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일단 가장 가까운 곳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단 말도 있으니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산영성’이다.
우횡산 자락에 걸쳐 있는 ‘산영성’은 천룡을 신으로 받들어 모시는 이들이 모여 만든 도시다. 그만큼 천룡의 광신도들이 가장 밀집해 있다. 이곳에서 우사는 신이었고, 그를 위한 신당(신을 모시는 사당)도 있다.
우리는 산영성의 성문 바깥에서 내린 뒤, 법술로 입고 있는 옷을 바꿨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선사복엔 우사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옷을 입은 채 이 안을 활보했다간, 분명 시선을 엄청 끌어모을 거다.
나는 일반 백성들이 입는 민가의 옷으로 바꾼 뒤 선검은 허리춤에 찼다.
“저도 옷을 바꿔야 할까요?”
사아가 옆에서 물었다.
“아니. 괜찮아.”
앞의 성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답했다.
높은 성문과 견고한 성벽. 저 너머에는 수백 개 전각으로 이뤄진 도시가 있다.
높고 낮은 전각들과 깨끗한 거리, 그리고 맑은 호수 한가운데에 세운 천룡의 신상.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 허공을 유유히 떠도는 금 타는 소리.
활기찬 시장 소음 속엔 다툼이 없고, 거니는 사람들의 얼굴엔 근심이 없으며, 내딛는 걸음들은 가벼우니 모든 것이 무사평안하다.
이상, 비천정의 산영성 소개말이다.
물론 내가 실제로 산영성에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우사가 은연중에 몇 번 운을 떼긴 했지만, 그때마다 질색하며 흘려들었다.
우사와 재회한 이후 나는 대부분 연회천정에 머물렀다. 그곳이 우사가 기거하는 내원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우사가 멀리 외행 갈 일이 생길 때만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반강제적으로 끌려가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우사는 내게 외행의 동행을 ‘부탁’할 때마다 매번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형이 내 뒤를 맡아 줘.’
그렇게 말하며 짓던 우사의 갸름한 눈웃음이 새삼 떠오른다.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내 도움’이 필요하다 했으면서, 막상 일이 터지면 늘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날 자신의 뒤에 숨기기 바쁘게 굴며 앞장서던 꼴이란.
그게 무슨 뒤를 맡기는 거야. 그냥 날 자신의 뒤에 숨기는 거지.
떠올리니 또 울컥 짜증이 나서 발치의 돌을 툭- 걷어찼다.
아무튼 그간 우사가 산영성에 외행을 올 일이 없었기에 들른 적 없었다. 절대 오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 발로 직접 오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역시 사람 앞일은 모르는 거다.
“…가자.”
앞장서며 말했다.
반걸음 뒤에서 사아가 쫓아온다. 나는 한 손을 뒷짐 진 채 걸었다. 산영성의 성문을 통과할 땐 비천정의 전령이 도움이 됐다. 새가 성문지기에게 비천정의 전음을 전했다.
사아는 내 동행으로 무사히 입성했다.
성문을 넘자마자 안쪽에서부터 활기가 밀려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번화한 장이었다. 그야말로 활력으로 넘쳤다.
좌판을 벌이고 있는 상인들과 가판에 꽂힌 과일꼬치들. 지게에 향낭을 잔뜩 짊어진 상인이 거리를 다니며 호객 행위를 한다.
넓은 대로 양옆의 전각들 사이로 부는 바람엔 꽃잎이 하늘하늘 실려 있고, 그 꽃잎 새로 금 타는 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진다.
비천정에게서 들은 것보다 더 번화한 거리였다.
혼잡한 풍경에 반사적으로 사아의 손을 붙잡았다. 가면을 쓴 아이들이 사방에서 쏘다닌다. 재잘거리며 뛰노는 아이들이 쓴 가면은 귀신부터 동물들까지 다양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그래서 성문을 통과할 때 사아가 가면을 쓴 것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구나.
곁눈으로 사아를 힐끔 보았다. 사아는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머리가 이곳저곳을 바쁘게 기웃거린다.
신기한 게 많은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번화한 도성은 흔치 않다. 게다가 축제 중이기도 한 거리는 혼잡한 만큼 구경거리도 많았다. 그러니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뭐,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그렇게 우사를 안달복달하며 찾고 싶지도 않고. 애초에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서둘러 봤자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을 곧바로 실행으로 옮겼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걷는 내게 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한 손을 나와 꼭 맞잡은 채 내가 걷는 대로 얌전히 따랐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장 많은 가면을 파는 노점으로 걸어가 그 앞에 섰다.
어디 보자…….
멱리 너울이 시야를 방해해 한 손으로 젖힌 채 가면들을 구경했다. 반대편 손에 잡혀 있는 사아는 단정히 서선 그런 나를 조용히 기다려 줬다.
나는 쓰고 있던 멱리를 아예 머리 뒤로 넘겨 어깨에 멨다. 그러곤 가장 마음이 가는 가면 하나를 집어 들어 장난스럽게 얼굴에 대보며 사아를 내려다봤다.
“어때?”
사아가 쓴 것과 같은 ‘코가 삐뚤어지게 취한 노인’ 가면이다. 나와 맞잡고 있는 사아의 손이 꼼지락 움직인다. 그 감각이 간지럽다.
“마침 축제가 열린 것 같은데, 축제 구경이나 해 볼까?”
내 제안에 사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외행 중인데 괜찮나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좋아요.”
그리고 바로 뒷말을 덧붙였다. 나는 작게 웃으며 얼굴을 가렸던 가면을 내렸다.
“나도 좋아.”
내가 대답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으면 그걸로 됐지.
간단명료한 대답에 사아는 말이 없었다.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진다. 또 부끄럼을 타나 보다.
혹시 몰라 챙겨 온 금낭에서 돈을 꺼내 가면 값을 지불한 뒤 얼굴에 썼다. 그리고 사아와 마주했다. 우리 둘이 똑같은 가면이다.
“그럼 뭐 할까. 뭐가 하고 싶어?”
“…형님이 하고 싶은 거요.”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하는 사아의 눈빛이 반짝인다.
“이 형님은 사아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은데.”
똑같은 말로 되돌려 주며 피식 웃었다. 날 물끄러미 올려 보는 사아의 귀 끝이 붉어진다.
“…그렇다면 전 형님과…, 같이 걷고 싶어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그게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거란 듯이 명료한 어조였다.
“좋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흔쾌히 답했다.
내가 앞으로 걸음을 내딛자 사아도 얼른 날 쫓아 걸음을 내디뎠다. 서로 손을 맞잡고 나란히 걸었다.
사아는 처음엔 계속 나만 힐끔거렸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이 눈이 마주쳤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안 보고 있었단 듯이 바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몇 초 뒤에 다시 슬며시 나를 쳐다본다.
그때에도 내가 계속 자신을 보고 있으면 눈이 마주쳐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눈빛에 웃음이 서리며 내 손도 더 꼭 붙잡는다.
귀엽다.
날 엄청 잘 따르는 게 보인다. 그래도 이렇게 나만 보고 있으면 축제를 잘 즐기지 못할 텐데. 이대로 헤어져서 문파로 돌아가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거다. 이렇게 큰 축제는 흔치 않으니까.
“사아야, 저것 봐봐.”
별수 없이 내가 나서서 축제를 즐겨 주기로 했다.
사아와 맞잡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가까운 좌판을 가리켰다. 가판 위에는 온갖 장난감이 늘어져 있었다.
사아의 시선이 내 손을 따라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한다. 장난감이 놓인 가판을 본 사아는 별 반응이 없었다.
흠. 그럴 리가 없는데? 워낙 얌전한 아이라 겉으론 잘 표가 안 나는 건가.
“한 번 구경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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