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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65화 (65/141)

<65화>

범인을 알아내려고 며칠간이나 잠복했기 때문이다.

범인은 백아였다.

백아는 눈덩이를 굴려 만든 눈사람을 두 팔에 안아 들고선 한참이나 내 눈사람 옆을 서성이며 배회했다. 그러다 결국 내려놓은 곳이 멀찍이 떨어진 대각선 뒤쪽이었다.

나는 그 배치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들었다. 저런 각도로 놓으니 꼭 백아의 눈사람이 내 눈사람을 엿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내 눈사람의 얼굴에 눈 대신 박아 놓은 솔방울을 빼서 뒤통수로 옮겨 꽂았다. 네가 날 보고 있단 걸 안다는 표시였다.

그렇게 꽂아 놓으니 마치, 내 눈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 같은 형상이 되었다.

나는 그 결과물이 나름 만족스러웠다. 네가 거기 있다는 걸 알고 있단 경고가 나름 제대로 표현된 것 같았으니까.

사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런 걸 경고하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백아의 눈사람은 애초에 숨겨져 있지도 않았고, 숨으려 들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백아의 눈사람은 내 눈에 띄는 게 당연한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내 행동이 백아가 바라던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백아를 봐 주는 것.

그 겨울날, 내 눈사람은 백아의 눈사람을 돌아봤다.

“……이번 일이 끝나면 오랜만에 눈사람이나 만들어 볼까.”

문득 꺼낸 말에 백아가 시선을 움직여 나를 본다. 나는 가볍게 웃었다.

“우선 남여연과 유계부터 찾아야겠지. 문곡과 약속한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네.”

나는 한 손을 뒷짐 진 채 느긋이 걸었다.

문곡과 약속한 날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다. 근래에 강령술을 한다면 음기가 가장 강한 날에 할 테니, 보름달이 뜨는 날이 가장 적기이다.

보름달이 뜨기까지를 셈해 보니 시기상으로 대충 5일 정도 남았다. 5일 안에 남소위의 친우 일을 해결하고 사해필성에 잠입해야 한다.

문곡이 사해필성 지하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미리 가 잠입해 있다가 급습해서 오연의 혼을 뺏는 게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바쁘다면 바쁜 일정이긴 한데, 그 둘을 찾는 데 급급해서 지금 이 시간을 그냥 날려 버리기엔 좀……. 응, 좀 아깝다. 이 정경을 즐기는 데 아주 조금쯤은 시간을 할애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의 저울은 금세 한쪽으로 기울었다. 당연히 백아 쪽이었다.

“백아. 그 전에 우리 먼저…….”

어제가 축제 전야제였으니, 오늘 축제 구경이나 조금 하러 가자고 말하려는데, 날 보는 백아의 뒤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다.

반사적으로 그 잔상을 쫓아 눈을 굴렸다. 뒤이어 일련의 무리가 그 잔상의 뒤를 쫓았다.

“……유계?”

툭 말을 내뱉으며 곧바로 눈썹을 찌푸렸다.

방금 쫓기고 있던 잔상의 주인은 분명 유계였다. 순식간에 지나가긴 했지만 급박한 추격전이었단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왜 쫓기고 있는 거지? 혹시 또 소매치기라도 한 건가?

일련의 무리가 지나간 방향을 미심쩍은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백아를 봤다. 백아는 여전히 나만 보고 있었다. 방금 자신의 등 뒤에서 일어난 일엔 아무 관심 없어 보였다.

“‘그 전에 우리 먼저…….’, …그다음은 뭐예요?”

백아가 내게 물었다. 아까 내가 하려던 말의 뒷말을 묻고 있는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상황이 급변했다. 의도치 않게 유계를 찾았으니 그 뒤를 쫓아가야 한다.

앞으로의 일에 유계가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같이 동행하기로 한 상태이니 챙겨 가야지.

“나중에 얘기해 줄게. 일단 쫓아가자.”

유계가 일련의 무리에게 쫓기며 달려간 방향을 턱짓하며 말했다. 백아는 나와 잠시간 눈을 깊이 맞췄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뒤를 쫓는 데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수림과 밀접한 분계선이었다.

인적이 드문 건 물론이고 사위가 한적했다. 숲길에 발을 디디며 주위를 가볍게 둘러봤다. 사해필성 외곽에서도 아주 끝인 것 같네.

눈은 그친 지 오래였다. 함박눈이라서 쌓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금방 멎을 줄이야.

이래선 백아와 눈사람은 못 만들겠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앞의 수풀을 헤쳐 널따란 공터로 나갔다.

남여연을 둘러싼 이들이 내 기척을 느끼고선 일제히 내 쪽으로 검을 겨눈다. 도합 열 개의 검 끝을 마주하고 있자니,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인생, 뭐가 이렇게 다사다난한지 모르겠다. 마음 편히 축제 구경할 틈도 안 주고 말이다.

백아와 함께 유계를 뒤쫓던 와중에 마찬가지로 뒤에 꼬리를 달고 있는 남여연을 발견했다. 그게 이 일의 전말이었다.

유계와 남여연이 처한 상황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유계는 추격을 당하는 중이었고, 남여연은 추적을 당하는 중이었다.

그 둘을 쫓고 있는 이들의 복장은 같았다. 옥색 바탕에 국화가 수놓인 선사복. ‘현교당’이다.

사해필성의 성주가 그 당주인 현교당에서 왜 둘을 쫓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각자 나뉘어 한 명씩 뒤쫓기로 했다.

유계에게 따라붙은 현교당 인사는 네 명이고, 남여연에게 따라붙은 현교당 인사는 대충 열 명은 되어 보였다. 간단한 셈만으로 누가 누구를 뒤쫓을 건지 금방 결정되었다.

잠시 헤어지게 되면서 백아는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 갔다. 다시 만날 때를 대비한 추적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본 백아의 동공은 초록색이었다. 급격하게 선력을 운기하고 있단 방증이었다.

백아는 내게 ‘유계의 일신을 확보하자마자, 어디에 있든 계신 곳을 찾을게요’라고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 말만 남기고 백아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남긴 잔영이 뒤늦게 흐리게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일별한 뒤 남여연을 뒤쫓았다.

그렇게 내가 여기 혼자 오게 된 거다.

여기를 고르길 잘했다. 10대 1은 너무하잖아.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허리춤에 매고 있던 선검을 빼 들었다. 상대는 전부 무공을 익힌 강호인들이다. 무위 수준이 어떤진 정확히 몰라도 지금의 내겐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란 건 안다.

빼 든 선검을 손안에서 가볍게 휙휙 휘둘렀다. 손목을 풀 겸 한 동작이었다. 그런데 상대의 눈엔 시건방진 손장난으로 비쳤나 보다.

내게 검을 겨눈 십[十]인 중 하나가 내게 덤벼들었다. 동시에 내 손 안에서 겉돌던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라 내 앞에서 부유했다. 이기어검술이다.

이거 한 번 할 때마다 빠져나가는 내공이 만만치 않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현재 이 몸은 머릿속의 무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니 차라리 검 혼자 싸우게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내게 달려든 무인의 검과 내 검이 맞부딪치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 순간에 남여연이 갑자기 내게로 뛰어왔다.

“흠?”

남여연의 갑작스런 돌발 행동에 나도 모르게 벙찐 소리를 냈다.

십[十]인 중 누구도 그런 남여연에게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미처 반응할 새가 없었던 거다.

곧장 내게 도달한 남여연은 곧바로 내 오른팔을 움켜잡았다. 얼핏 본 그 옆얼굴은 신경질적으로 구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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