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장난질이 아니면 네가 염치가 없는 건데, 먼저 사형제지연을 끊은 네가 염치마저 내려놓고 날 형이라고 부를 리 없으니까.”
내 말을 듣는 우사의 낯빛이 가라앉는다.
“그럼.”
가라앉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이며 우사가 선뜻 긍정했다.
“나 염치없어.”
그 간단한 수긍에 우사를 똑바로 노려봤다. 내 힐난의 시선을 우사 역시 똑바로 마주했다. 조금도 시선을 비끼지 않는다.
“형.”
우사가 나를 불렀다. 그 고집 어린 부름이 너무나 꿋꿋해서 이를 악물었다.
“날 형이라고 부르지 마…!”
날카롭게 외친 뒤 잠시 숨을 골랐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게 날 형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형’이라고 부를 자격?”
날 마주 보는 우사의 눈빛이 일렁인다.
“그래. 사형제지연을 끊은 건 너였지만, 끊긴 사형제지연을 버린 건 나야. 끊어지고 버려진 인연이니, 네겐 날 형이라 부를 자격이 없고, 나도… 네게 형이란 소리 들을 이유 없어.”
우사의 얼굴에 더는 웃음기가 없었다.
“……좋아. 그러면 내 자격은 이제부터 만들 테니 형도 이유를 찾으면 되겠네.”
잠시의 침묵 끝에 우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뭐?”
나도 모르게 반문하며 인상을 썼다.
“나한테 ‘형’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 찾는 거 도와줄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다른 사람과의 차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뚜렷하고 명료하거든.”
웃음기 없는 우사의 얼굴에서 입매만 싱긋 호선을 그린다.
“필요 없어.”
바로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난 호칭이 ‘형’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는데, 내가 왜.”
“정말 뭐든 상관없어?”
그런 날 보는 우사의 고개가 옆으로 비스듬히 기운다.
“상관없어.”
그 ‘형’ 소리만 아니면 다 괜찮다는 심산이었다.
“이제까지 날 막 부렸던 것처럼 그냥 막 대하고 막 불러. 그게 더 나으니까.”
“…이제까지처럼 대해 주는 건, 내게 있어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일 텐데.”
우사의 말에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이제까지 내가 한 건 차 따르기, 서책 읽기, 먹 갈기, 우사의 옆 지키기 정도다.
그게 특별한 거라고? 뭐가 어떻게 특별한 건데? 시종으로서 본다면 나름 최측근 전용 잡무이니 특별하다면 특별한 거겠지만, 그래 봐야 시종은 시종인 거잖아. 그 범위 안에서 특별해 봤자지.
“앞으로도 특별하게 대해 달란 거야? 형으로 부르지는 말고?”
내게 묻고는 곧바로 다시 말을 잇는다.
“흠. 물론 나도 그런 방향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애초에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대답할 틈도 안 준다. 저 혼자서 자문자답하고 있다.
“아직은 이해타산이 안 맞아서 많이 일러.”
그렇게 혼자 결론지은 우사가 나를 번쩍 들어서 자신의 옆구리에 꼈다.
“……무슨?!”
놀란 나머지 낮게 헛숨을 삼켰다. 방어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느새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있었단 것도 몰랐다.
머리에 쓰고 있던 멱리가 아래로 흘러내리며 땅에 쓸린다. 시야를 가리는 멱리 너울을 위로 젖히며 어떻게든 그 팔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 있다. 자신의 옆구리에 나를 바짝 붙인 채 틈이라곤 없다. 머리에 피가 쏠린다.
진짜 꼼짝도 안 하네.
“왜?”
태연히 물어 오는 우사에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봤다.
“머리에 피 쏠리니까 당장,”
“아하. 그거 잘됐네. 마침 형이 갑자기 어지러워해서 걱정했는데.”
내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우사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어지러운 건 머리에 피가 안 돌아서 그렇거든, 형.”
황당무계하다. 그런데 그 황당무계함보다 더 내 신경을 잡아끈 건 우사가 풍기는 불온함이었다.
말도 안 되는 농을 하는 우사의 낯빛엔 그린 것 같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날 보는 눈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그 간극이 쎄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 형.”
그 쎄한 느낌이 조금 꺼림칙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우사와 맞닿고 있단 것만으로도 온 신경이 예민해져서 ‘형’이란 호칭에 대해 바로 지적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신체 일부가 조금 닿은 것 가지고. 나도 진짜 정말 구제불능이다.
“…차라리 날 그냥 공중에 띄워. 직접 들지 말고!”
점차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외쳤다. 보나 마나 지금 내 얼굴은 엄청 새빨갈 거다. 지금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얼굴에 피가 쏠렸기 때문이란 구실을 댔지만, 그 변명이 나 자신한테까지 온전히 통하는 건 아니다.
이런 걸로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은데. 두근거리는 마음에 차츰 비참함이 스민다.
“형한테 그럴 순 없지.”
돌아온 대답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에 말없이 우사를 노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들었다. 우사를 겨냥한 돌이었다.
우사는 손을 들어 제 코앞에서 돌을 낚아채 잡았다. 그 손놀림이 가뿐했다.
“흠?”
손안에서 돌을 갖고 놀며 우사가 재밌단 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나는 기민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돌이지?
우사의 손안에서 던져졌다 받아지길 반복하던 돌이 어느 순간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우사가 선력으로 날려 버린 거다.
허공을 가르며 쇄도해 날아간 돌은 이번에도 상대를 맞추지 못하고 허공에서 잡혔다. 날아오는 돌을 가볍게 낚아채 잡은 건 한 소년이었다.
귀신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소년은 근처 전각 2층 난간 위에 서 있었다.
우사와 소년 사이에서 서늘한 기류가 흘렀다. 우사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소년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사의 기운에 눌려 도망갈 줄 알았는데, 제자리에서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
짧은 대치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소년이었다.
“ㅅ… 형을 놔줘.”
그 한 마디에 우사가 어이없단 듯 실소를 내뱉는다.
“아는 애야, 형?”
우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전각의 난간 위에 서 있는 소년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애긴 한데… 뭔가 낯이 익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일단 이것 좀 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우사의 팔을 한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형’이 그러길 바란다면.”
‘형’에 강세를 두며 우사가 말했다. 그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른 척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명한 강세였다.
이런 식으로 날 굴종시키겠단 거지?
매섭게 노려보는 나와 눈을 맞추며 우사가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까닥 올린다. 내게 선택권을 주겠단 거다.
“…그래. 내가 졌어.”
눈싸움 끝에 결국 먼저 꺾인 건 나였다. 일단은 이 팔에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되레 우사가 꺾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미 형한테 졌어.”
내게만 들릴 정도로 우사가 작게 속삭여 말했다. 이어서 나를 안고 있던 팔에도 서서히 힘이 빠지면서 곧 나를 놔줬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