 필연적으로 가져온 결과인 단애약수는 이곳에 있을수록 몽경에 침식되고 차차 그 효력을 잃다가 머잖아,”
“효력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거야?”
백아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말했다.
“……네.”
“그걸 알면서도 몽경 안으로 들어오는 걸 감행한 거고?”
“…사형이 아픈 원인을 찾기 위해선 감내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멋대로 속단하지 마.”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어쨌든 여기서 당장 나가야겠어.”
굳이 몽경이 아니더라도 ‘잊혀진 기억’을 되찾을 방법은 있다. ‘오연의 혼’을 파괴하면 그만이다.
“사형!”
날 부르며 백아가 내 팔을 움켜잡았다.
“나는 절대 단애약수를 잃을 수 없어. 단애약수를 잃는 것만은… 절대 안 돼.”
강경하게 말하며 백아의 손을 뿌리쳤다. 날 보는 백아의 눈빛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왜요?”
백아가 물었다. 날 보는 백아의 미간은 깊게 골이 패 있었다.
“왜 잃어선 안 되는 건데요? 응보는 다른 업을 쌓는 걸로도 충분히 해탈할 수 있어요.”
나만을 직시하는 두 눈에 묘한 열기가 일렁인다.
“회귀 이전에 분기점이 되었던 사건을 뒤집어서 재현하거나,”
그 말에 절벽에서 떨어지던 순간의 잊혀진 기억이 떠올랐다. 떨어지는 내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와 천옥.
혼례복 자락을 통해 넘어온 몽경 안에서 지금 내 손에 있는 건 반지뿐이다. 천옥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단 천옥만 몽경 안으로 넘어오지 못한 거다.
몽경은 내 안의 가장 깊은 속마음이자 은밀한 내면이다. 천옥을 얻기 위해 저질렀을 업과 그로 인해 벌어졌을 참담한 결과까지 내 속에선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거다.
이제 알겠다. 그저 직감이긴 하지만 확실하다. 회귀 전의 난 우사의 천옥이 지닌 비밀을 몰랐다. 그걸 빼앗으면 우사가 죽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그리고 아마 우사는… 그 절벽 위에서 죽었을 거다.
‘가.’
‘안 찾을게.’
우사가 남긴 말이,
“…응보의 업이 되는 감정에서 해방되면 돼요. 그러니 응보란 건 반드시 얽매여야만 하는 게 아니에요, 사형.”
내 앞에 선 백아의 말과 겹치며 머릿속을 울렸다.
응보의 업이 되는 감정. 그 감정들이 바로 단애약수로 지웠던 감정들이다.
단애약수는 응보의 업이 되는 감정으로부터 날 해방시켜 줬다. 완전한 해방은 아니지만,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이 사형제지연에는 그 응보가 구원이나 마찬가지니까.
“…얽매이고 싶다면.”
내가 말했다.
“내가 반드시 응보에 얽매이고 싶다면.”
아까보다 더 분명한 목소리로 재차 말했다.
백아는 날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긴 눈매의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린다. 내가 뿌리친 백아의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가 곧 힘없이 풀어졌다.
“……네, 알겠어요.”
백아가 답했다. 예상했던 순순함이다. 나는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그만…….”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갑자기 인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바로 중심을 잡긴 했지만 눈앞이 여전히 어질거린다.
“사형이 제게 바란 대로 더는 사형의 뜻만을 위하지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사형의 뜻에 거스르고 싶지 않은 것 역시 저의 마음이니,”
백아의 목소리가 흐리게 들리며 귓속이 웅웅 울린다. 마치 물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게 막에 한 꺼풀 쓰인 것같이 느껴진다. 머릿속이 무겁게 잠겨 간다. 늪에 빠지는 기분이다. 빙빙 도는 머릿속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백아!”
간신히 목소리를 내어 백아를 불렀다.
“너무 늦지 않게 이 몽경에서 깨워 드릴게요.”
돌아온 대답의 어투는 여전히 순순해서, 도리어 냉담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이명이 귀를 찌를 듯 높아졌다.
삐이이이----
길게 울려 퍼지는 이명 속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어지럽던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며 현기증이 서서히 가신다.
“형.”
또렷한 시야에 우사의 얼굴이 들어왔다. 우사는 한 팔로 내 허리를 안은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지한 눈빛에 걱정이 서려 있다.
“……아.”
멍한 침음을 내뱉으며 우사를 보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밀어냈다. 몸에 힘을 주고 스스로 서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귀의 이명이 사라지며 주위의 풍경이 새삼 눈에 들어온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황량한 거리. 사해필성이다.
그래, 사해필성.
나는 우사와 사해필성으로 외행을 나왔다. 우사가 내게 권한 외행이었지만, 사실 이번 외행만큼은 우사의 권유가 없었더라도 동행했을 거였다.
왜냐하면 자고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에게 빚이 있다. 빚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말 한마디만큼의 빚이다.
예전에 어느 객잔에서 실수로 그에게 술을 뿌렸던 일이 있다. 그때 그는 자신에게 뿌려진 술을 ‘공양’으로 받아들이며 마저 합장을 할 것이냐 물었다, 그에 나는 흔쾌히 그렇다 답한 뒤, 합장을 했고 함께 대작을 했다.
주고받은 술잔은 얼마큼이며, 얼마나 많은 술병이 비워졌는지 모른다. 그날, 나는 얻어 마신 술값을 나름 갚을 요량으로 약속을 하나 했다.
‘객이 그렇게 없다면, 내가 다시 조문을 와서 그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습니다.’
그때 자고가 말한 ‘가슴에 묻은 무덤 하나’가 사해필성인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사해필성은 하나의 거대한 무덤 같은 곳이다.
이곳의 성주인 ‘정소양’이 귀신이 되어 돌아다닌다는 목격담이 돌며 사해필성은 차츰 활기를 잃어 갔다. 그러다가 사천당문과의 교류가 끊어지는 게 직격탄이 되어 완전히 활기를 잃었다. 이제는 이곳에서 예전의 명성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 된 사해필성과, 그 사해필성을 떠나지 않고 계속 맴돈다는 자고.
이번 외행은 그 일에 대한 추적이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