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나는 대답 없이 남여연을 바라보았다.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선인, 오연의 사람이어서 그런 거야?”
잠깐의 침묵 끝에 남여연이 이어서 물었다. 그 말에 순간적으로 손끝이 움찔 떨렸다.
‘오연의 사람’.
남여연이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한 건지 안다. 선인과의 관계가 깊은 만큼 너도 뭔가 특별한 거냐는 물음이겠지.
알지만 거슬린다. 미간을 옅게 찡그리며 남여연을 똑바로 직시했다.
“아니야.”
딱 잘라 부정했다.
이제 내게 스승은 없다. 나는 그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거고, 내게 남은 건 사형제지연 뿐이다.
“내가 공력에 맞지 않는 경지를 가지고 있는 건, …기연을 얻었기 때문이야.”
‘회귀’도 어떻게 보면 ‘기연’이겠지. 따져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리고 내 사람은 한 명뿐이야.”
“한 명?”
남여연의 반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백아.”
그 이름을 소리 내 입에 담는 순간,
“네.”
등 뒤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두 손이 뒤에서부터 내 양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청아한 향이 부드럽게 밀려온다.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겠다.
내 앞쪽으로 은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옆얼굴이 시야 가장자리로 얼핏 들어온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백아를 돌아봤다.
“다녀왔어요.”
백아가 내게 말했다. 낮은 미성의 목소리는 온유했다.
* * *
백아의 술법에 기대 다시 돌아온 저잣거리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길거리에 내려앉았던 눈들은 이미 녹아 흔적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둡고 습한 곳엔 아주 조금씩 남아 있었다. 좀처럼 눈길이 가지 않는 좁은 틈새나 골목길 구석 같은 곳 말이다.
가게마다 내건 등에 하나둘 불이 들어온다. 아직 늦은 오후인데 겨울이라 그런지, 이른 황혼이 멀리서부터 어스름히 밀려들고 있다.
고개를 뒤로 젖혀 벌겋게 노을 진 하늘을 올려다봤다.
곁을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에게서 말소리가 소란스럽게 쏟아진다. 그 왁자지껄함 속에서 누군가의 담화가 귀에 들어왔다.
“아까 눈 내린 거 알아?”
‘눈’이란 단어 때문이었다.
“동화절에 내리는 눈을 함께 맞으면 인연이 생긴대.”
“인연?”
“응. 어느 때고 헤어져도 언젠가 동화절에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
담화를 나누는 말소리는 축제의 번잡함 속으로 금세 사라졌다. 하지만 그 말의 여운은 내 안에 남았다. 나는 아까 들은 담화의 자취를 쫓아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백아가 바로 그 방향의 반걸음 뒤에 서 있었다.
나보다 반걸음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던 거다.
“오늘의 이 축제…, 동화절인가 봐.”
백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네.”
아정한 낯빛으로 백아가 답했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조금 늦춰 백아와 나란히 걸었다.
남여연과 유계는 바로 앞에서 서로 다른 곳을 보며 걷고 있었다. 재회한 후부터 둘 모두 쭉 이 상태였다. 남여연은 못마땅하단 듯 콧방귀를 뀌었고, 유계는 미간을 구긴 채 무시로 일관했다. 둘 다 서로에게 앙심이 남아 있는 듯했다.
재회하자마자 우리는 멱리와 가면부터 샀다. 백아가 전리품으로 현교당 인사들의 쌈짓돈을 챙겨온 덕이었다.
방립을 사는 남여연 옆에서 나는 멱리를 샀다. 백아와 유계는 새로 가면을 사서 얼굴을 가렸다. 둘 모두 반가면 이었다.
백아의 반가면에는 붉은 꽃잎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얼핏 보면 요사한 핏자국으로 보였다. 반면 유계는 웃는 도깨비 가면이었다.
“동화절이 뭐 하는 날인지 알아?”
내가 물었다.
“알다마다. 종이로 접은 꽃등을 서로 주고받으며 한 해가 잘 마무리되길 기원하는 날이잖아.”
대답은 앞에서 들려왔다. 답을 마친 남여연이 등을 진 채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맞아. 그런데… 미처 몰랐던 게 하나 더 있더라고.”
답을 받아치며 나는 앞으로 시선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두 손은 뒤로 돌려 뒷짐을 진 채 걸었다. 새로 산 멱리의 너울이 시야를 스치듯 하늘거린다.
“아까 그 이야기 말인가요?”
이번엔 유계가 답했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응.”
나는 가볍게 답하며 입을 열었다.
“‘동화절에 내리는 눈을 함께 맞으면 인연이 생긴다.’ …언제 어느 때고 헤어져도 한 번은 다시 재회할 수 있는 인연.”
옆에서 백아가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래 봐야 호사가들이 멋대로 지어낸 말들일 뿐이잖아.”
남여연의 산통을 깨는 말은 그대로 무시하며 힐끔 시선을 돌려 백아를 봤다. 백아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백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 물음에 백아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 답했다.
“정말이면 좋겠어요.”
그 어조는 낮고 부드러우며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면 한 번 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기회?”
내 반문에 날 보는 백아의 눈빛이 깊어진다.
“보통, 헤어짐이 뜻하는 건 인연의 다함이라 생각해서요.”
인연? 우리 사이의 인연을 말하는 거면… ‘사형제지연’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인연이 다했다’는 말은 너무 비약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해에 단 하루뿐인 동화절’에 기대야만 하는 재회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음.”
낮은 침음을 흘리며 혼자서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하기야, 애초에 이 천지간에 ‘영원함’이랄 것이야 없으니, 언젠가 이 인연도 끝이 날 거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게 되면 그건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 되는 건가?”
문득 떠오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끝이 나도 다시 시작되는 인연이라면, 인연에 인연이 계속 이어져 나가는 거고…, 그렇게 되면…….”
이어지는 내 말을 듣는 백아의 눈매가 살짝 갸름하게 접히며 눈웃음 짓는다. 엷은 미소를 띤 얼굴이 몹시 수려하다. 미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가 내게 단정히 답했다.
“그야말로 ‘영원함’이네요.”
그 대답에 나는 순간 멈칫거렸다. 살짝 크게 뜬 눈으로 백아를 바라보다가, 지금 우리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어딘가 묘하단 걸 깨달았다.
“…그러게.”
왠지 좀 낯간지러워서 어색한 웃음을 띠며 대꾸했다.
그야말로 ‘영원함’이라. 예상치 못한 대답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나도 내심 같은 생각을 했던 터라 조금 놀랍기도 한 답이었다.
입가의 열없는 웃음이 차츰 부드러운 미소로 변모해 가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응, 맞아.”
연거푸 긍정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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