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분명 지금 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을 거다. 백아와 서로 입이 겹쳐져 있었단 얘기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탓이다.
“저 혼자 결정하기엔 어려워서 사형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
백아가 은근히 내 소맷자락을 잡아 오며 말했다. 소맷자락을 살짝 흔드는 손길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이 당황스러움은 머잖아 심장의 울렁거림으로 바뀌고, 그 울렁거림은 두근거림으로 변했다. 쿵, 쿵, 쿵. 단애약수 효력인지 두근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금세 빠르게 잦아들었다.
이 모든 심적 변화가 불과 심호흡 몇 번 사이에 이뤄졌다.
나는 이제 완전한 평정을 되찾았다. 방금까지 느꼈던 모든 감정들이 대수롭지 않게 다가왔다.
나는 눈앞의 사안에만 집중했다. 한 손으로 턱을 짚으며 고심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은원이 엮여 있다 해도, 서로 일의 경중이 지나치게 차이 나긴 해.”
백아는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나를 보는 눈이 초롱초롱하다.
“한쪽으로 기우는 저울은 으레 추로 해결하는 법이니……. 의원 나리.”
내 옷소매 끝을 쥐고 있는 백아의 손을 잡았다. 백아의 눈이 살짝 커진다.
손을 은근히 맞잡아 오는 백아에 속으로 작게 웃으며 나도 꼭 맞잡았다. 그러곤 백아와 붙든 손을 문곡에게 보란 듯이 들어 보였다.
“우리 쪽 조건을 원 플러스 원으로 해요.”
내가 말했다.
“하나 더하기 하나요.”
얼른 말을 고쳐 다시 말했다.
하나 더하기 하나.
* * *
협상이 끝나고 문곡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백아와 단둘만 남게 되자 주변의 공기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는다. 이제 ‘몽경’과 관련된 얘기가 우리 사이에 오갈 거란 걸 알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거다.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조금 많이 껄끄럽다.
백아와 여태 맞잡고 있는 손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다가,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의원 나리와 말이 잘 통해서 다행이야. 내가 부탁한 것까지 들어준다고 했으니까.”
최대한 평범하게 서두를 꺼낸 뒤,
“음……. …괜찮아?”
최대한 노련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 보려 했지만 이미 망한 것 같다. 다짜고짜 ‘괜찮아?’라니. 내가 이렇게까지 말주변이 없었나.
“내 ‘잊혀진 기억’…, 이제 내가 아는 만큼은 너도 아는 것 같은데. 이번에 ‘잊혀진 기억’을 통해서 내가 본 만큼도 다 봤을 테고. …넌 ‘사아’였으니까. …‘사아’는 ‘우사’의 ‘사’와 ‘백아’의 ‘아’를 딴 거야?”
나도 모르게 불필요한 말이 더해지며 말이 길어진다. 괜한 걸 물으며 백아의 안색을 살폈다. 분명 받은 충격이 클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짐작하고 있던 거랑 확인사살 받는 건 다르니까.
백아는 내 ‘몽경’안에서 너무 많은 걸 알았다. ‘천옥’과 ‘반지’ 그리고 ‘회귀 전의 자신이 먼저 우리의 사형제지연을 끊었단 것’까지.
사형제지연을 끊은 데엔 그 나름의 사정이 있었던 것 같지만, 문제는 우사가 ‘그 사정’에 관련된 무엇도 나와 상의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나는 결국 우사에게 ‘그런’ 사형이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의 백아는 나를 의지하고 따르는 사제다. 그런데 회귀 전의 자신이 먼저 나와의 인연을 끊었단 걸 알게 되었으니 그에 대한 충격 또한 만만치 않을 거다.
나도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우사의 천명’이다. ‘잊혀진 기억’의 내가 ‘우사의 천옥’을 손에 쥔 채 절벽에서 떨어진 것도, 그리고 절벽 위의 ‘천옥을 잃은 우사’가 머잖아 맞이했을 죽음도.
그 모든 비극이 어쩌면 비천정이 말한 ‘우사의 천명’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사의 천명’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형제지연을 끊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회귀 후인 지금은?
지금도 우사에게 그와 비슷한 ‘천명’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나 역시 다시 휘말리게 되는 걸까.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몽경’에서 벗어나기 직전에 본 ‘불온한 것’이다.
그건 사마외도 수준이 아니었다. ‘귀족(귀신)’이었다. 그것도 일개 귀족이 아니라 귀신들의 정점.
그자의 주변에 흐르던 귀기와 음산한 기운이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그런데 그게 ‘잊혀진 기억의 나’라니.
그게 회귀 전 내 과거의 모습이었다는 게 생각할수록 꺼림칙하다.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게 많으니,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잊혀진 기억’을 알아보는 데엔 백아를 끌어들이지 말아야겠다. 백아가 관여하는 방식은 단애약수의 효능도 떨어트리니 말이다.
더불어 백아의 방식을 통해 회귀 전의 내게 동화되어 그때의 감정을 다시 겪고 싶지도 않다.
“……‘사아’. ‘사’는 회귀 전의 사형이 저를 부른 이름인 ‘우사’에서 따온 거고, ‘아’는 회귀 후의 사형이 저를 부르는 이름에서 따온 거예요. 몽경 안의 사형은 회귀 전과 회귀 후의 본원이 합쳐진 상태일 테니, 그런 사형과 마주했을 때 가장 완벽히 불리고 싶어서요.”
긴 정적 끝에 백아가 대답했다.
“그런데 막상 사형이 제 존재를 알아챘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두려움이었어요. 그 모든 걸 본 제가 사형에게 달갑지 않은 존재가 되었을까 봐, 사형이 저를 멀리할까 봐, 그래서 차라리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그냥 자리를 피하려 했어요. 처음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지만, 두 번째에선 사형이 저를 불러 줬고, 마지막엔 사형이 제게 손을 뻗었어요.”
말을 끝맺으며 백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리깐 눈의 긴 속눈썹이 눈매에 짙은 음영을 드리운다.
“……사형, 제게 ‘더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허[許]해 주세요.”
나직이 말하며 백아가 내리깐 시선을 들어 날 똑바로 마주 본다. 단연한 목소리엔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순간순간 무슨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했지만, 전부 다 목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끝내 삼켜졌다.
“……나는 이미 너를 허락했어.”
결국 그 한 마디만 간신히 내뱉었다. 그리고 작게 심호흡한 뒤 곧바로 빠르게 뒤의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네가 내 몽경 안에 있을 수 있었던 거고, 나한테 ‘사아’라 불릴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이번뿐이야.”
백아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그 눈빛이 한없이 깊다.
“더 이상은 안 돼.”
“…왜요?”
“그야… 좋은 것도 아니고, 아직은 우리가 사형제지간이기도 하니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사제한테 보일 만한 꼴은 아니잖아. 우리의 사형제지연에 지난 일이 영향을 끼치길 바라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너한테 약속도 했으니까. 좋은 사형이 되겠다고. 그 약속 기억하지?”
애써 가볍게 낸 어조는 말을 이을수록 자연히 진중해져 갔다. 나는 말을 끝맺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백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 맞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더니,
“……기억해요.”
곧 나직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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