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질 사형입니다-64화 (64/141)

<64화>

동시에 단전의 내공이 운공 되며 손끝에 내력이 실렸다. 내력은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뻗어 나가며 바람을 일으켰다.

방금 우리가 나온 방의 겹문이 바람에 의해 거칠게 열어젖혀졌다.

드르륵-!

열린 겹문 너머로 시선을 줬다. 머잖아 방 안에서 백아의 장포 자락이 펄럭이며 날아왔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 장포는 내 손안으로 빨려들 듯 쥐어졌다. 허공섭물이다.

손안에 들어온 장포를 넓게 펼쳐 그대로 백아의 어깨에 둘러 줬다. 옷매무새까지 대충 정리해 준 뒤 손을 가볍게 털었다.

이제야 좀 따듯해 보이네.

백아는 알 수 없는 얼굴로 제게 걸쳐진 장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가자, 백아.”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대답이 돌아오기 전에 먼저 돌아서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 손을 뒷짐 진 채 얼마 걷지 않아 등 뒤로 기척 하나가 따라붙는다.

돌아볼 것도 없이 백아다.

“……감사해요.”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뒤쪽을 슬쩍 곁눈질했다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엷게 미소 지었다.

짧은 복도를 걷는 내내 백아는 나보다 약간 뒤쪽에 있었다. 나를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며 1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확 트인 1층 전면엔 창이 나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그 창 너머 풍경을 보곤 잠시 걸음을 멈췄다.

“눈이네요.”

곁으로 다가와 서며 백아가 말했다.

그 말대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백한 하늘 아래 새하얀 눈송이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나는 남은 계단을 마저 내려간 뒤 일단 1층부터 가볍게 둘러봤다. 혹에라도 남여연, 유계 그 둘이 여기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여관 1층은 한산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탁자엔 몇몇의 객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남여연과 유계는 여관 1층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 밖으로 나가 봐야 된다는 건데.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거리엔 아직 눈이 쌓이지 않았다. 큼지막한 눈송이들을 보며 쓸 만한 법술 몇 개를 속으로 추려봤다.

일단 옷이 눈에 젖지 않게 방비해야 하는데, 옷에 방어 결계를 두르는 건 법술의 효용성을 차치하고서라도 내공이 좀 많이 든다.

…가성비가 영 안 좋은데. 옷은 말리면 그만이니 그냥 눈 좀 맞고 말까.

날리는 눈발의 양을 가늠해 보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저…, 두 분 공자님. 혹 우산이 필요하십니까?”

그런 우리를 주시하고 있던 점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우산. 그래, 우산을 쓰면 되지. 내 견문이 좁았다.

반색하며 점원을 돌아봤다. 점원은 제 양손에 우산을 각각 하나씩 쥐고 있었다.

“이 여관에선 우산도 팝니까?”

“예. 갑작스럽게 눈, 비가 내릴 때를 대비해 몇 개씩 구비해 놓고 있습니다.”

이미 준비된 말인지 점원이 곧장 대답했다. 술술 이어지는 말에 거침이 없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며 점원의 말을 들었다.

정말 좋은 여관이네.

“우리 ‘여주 여관’을 들러 주는 손님들을 위한 것이라 질도 아주 좋고,”

점원이 들고 있는 우산으로 냉큼 손을 뻗었다.

“가격도 아주 쌉니다.”

동시에 점원이 말을 끝맺었다.

나는 우산을 가져오려던 자세 그대로 굳었다. 우산을 향해 내뻗은 손끝이 슬그머니 오므라들었다.

“…가격?”

슬쩍 반문하자 점원이 곧바로 우산의 값을 일러줬다. 과연, 점원의 장담대로 싼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겐 그 정도의 돈도 없었다.

내밀었던 손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거두며 작게 헛기침했다.

“흠흠. 생각해 보니, 무공을 쓰면 돼서. 우산은 됐습니다.”

“아. 무공을 쓸 줄 안다면야 우산은 당연히 필요 없겠군요.”

점원이 바로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나도 마주 고개를 주억거리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필요 없습니다.”

딱 잘라 단언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러곤 우산을 향해 뻗었던 팔을 등 뒤로 뒷짐 지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최대한 선사다운 표표한 분위기를 둘렀지만, 속까진 그럴 수 없었다. 밀려드는 민망함에 뒷짐 진 손이 자꾸만 꼼지락거린다. 속으로 작게 앓으며 손을 꽉 주먹 쥐었다.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자.

“그럼, 이만.”

낼 수 있는 한 가장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뒤, 곧장 몸을 돌렸다. 가능한 빨리 바깥으로 나가겠단 일념뿐이었다.

뒷짐 지지 않은 손으로 급히 문을 열었다.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들이 찬 기운과 함께 온몸에 들이닥친다. 그래도 백아의 술법 덕분에 춥진 않았다.

바깥으로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내리는 눈이 내 몸 위로 떨어지기 전에 법술을 발동시켰다. 내력이 몸을 한 바퀴 돌며 바깥으로 뻗어 나갔다. 공력이었다.

더는 신체에 머물지 않고 법진에 얽혀 법술을 발동시키는 데 동력이 되는 힘을 공력이라고 한다. 공력이 내 머리 위를 한 바퀴 돌며 그려진 법진에 스몄다. 법진은 빛무리를 흩뿌리며 내가 원하는 형상을 빚어냈다.

어디 잘 만들어졌나 확인하려고 고개를 뒤로 젖혀 위를 올려다봤다. 눈보다 흰 새하얀 천으로 이루어진 덮개가 보였다. 은색 우산살에 얽혀 받쳐진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다.

내공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우산대는 생략했다. 어차피 허공에 띄울 거니 불필요하다.

날리는 눈 속에 눈보다 더 흰 우산이라. 나름 운치 있네.

막 만들어 낸 손잡이 없는 우산을 살핀 뒤, 백아를 돌아봤다. 백아는 내 뒤에 서서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눈송이들이 그런 백아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내려앉는다.

저러고 있으면 금방 젖을 텐데.

“이리 와.”

백아를 보며 말했다.

“어서.”

한 손을 내밀며 백아를 재촉했다. 그제야 백아가 내게로 왔다. 내가 만든 우산 아래로 들어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내딛는 걸음 속도에 신경 쓰며 우산을 백아 쪽으로 조금 기울여 줬다. 그러자 백아가 내 곁으로 좀 더 가까이 와 붙었다. 걸을 때마다 서로의 어깨가 스치며 옷자락이 맞닿는다.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피어 있다.

갑작스런 눈이 번거롭고 귀찮을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즐거워 보인다. 마치 이 눈이 거리에 활기를 불어온 것 같다.

장포를 벗어 머리 위를 가리며 지나가는 이들과 마냥 해맑은 얼굴로 뛰노는 아이들.

노점들 위로 색색의 천막이 펼쳐졌고, 잇속 빠른 상인들은 가판대 위에 벌써 우산, 우비, 삿갓을 즐비해 놓았다.

처마 아래에 모여 있는 몇몇의 사람들이 앞으로 손을 뻗어 내리는 눈을 손에 담아보려 한다.

흘깃 시선을 내려 눈이 쌓이기 시작한 거리를 봤다. 발에 채여 이리저리 쓸린 눈들은 회색을 띠고 있었다. 우횡산에 쌓였던 눈과 다르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우횡산의 눈들은 정말 새하얬다. 그래서 가끔 그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하나를 만들어 놓고 며칠 내버려 두면 어느 사이엔가 그 근처에 비슷한 크기의 눈사람이 하나 더 생겼다.

그 눈사람을 만든 게 누구인지 나는 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