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그래.”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화답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날 바라보는 백아의 표정에 얼핏 그늘이 졌지만 모른 체했다. 날 향한 시선이 복잡하다.
“…저는 사형을 사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제일 좋았어요.”
잠시 후 백아가 말했다. 단순하면서도 그 속의 깊이가 헤아려지지 않는 말이었다.
“나의 사형.”
뇌까리는 어투는 무언가 곰곰이 되뇌는 듯하다.
“…사형.”
곧 백아가 다시 나를 불렀다.
“응. 네 사형 여기 있어.”
한없이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일부러 가볍게 말하며 백아와 시선을 맞췄다.
“지금의 제 천명은 회귀 전의 ‘그 천명’과 달라요.”
백아가 말했다.
‘그 천명’이라면, ‘생명의 은인이 곧 자신을 죽일 이이라. 그 죽음은 생명의 은인이 베푼 은[恩]을 원[怨]으로 되갚으리라.’이다.
‘우사’를 처음 만난 그 순간, 내 운명은 이미 그의 천명에 얽매여 버렸고 내 끝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다른데?”
내가 회귀를 하면서 뭔가 달라진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내가 회귀한 시점이 열여섯 살이다. 백아가 이미 하늘을 등지고 우횡산으로 내려온 시점이다.
“…그런데 그게 달라질 수가 있나? 너는 이미 하늘을 등지고 우횡산으로 내려온 상태인데. 그 늪지대에 있었던 이유는 회귀 전과 같을 거 아니야.”
“달라요. 회귀 전과 그 이유가 달라졌어요, 사형. 회귀 전에 하늘을 등진 게 ‘천명’ 때문이었다면, 이번엔 이거 때문이었어요.”
백아가 자신의 눈가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손끝이 가리키고 있는 건 ‘역린’이었다. 뒤집힌 눈물 모양의 역린.
…다시 보니, 어렸을 때 ‘우사’가 입었던 그 상처와 모양이 흡사하다. 들개가 낸 그 상처.
“이걸 없애는 방법을 찾기 위해 내려왔어요. 겉으로 드러난 역린을 없애지 않는 한 완전해질 수가 없거든요.”
“…완전해질 수가 없다고?”
“제 원신(진짜 모습)을 되찾지 못해요.”
원신이라면… 룡존의 모습을 말하는 건가? 그게 백아의 진짜 모습일 테니 말이다.
“그럼 나랑 같이 다닐 때가 아니잖아. 그것부터 어서 없애야…….”
“‘향하는 방향에 길이 있다.’ 이게 이번 생에 제가 가진 천명이에요. 사형을 따르는 제게 있어, 제가 향하는 방향은 사형이 걷는 길이니 저는 사형과 함께하면 돼요. 그보다 아무래도 현재의 천명과 회귀 전의 천명이 다르단 게 마음에 걸려요, 사형. 회귀의 영향이 천명에까지 미쳐 천명을 바꿀 정도라면…….”
백아는 진중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가, 머잖아 뒤의 말을 이었다.
“…그건 더 이상 단순히 회귀라고 할 수 없어요. 천명이 생겨나기 이전까지 시간을 돌렸거나…….”
그 말은 내가 회귀한 시점이 열여섯 살 때가 아닐 수도 있단 건가? 나는 당연히 ‘그 꿈을 꾼 시점’을 ‘회귀한 시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면, ‘회귀 전의 생’을 아예 통째로 들어내 지운 걸지도 몰라요.”
이어지는 백아의 말에 순간 반사적으로 반문했다.
“지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회귀 전이라고 아는 그 시간들이 아예 처음부터 없던 게 되었을 수도 있단 이야기예요. 그러면 지금이 정말로 첫 번째 삶이 되는 거고, …지워진 진짜 첫 번째 생은 사형의 몽경 안에만 존재하는 게 되겠죠.”
아예 회귀가 아닌 게 될 수도 있다니.
내가 회귀 전이라 알고 있는 그때의 생이 처음부터 없었던 게 될 수도 있다고? 완전히 지워져서?
“……그러면 그때 말한 응보는 뭔데? 분명 인과가 이어지고 있는 거잖아?”
“회귀 전에서부터 이어진 게 아닌, 사형의 존재로부터 이어진 거일 수도 있어요. 그저 전부 사형의 선택에서 비롯된…….”
백아는 말을 끝맺지 않고 흐렸다. 하지만 끝맺지 않는다 해서 내가 아무것도 읽어 낼 수 없는 건 아니다.
결국, 지금의 나를 얽매고 있는 건 회귀 전의 일들이 아니라 나 자신일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정말로 이 삶이 처음부터 응보도, 인과도 없이 그저 나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만 있었다 해도, 내가 나를 얽매니 나는 계속 자유로울 수 없다.
설령 그 생이 지워져 없던 게 되었다 해도, 그 생은 내 몽경 안에 있으니.
“…그럼, 네 역린은? 회귀 전의 너한텐 그런 건 없었어.”
“없던 역린이 생겼다는 건… 보통 천벌을 입었음을 뜻해요. 그건 즉, 하늘의 노여움을 샀단 뜻이고요. 그 상태에서 만약 천벌을 입었던 생이 지워진다면, 천벌을 받았단 사실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된 생에서 처음부터 역린을 갖고 태어나게 되겠죠. 그게 제 본원의 업이 될 테니까요, 사형. 이 역린이 무엇에 대한 빚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빚을 갚아야만 하는 거예요.”
백아가 손을 들어 제 눈가의 역린을 매만졌다. 역시 그때 입었던 그 상처와 무척 흡사하다. 회귀 전 들개에게 당했을 때 입었던 그 뒤집힌 눈물 모양 상처 말이다.
“아무튼 지금 이 회귀가 누구의 소행인지 몰라도 분명 회귀를 발현시키며 아주 큰 희생을 치렀을 거예요. 분명해요. 회귀란 하나의 업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아마 지금도 그 희생을 치르고 있을 테고, 그렇게 점점 그자의 희생이 커지면… 사형, 걷잡을 수 없어져요.”
말하는 백아의 표정이 몹시 엄숙하다. 문득 지난날 백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진 않아요. 설령 그 시간들을 전부 없던 걸로 만들어 버린다 해도 말이에요. 한 번 생긴 업은 본신(인간의 본원)에 새겨지니, 그건 어떻게든 겉으로 드러나게 될 거예요. 본신의 상흔은 육신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니까요.’
“사형. 그자의 희생은 끝내 사형에게 화로 돌아올 거예요.”
백아가 말했다.
“……화로 돌아온다고?”
“지나친 희생을 요하는 구원은, 그 구원 자체를 산지옥으로 만들곤 하니까요. 만약 이 회귀가 정말로 지나친 희생을 필요로 한 구원이라면… 회귀로 빚어진 사형의 현재 삶은…….”
“잠깐, 잠깐만!”
백아의 말에 순간 걸리는 게 있어서 바로 말을 끊었다.
“그 말대로 내가 회귀를 한 거잖아. 그렇다는 건 회귀 전의 생을 통째로 들어냈다 해도 30년도 안 되는 세월이야. 그런데 백아, 네 역린은 200년 전부터 있었던 거잖아? 내가 다시 처음부터 생을 시작했다 쳐도 많이 쳐줘 봐야 그로부터 30년 전부터야.”
“……그러게요. 분명 그런데, 왜일까요?”
나를 보는 백아의 눈빛이 깊어진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다. 나와 맞잡은 손에 힘이 실린다. 나를 응시하던 백아가 나와의 거리를 조금 더 좁힌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다가오는 그를 마주 바라봤다.
“사형이 200년 전에도 있었다는 뜻이 돼요.”
“……200년 전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내 말에 백아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 미묘한 표정은 엷은 미소에 가려졌다가, 우리가 맞잡고 있는 손을 작게 흔드는 손장난으로 이어졌다.
“사형, 그보다 저는, …지금 제게 가장 중요한 건…….”
말을 돌리는 백아의 낯빛이 차츰 어두워진다. 미소가 점차 사그라지며 곧 손장난도 멎었다.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백아가 나를 응시했다. 그 결연한 눈빛에 간절함이 떠오른다.
“이 ‘회귀’, 이게 정확히 어떤 회귀인진 아직 잘 몰라도, 어쨌든 이 ‘회귀’란 것 자체가 지금 사형의 존재 근간이 되었단 거예요. 어쨌든 사형이 지금 이 삶을 살 수 있는 건 그 ‘회귀’가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그러니 그자가 회귀를 위해 치른 희생이 클수록 사형의 삶은 더욱 산지옥이 되고 말 거예요.”
백아의 목소리가 점점 엄중해지다가 끝에선 무척 심각해졌다.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았다.
“회귀에 관여한 모든 자는 업을 갖게 돼요, 사형. …그런데 이 회귀는 사형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서 그자의 희생이 더해질수록 사형이 입을 업보도 커지고 말아요.”
“…업보?”
“네. 그러니 그자가 더는 어떤 희생도 치르지 못하게 막아야 해요.”
백아가 단호히 말했다.
“그러니 사형을 회귀하게 만든 자를 찾는 게 가장 우선이에요.”
“…응. 알았어.”
“……사형.”
날 바라보는 백아의 눈빛이 일렁인다. 묘한 불안감이 묻어나는 그 표정에 나는 일부러 씩씩하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백아. 미리 걱정할 거 없어.”
백아를 달래 주며 말했다. 그래도 백아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아서, 서로 맞잡고 있는 양손을 깍지 껴 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제야 백아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다.
나를 따라 흐리게 미소 짓는 백아를 보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아리다. 아리고 지끈거리는 마음은 찰나의 순간만 내 안에 자리 잡았다가 이내 사그라졌다.
방금 단애약수가 품지 못하게 한 이 마음은… ‘몽경’ 안에 잠들어 있는 그 마음과 같은 종류일까.
부질없는 상념 속에서,
“다 잘 될 거야.”
내가 말했다.
백아는 그런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나직이 답했다.
“…네,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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