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우사를 구한 순간 내 끝은 이미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하지만 이제 괜찮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잠깐. 잠깐만요, 비천정 대인. 내가 우사를 구한 게 뭔가…, 잘못된 일이었다는… 그런, 그렇게 들리는데…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마냥 잘못된 일이라고 하기엔, 글쎄요.”
비천정이 눈을 내리뜨며 말을 이었다.
“그때 진연 님이 아니었다면 룡존 전하는 죽었을 테니까요.”
“…….”
“진연 님이 룡존 전하를 살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룡존 전하께서 진연 님께 은[恩]을 입으셨다는 것도요.”
내리떴던 시선을 다시 들어 나를 마주하며 비천정이 말했다. 나를 보는 눈빛이 진중하다.
“그렇기에 저 또한 룡존 전하의 뜻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우사의 뜻?”
“룡존 전하께서 왜, 스스로 끊어 낸 인연을 다른 방향으로 다시 이으려 하시겠습니까?”
“……그냥 괜한 변덕인 건…….”
“진연 님. 룡존 전하는 아마 진연 님에게 구해진 순간 알았을 겁니다. 진연 님이 룡존 전하께 은[恩]을 베풀었을 때, 운명의 끝이 정해진 건 진연 님뿐만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날, 진연 님께서 베푼 인정은 두 분을 서로 한데 엮어 버렸습니다.”
비천정의 어깨 위로 작은 새가 머리를 내민다. 작은 참새였다. 비천정이 손을 내밀자 부리로 손끝을 툭툭 두드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 정해졌다는 운명의 끝이 뭔데요?”
순식간에 너무 많은 걸 알아 버려서인지 머릿속이 이상하게 무거우며 먹먹하다. 현실감각이 없다.
“언젠가 진연 님은 반드시 룡존 전하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진연 님 또한 평탄지 못하게 됩니다.”
“……?!”
“룡존 전하의 숙명은 ‘구원과 절망이 함께한다’는 것이었으니. 이는 곧 생명의 은인이 곧 자신을 죽일 이이라. 그 죽음은 생명의 은인이 베푼 은[恩]을 원[怨]으로 되갚으리라. 진연 님은 룡존 전하를 구함으로써 전하와 인연이 생겼고…….”
비천정이 진중한 어조로 또박또박 말했다.
“은원[恩怨]을 어지럽히는 그 인연은 사형제지연으로 엮이게 됐습니다.”
“…….”
가슴이 쿵 떨어지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왔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비천정만 보았다. 방금의 말들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내 머릿속 생각의 범주를 벗어난 말이었다.
막혀 오는 숨을 찬찬히 내쉬려고 노력했다. 혼란스런 머릿속에 가장 직접적으로 박힌 건 ‘언젠가 진연 님은 반드시 룡존 전하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란 비천정의 말이었다.
…내가 그 우사를 죽인다고?
“룡존 전하께선 생명의 은인이 베푼 은[恩]을 원[怨]으로 되갚게 된다는 부분을 가장 꺼림칙하게 여기셨습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야말로 가장 어찌할 수 없으면서, 가장 당연한 숙명입니다. 룡존 전하의 목숨은 천명에 매인 존귀한 것이니, 그 목숨을 인위적으로 거둔 이의 끝은 필연적으로 나쁠 수밖에요. 본좌께는 먼저 진연 님을 죽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결국엔 최후의 수단인 사형제지연을 끊는 방법을…….”
비천정이 뭐라고 하는데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아까의 그 말로 온통 꽉 차 있었다.
‘언젠가 진연 님은 반드시 룡존 전하를 죽이고 말 것입니다.’
내가 우사를 반드시 죽이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 말은, 내 운명에 그런 힘을 쟁취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
우사를 죽일 만한 힘이라면 분명 우사를 능가하는 힘일 테니…….
‘……본받을 것 없는 사형의 곁에 어느 사제가 남아 있겠느냐.’
길어지는 상념의 바탕에 깔린 건 스승, 오연의 환청이었다.
그 환청에 잠식되려는 찰나,
“그럼 앞으로의 일은 진연 님께 맡기겠습니다.”
내게로 새를 날려 보내며 비천정이 말했다.
“제 전령이니, 함께 동행하며 룡존 전하를 찾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아이 편으로 연락하면 됩니다.”
날아온 새가 내 한쪽 어깨 위에 앉았다. 곁눈으로 새를 보며 망설이다가,
“방금 그 말…, 정말이에요?”
나직이 물었다.
“사형제지연만 아니었다면…….”
“이제 괜찮습니다.”
흐려지는 내 말끝을 자르며 비천정이 답했다.
“이미 없어진 시련이니 마음에 담아 둘 필요 없습니다.”
“…….”
그에 나는 잠시 침묵했다.
비천정의 말대로 사형제지연은 이미 끊어졌다.
“그렇다면, 만약 사형제지연이 끊어지지 않았더라면…….”
침묵 끝에 침잠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비천정 대인은 내가… 정말 그 우사를 죽일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우사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 실력이었다. 스승님은 그런 내게 자주 말하곤 했다. 더욱더 정진하라고. 하지만 정진해 봐야 소용없었다. 서로 간의 격차는 점점 크게 벌어질 뿐이었다.
사형으로서 그 앞에 설 수 있긴커녕, 뒤를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아니, 뒤를 제대로 쫓지도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사의 그림자에조차 닿을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검을 놓은 지도 오래라 예전보다 더 못한 실력이다. 말 그대로 폐물이다.
그런데 그런 내가 우사를 죽일 수 있었다는 건…, 우사보다 더한 실력을 가질 수도 있었다는 건가? 우사를 능가하는 그런 뭔가를. 보다 강한 힘을.
‘사형은 사형다워야 한다.’
‘…그래 가지고 우사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본받을 것 없는 사형의 곁에 어느 사제가 남아 있겠느냐.’
스승, 오연의 환청이 귓전에서 울린다. 털어 내려 해도 떨어지질 않는 이 환청은 이미 내 안에 깊이 뿌리 박혔다.
“……진연 님.”
비천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 목소리 위로 스승, 오연의 환청이 겹쳤다.
‘연아.’
‘네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동시에 수면 아래에 묻어 뒀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일부러 묻어 두려 했던 기억이, 비천정의 말에 의해 수면 위로 끌어 올려졌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횡산에서 들개 무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우사와 함께 있었다.
‘네 검은 아무것도 베어 내지 못했구나.’
들개와 마주하자마자 우사가 나를 끌어안으며 날 보호했다. 그렇게 낯을 많이 가리고 소극적이던 우사가 말이다. 그런 우사의 어깨 너머로 덮쳐 오는 들개들을 봤다. 그리고 그 들개에게 본인의 등을 내주는 우사를 봤다.
처음 느낀 감상은 달갑지 않다는 거였다. 사제에게 보호받는 이 상황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사형은 마땅히 사제를 보호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 지금 들개에게 등을 내줘야 하는 건 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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