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섰다. 그러곤 한 팔로 남여연의 가슴께를 가로막고 섰다.
“뭐야? 아직 안 끝났어. 비켜.”
등 뒤에서 남여연이 성급히 말했다. 나는 제 분수도 모르는 그 고집을 흘려들으며 자리에서 비키지 않았다. 오히려 남여연에게 물음을 던졌다.
“남 공자, 그보다 궁금하지 않아? 왜 쫓겨야 했는지 말이야.”
힐끔 곁눈으로 본 남여연은 여전히 현교당 인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검 끝을 내린 상대와 달리 요지부동이다. 되레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내 팔만 힘주어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내 옆으로 와 나란히 섰다.
“이미 물어봤어. 이제 와 다시 물어봐야 어차피 아무 대답도,”
짜증 서린 남여연의 말은,
“나는 현교당의 대주 ‘연무진’이오.”
상대의 낮게 갈라진 목소리에 의해 먹혔다.
“뭐?”
남여연이 곧장 예민하게 반응했다. 상대가 대화를 시도했단 게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소협은 누구요?”
연무진이 남여연만을 직시하며 물었다.
“나는 변용술에 조예가 깊소. 그 얼굴, 변용술이 아닌 소협의 진짜 얼굴 아니오?”
겉으론 물음의 형식을 취했으나, 이미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어투였다. 나는 고개는 정면에 둔 채 눈만 굴려 남여연을 봤다.
남여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쪽 눈썹을 까닥 올리고 있었다. 왜 저런 걸 묻는지 모르겠단 얼굴이다. 혼란스러워 보였다.
나는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연무진을 불렀다.
“연무진 대주. 남 공자의 얼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 물음에 연무진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내게 시선을 줬다.
“…그건 네 놈이 상관할 바 아니다.”
“상관이 없다?”
뇌까리며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 말을 듣기엔 이미 내게 검이 겨눠지지 않았소? 응?”
“…….”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건방지단 듯 날 노려보는 연무진과 똑바로 눈을 맞췄다.
“유계는 왜 죽일 기세로 추격하는 거지?”
하오체는 때려치우고 그냥 반말로 말했다. 그러자 연무진 뒤의 현교당 인사들의 기세가 팽배해진다. 주변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지며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연무진은 제 동문들의 기세를 가라앉히거나 달랠 의향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유계? 아, 혹시 그 토끼 가면 말이냐?”
연무진이 대꾸했다. 마지막으로 본 유계는 토끼 가면을 쓰고 있었으니 아마 맞을 거다.
“왜 이 일과 무관한 자들을 끌어들이는 거지?”
“우리 현교당은 사해필성을 수호하는 자경단 역할도 수행한다. 사해필성 내에서 말썽을 벌이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도 우리 현교당의 소관이지.”
말썽?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그새 무슨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남 소협과 토끼 가면은 여기 사해필성 내에서 비무를 벌였고, 그 피해가 양인에게까지 다다랐으니. 이 정도면 현교당이 마땅히 나서야 할 일이고 그렇다면 이제 그 둘에 대한 처분은 우리 현교당 소관인 게 마땅한 것 아닌가?”
엷게 비소를 지으며 연무진이 말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겉으로만 물음을 취할 뿐, 이미 속으론 확정한 어투였다.
아무튼 예상치 못한 말이다. 남여연과 유계가 비무를 벌였었다니.
지금까지 지켜봤을 때 그 둘은 서로가 서로를 챙겨 주는 사이였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봤다. 그런데 뜬금없이 둘이서 비무를 벌였을 줄이야.
“저 말이 정말이야?”
연무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남여연에게 물었다. 연무진과 그 휘하 현교당 인사들이 언제 다시 공격을 감행해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전방을 주시했다.
“아니.”
남여연이 짓씹듯 말했다.
“비무라 할 것까지도 없는, 그냥 개싸움이었어. 내공도 거의 안 썼고.”
“…양인에게 피해는?”
“공중에서 날아다녔는데 무슨. 거기! 내가 무슨 피해를 끼쳤다는 겁니까?!”
현교당 인사들을 ‘거기’라고 지칭하며 남여연이 말했다. 워낙 목청이 큰 데다가 시비조여서 분위기가 더 험악해졌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나는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서로 상반되는 연무진과 남여연의 주장을 전부 다 믿지 않지만, 지금 상황에서 누구를 챙겨야 하는지는 안다.
지금 내가 내 등 뒤에 두고 보호하고 있는 것.
연무진이 움직이기 전에 이기어검술을 펼쳤다. 남여연의 손에 쥐여져 있는 댕댕이 내 공력을 머금은 채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언뜻 보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보이겠지만, 그 한 획은 지금까지 그린 법진의 마무리였다.
이때까지 댕댕이 적들의 공격을 쳐내며 한 검무의 진짜 목적은 법진을 그리는 데 있었다. 이때까지 교묘히 법진을 그려 왔고 거기에 마침내 마지막 한 획이 더해지는 순간, 내 큰 그림이 완성되었다.
단전의 내공이 완전히 바닥나는 걸 느끼며 허공에 떠오르는 법진을 봤다.
마침내 법술이 발동되었다.
공력의 흐름을 눈치챈 연무진의 두 눈이 크게 뜨인다.
“연[連]법진?!”
경악으로 커진 연무진의 목소리를 필두로 일순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그 소란마저 전부 다 법진이 삼켜 버렸다.
이제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을 통해 발휘된 강제전이 법술이었다. 도착 장소까지 상세히 정하기엔 가진 내력이 부족해서 아무 데나 임시로 정해 날려 버렸다.
왜 우리가 순간이동 하지 않고 상대를 강제로 전이시켜 버렸느냐, 그건 이 법술은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수 없으면 금방 붙잡힐 수가 있다. 그러니 상대를 보내 버리는 게 최선이다.
“어서 가자. 내공이 부족해서 멀리 보내진 못,”
“방금 그거 연[連]법진이야?!”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남여연이 급히 물었다. 흥분으로 높아진 목소리엔 의문과 의심, 그리고 놀라움이 서려 있다.
“내력과 공력은 나와 엇비슷한 수준 같은데, 가진 법술의 수준이 너무 높잖아! 이게 말이 돼? 역시 사술……!”
아직 남여연의 손에 들려 있는 댕댕에게 물끄러미 시선을 줬다. 내 시선을 쫓아 제 손에 쥐여 있는 댕댕을 본 남여연이 입을 꾹 다문다. 하지만 깊게 골이 팬 미간엔 여전히 미심쩍음이 서려 있었다.
“……사술이 아니라면 뭔데?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연[連]법진’은 삼현 이상의 경지잖아.”
내게 댕댕을 돌려주며 남여연이 말했다. 나는 그것을 돌려받아 허리춤에 패용했다.
‘연[連]법진’.
연[連]법진의 ‘연[連]’은 ‘잇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미완성으로 끊긴 법진은 그대로 허물어져 사라지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연[連]법진은 법진을 끊어서 나눠 그려도 완성시킬 수 있다.
법진이란 완성되기 전까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절정의 고수가 아닌 이상 그리다 만 법진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다.
물론, 알아내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연[連]법진을 처음 펼칠 때부터 그 자리에 있으면 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상대의 기도를 읽고 내공의 흐름을 느끼며 허공에 그려지는 공력의 궤적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연[連]법진을 격파할 수 있다.
사실상 파훼가 굉장히 어려운 법술인 거다. 그러니 웬만해선 쉬이 벗어날 수 없다.
“삼현에서도 극치에 다다라야 하잖아.”
날 보는 남여연의 눈빛에 얼핏 경외심이 스친다. 불능한 것을 보는 눈으로 날 보며 남여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너… 뭐야?”
남여연이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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