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전각을 오가며 벌인 싸움판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고, 역시나 이 싸움을 지켜보던 눈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현교당의 인사들도 있었다.
가면이 부서지며 드러난 남여연의 얼굴에 거리의 누군가가 헛숨을 삼켰다.
왜냐하면 남여연의 얼굴이 정소양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사해필성 성주인 정소양과 말이다.
“너……!”
싸하게 가라앉은 거리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남여연이 열 받아선 외쳤다.
방금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으며 유계의 머리카락을 놓친 남여연의 손엔 머리카락 몇 가닥이 엉켜 있었다. 유계의 것이었다. 그 머리카락을 보는 유계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남여연이 재차 고함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마찬가지로 거리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유계가 남여연에게 달려들었다. 선빵필승이었다.
“땡중으로 만들어 주지… 요.”
남여연의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분 위주로 억세게 휘어잡으며 유계가 읊조렸다. 은은한 목소리엔 분기가 서려 있었다.
유계에게 머리채를 잡힌 남여연이 낮게 소리 질렀다.
“땡중? 악! 잠깐, 잠깐만! 이런 미친……!”
서로의 눈에 서로만 보이는 그들만의 개싸움이 시작됐다.
* * *
사해필성 외행을 끝내고 우횡산의 연회천전으로 돌아온 첫날, 우사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다음 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우사는 사흘간 나를 부르지도, 제 처소에 틀어박혀 나오지도 않았다.
외행으로 갔던 사해필성에선 그렇게 나를 부려 먹을 궁리로 가득했으면서 말이다. 예상외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나흘째 되는 날엔 내가 먼저 우사가 있는 내실 주변을 기웃거렸다. 비질한다는 명목으로 빗자루를 들고선 후원을 하릴없이 오갔다.
사실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긴 하다. 오히려 무시하는 편이 내겐 좋은 일이다. 무시할수록 우사와 얼굴 마주하는 시간도 줄어들 테니까.
…그런데 자꾸만 그때 우사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던 게 생각난다.
정작 그때 운 건 나였으면서. 울지도 않았던 우사를 ‘울 것 같았다’는 감상만으로 신경 쓰는 것 자체가 우스운 짓이란 거 안다.
하지만 그 이유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우사를 무시하지 못하는 데엔 그것 말고도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일단 지금 나는 우사의 시종이다. 시종인데 시종의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여기에서의 내 존재의의가 모호해지니,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나흘째 되는 날은 후원만 오가며 보냈고, 마침내 오 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오 일째 되는 날에 우사의 측근인 비천정이 나를 찾아왔다.
비천정은 천계에서부터 우사를 모신 동자다. 겉모습은 반듯한 소년인데 인상이 몹시 유순하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끝엔 늘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다. 거기에 선량한 인상까지 더해지니 굉장히 착할 것 같지만 실은 앞뒤 꽉 막힌 원칙주의자다.
비천정은 우사가 천룡이 되는 순간, 그를 모시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왔다. 천룡이 된 우사가 다시 하늘에 속하게 되며 천계에 남겨 두고 온 그의 모든 것들이-인연, 지위 등등- 다시 그 본인에게 속해졌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비천정과 같은 측근들도 있었다.
우사가 천룡이 되지 못했다면, 하늘에 매인 비천정은 지상으로 내려오지 못했을 거다. 그나저나 비천정이 오다니. 우사가 드디어 나를 찾기라도 한 건가?
“…알겠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표정 관리를 하며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내 말에 비천정이 의외란 눈으로 날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알고 계셨다면 굳이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네. 지금 바로 룡존 전하를 찾으러 가는 길에 동행해 주시면 됩니다.”
“……? 누굴 찾는다고요? 우사가 여기 없어요?”
룡존을 ‘우사’라고 부르자마자 비천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다시 폈다.
“…사흘 전부터 안 계셨습니다.”
코끝으로 가는 숨을 내쉬며 비천정이 답했다.
“어디 갔는데요?”
“‘지금 바로 가겠다’고 해서 혹 그 행방을 아는 건가 싶었는데, 역시 모르셨군요.”
“당연히 여기에 있을 거라 생각해서…….”
말끝을 흐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우사는 당연히 여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아무 언질 없이 자리를 비웠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날 끼고 다녔으니, 말없이 다른 데로 갈 리 없다 생각했는데…….
“안 계십니다.”
비천정이 조금 침울해진 낯으로 말했다.
“아무런 말씀도 없이 자리를 비운 지 이제 사흘째입니다.”
“…….”
“혹시 따로 언질을 받으신 것 없으신가요?”
비천정의 물음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거 없었다.
“아니면 이 일이 일어난 데에 짚이는 원인이라도요.”
…짚이는 거.
……짚이는 거라면 너무 많다.
여전히 내가 말이 없자 비천정이 날 물끄러미 보더니 곧 뭔가 알겠단 듯 짧은 한숨을 내쉰다.
“역시 진연 님이 그 원인이었군요.”
그리고 하는 말은 이미 날 범인으로 결론짓고 있었다.
‘역시’라니.
“왜 나일 거라고…, 내가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찔리는 건 많았지만, 그래도 단번에 단정 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당하게 느껴져 반발했다.
물론 대놓고 말한 건 아니고, 입안으로만 투덜거렸다. 비천정이 제일 잘하는 게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거기 때문이다. 괜히 말씨름이 벌어져 봐야 나만 손해다.
“룡존 전하께선 묵중하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이렇게 즉흥적으로 행동했단 건 대개… 어느 분이 엮여 있을 때뿐입니다.”
잠시 흐렸던 말끝을 다시 분명하게 이으며 비천정이 나를 본다. 확신에 찬 눈이었다.
“200년 전에 룡존 전하께서 왜 지상으로 내려와 그 늪지대에 자리 잡고 계셨는지 아시나요?”
비천정이 내게 물었다.
답을 알 리 없는 내가 침묵하고 있자 비천정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그럴 줄 알았단 눈으로 나를 보는 게 거슬린다.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사고가 있었고, 겸사겸사 수양을 함양하기 위해서라고 듣긴 했는데,”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내 말에 비천정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근본적인 이유인 것도 아닙니다. 룡존 전하가 하늘과 멀어진 건… 그분의 천명에 악재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피하기 어려운 시련이라 룡존 전하께선 부득이하게 잠시 하늘을 뒤로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끝내 룡존 전하가 그 천명을 수행하도록 이곳, 속계에 떨어트렸고 그렇게 진연 님과 만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진연 님이 룡존 전하를 구한 순간… 그 순간부터 진연 님의 끝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비천정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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