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코를 감싸 쥐었던 손은 어느새 피로 흥건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망연히 응시하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어느새 돌아온 참새가 내 어깨 위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내 앞에는 낯익은 이가 서 있었다.
우사다.
나를 등진 채 선 우사가 상대의 멱살을 움켜잡고 곧바로 주먹을 휘둘렀다.
퍽-, 퍽-!
피가 튀며 살이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잔인한 타격음이었다.
살벌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그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봤다. 곧 넝마쪽이 된 상대가 무너져 내렸다. 우사가 잡고 있던 멱살을 놨기 때문이다. 쓰러진 남자와 내 앞에 선 우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우사가 비스듬히 몸을 돌려 나를 내려다본다.
“……형.”
그때와 같다.
멍했던 머릿속이 순식간에 어지러워진다. 갖가지 상념과 감정들로 휘몰아쳤다. 나는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두 눈에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한다.
“형.”
우사가 나를 부르며 바로 내게 달려온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선 나를 끌어안는다. 힘 있게 안아 오는 그 두 팔이 단단하다.
우사의 어깨에 턱을 댄 채 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뺨 위로 흘러내렸다.
……차라리 그때 나를 들개한테 물려 죽게 내버려 뒀다면, …됐다, 그만하자.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우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삼키는 숨에 섞여든 우사의 청아한 체향이 내 가슴을 옥죄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마음을 참담하게 물들이는 비참함이, 그리고 귓가에 울리는 네 목소리가.
“괜찮아, 형. 내가 여기 있어.”
……그래, 너는 늘 내 마음 안에 있어서, 내 속을 지옥으로 만든다. 너를 향한 감정이 나를 이루고 그 감정들이 나를 정의해.
지옥에 걸맞게.
나를… 악귀로 만들어.
“…….”
흐르는 눈물이 멎지 않는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눈물로 흐린 시야가 차츰 또렷해지며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나를 끌어안고 있는 우사의 품에 안겨선 앞을 바라봤다.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이가 보인다. ‘사아’다.
사아와 눈이 마주친 순간, 아래로 힘없이 늘어트렸던 팔을 앞으로 뻗었다. 사아를 향해 뻗은 손끝이 미미하게 떨린다.
“…형님.”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내게 닿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거리가 순식간에 확 좁혀졌다.
사아는 이제 바로 내 앞에 있었다. 내가 뻗은 손끝을 잡아 준다. 그런 우리 사이에는 나를 끌어안고 있는 우사가 있었다.
“같이 돌아가요.”
그 한 마디에 나는 기적처럼 우사에게서 자유로워졌다. 이제 나를 얽매는 건 없었다. 내게 닿은 건 얌전히 잡힌 사아의 손뿐이었다.
무심코 등 뒤를 돌아봤다. 내가 떠난 자리에 남겨진 우사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다.
그러니까, 저 우사의 품속에 있는 건… ‘잊혀진 기억 속의 나’다.
모든 게 서서히 생각난다.
여긴 현실이 아니다. 이미 지나친 과거이자, 다신 오지 않을 미래다.
나는 회귀를 했다.
다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아를 봤다. 맞잡지 않은 다른 손을 사아의 얼굴을 가린 가면으로 가져갔다. 사아는 그런 내 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가면을 벗겨 내자, 그곳엔 나의 유일무이한 사제가 있었다.
“……백아.”
내 부름에 백아가 내 다른 한 손도 맞잡는다. 양손을 전부 맞잡고선 날 이끈다. 그런 백아를 차마 바로 볼 수 없어서 시선을 피했다.
내 뒤에 있을 우사와 내 앞의 백아는 결국 같은 사람이다. 회귀 전이냐 회귀 후냐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그런데 우사에게 벗어나고 싶다고 백아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애초에 내 뒤의 우사도 그냥 나를 구했을 뿐인데.
‘잊혀진 기억 속 나’와의 동화에서 풀리면서 동시에 단애약수의 효력이 다시금 돌았다. 그러자 사적인 감정은 자연스럽게 사그라졌다.
이제야 지금의 상황이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보인다. 결국 다 내가 문제다.
“…잠깐만.”
백아에게 이끌려 가던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애초에 내 몽경 안에 존재하는 세계일 뿐이니 부질없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고맙다고 인사는 하고 싶어.”
“…….”
말없이 날 바라보는 백아의 표정의 묘해진다. 그런 백아와 눈을 맞추며 쓰게 웃었다.
“고맙다고만 말하고 올게.”
쟤는 절대 고맙다고 말 안 할 테니까.
한 번 동화되어 봐서 행동 패턴이 뻔히 읽히는 데다가, 저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이어서 안다. 저 때의 나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스스로가 만든 지옥 안에서 허우적대기 바빴다.
“잠깐만 기다려.”
맞잡고 있던 백아의 손을 놓고 등 뒤의 우사에게로 돌아갔다. 우사는 여전히 ‘나’를 토닥이며 달래 주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어서 그러는 모양이다.
머뭇거리다가 그런 우사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그리고 투박하게 몇 번 쓰다듬은 뒤 도로 손을 뗐다.
…고마워.
속으로 작게 읊조린 뒤, 날 기다리고 있는 백아에게로 돌아갔다.
“가자.”
백아의 손을 먼저 잡으며 말했다. 백아는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이내 나직이 답했다.
“네, 사형.”
묘하게 일렁이는 목소리였다.
흘낏 본 백아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 옆얼굴의 낯빛은 부드러웠지만, 한편으론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잊혀진 기억’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나는 무심코 다시 뒤를 돌아봤다.
사해필성이었던 풍경은 어느새 붉은 안개가 자욱한 어두운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 어둠 속, 깎아지른 암벽지대에 누군가가 서 있다. 내게서 등을 진 채 서 있는 그는 붉은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예복을 입고 있었다. 넓은 소매와 긴 장포 자락에 수놓인 문양엔 귀기가 스며 있다. 느슨하게 반묶음 한 머리를 고정하고 있는 은색 관비녀가 스산하게 빛난다.
저자는… 귀족(귀신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가?
느껴지는 기운이 흉포하다.
그자가 비스듬히 몸을 돌려 나를 돌아본 순간, 얼핏 그 얼굴을 봤다. 어둠에 가려져 입매와 턱선만 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저자는 ‘나’다.
회귀 전, ‘잊혀진 기억’ 속의 또 다른 나.
“……!”
깨달음과 동시에 어디론가 급속히 빨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눈앞이 빠르게 빙글빙글 돈다. 극심한 어지럼증 속에서 깨어난 순간, 잠에서도 깨어났다.
흐린 시야의 초점이 점차 맞아 가며 또렷해진다.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로 상체를 일으키려다가 휘청거렸다. 그대로 쓰러지려는 찰나, 옆에 나란히 누워 있던 백아가 한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백아의 몸 위로 쓰러졌다.
백아의 몸 위에 기댄 채 눈을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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