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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70화 (70/141)

<70화>

번화한 거리의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과 번잡함. 그 안에 스며 있는 활기와 생기. 지나가는 몇몇 이들의 손에 꽃등이 들려 있다.

“우리도 꽃등 하자.”

내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한 말이었는데, 막상 말하고 보니 정말 하고 싶어졌다.

“꽃등?”

“꽃등이요?”

앞장서서 걷고 있던 남여연과 유계가 나란히 돌아서며 물었다. 동시에 말이 겹치자 둘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진다.

남여연은 유계를 곁눈질하며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유계는 작게 헛기침하며 곧바로 표정 관리를 했다. 예의 그 어딘가 뻣뻣한 미소였다.

“응. 갈 길이 바쁘긴 하지만 그래도 때마침 동화절이기도 하니까.”

나는 제안하며 남여연과 유계, 백아와 차례차례 눈을 맞췄다. 남여연은 팔짱을 낀 채 별말을 하지 않았고, 유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백아는 미소를 지었다.

“전 좋아요.”

백아가 답했다.

“꽃등은 직접 접을 거예요, 아니면 접어 놓은 걸 살 거예요?”

이어진 백아의 물음에 남여연과 유계가 한두 마디씩 말을 보탰다. 하지만 백아는 그 둘의 의견에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뭐가 좋아요?”

내게만 재차 물었다. 그에 무심결에 답하려는 순간,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백아의 입버릇이 사라졌다. 전에는 버릇처럼 ‘사형’이라고 꼬박꼬박 불렀으면서, 언제부터인가 호칭을 교묘히 생략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고. 그래서 이제야 눈치챘다.

새삼스런 기분으로 백아와 눈을 마주했다. 내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자, 백아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아니면 백아의 의도적인 행동인 건가? 하지만 의도적인 거라면, 왜? 섣불리 무어라고 단정 지어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대놓고 묻기에도 조금 저어된다.

“어떡할 거야? 언제 현교당 놈들이 쫓아올지 모르는데.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야?”

어깨를 으쓱이며 남여연이 말했다. 삐딱하게 서선 오른 다리를 떨고 있다. 발로 지면을 탁탁 치는 모습에서 초조함이 읽혀졌다.

“꽃등을 접는 데 시간이 소요되니 그냥 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남여연을 흘낏 일별하며 유계가 말했다.

“못해도 보름달이 뜨는 밤까지는 사해필성 내 지하에 가야 한다고 했으니, 남은 시간은 길어 봐야 5일 남짓. 5일 안에 그 친우란 자와 만나야……, 그러고 보니, 접선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할 듯한데. 어떤 식으로 접선할 생각이지 …요? …남 공자.”

존대인 ‘요’를 덧붙이기 직전에 유계의 숨이 일순 깊어졌다. 속에서 치미는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했다. 유계는 고개는 내 쪽으로 고정한 채 눈만 굴려 남여연을 봤다.

“안 알려 줄 건데?”

퉁명스런 어조로 답하며 남여연이 팔짱을 풀었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제 목 뒤를 꾹꾹 눌렀다.

유계의 치켜 올라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계가 고개를 돌려 남여연을 냉랭히 응시한다. 방립 아래 남여연의 변한 얼굴을 보는 유계는 그에 대해 일절 언급도 하지 않았다. 싸늘한 눈초리로 보아, 상대하기 싫단 무시에 가까운 침묵이었다.

나 또한 남여연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바뀐 얼굴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적어도 남소위의 친우란 자와 접촉하기로 한 장소에 다다를 때까진 말하지 않을 생각이다.

자신의 변한 얼굴에 대해 알게 되면 또 한참 혼란스러워하며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기다렸다가 가장 적기의 순간에 말할 생각이다. 이를테면 남소위의 친우와 조우하기 직전이라든가.

그때라면 혼란도 길게 이어지지 못할 테지. 곧이어 남소위 친우 쪽에 온 정신을 빼앗길 테니 말이다.

그래서 남여연은 아직 제 얼굴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방립을 살 때도 면경 한 번 보지 않고 대충 하나 사서 꾹 눌러썼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까부터 남여연과 유계,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심상치 않더니 일촉즉발이다.

뻣뻣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유계의 낯엔 비정함이 감돌았다. 그 차가움이 지나쳐 우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여연도 그런 유계를 마주 노려봤다. 얼굴에 불같은 성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남여연이 입을 삐죽이자 송곳니가 얼핏 드러났다. 심술과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낯이었다.

“뭐.”

그 한 마디로 남여연이 유계를 도발했다. 대치하고 서 있는 둘의 기세가 점점 험악해진다. 머잖아 유계가 말했다.

“야.”

이번에도 단 한 마디였다. 유계가 놓은 맞불에 남여연이 화르륵 반응한 건 당연지사였다.

“야?”

남여연이 한쪽 눈매를 찡그리며 반문했다.

“그래, ‘야’.”

차분히 응수하는 유계의 기세는 싸늘했다.

“본인이 직접 스스로를 더 이상 남해검문 사람이 아니라 했고, ‘여연’이란 이름 역시 남해검문에 얽힌 부산물일 뿐이라면, 지금 너는 대체 뭐지?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해?”

남여연의 미간이 와락 구겨진다.

“불러 줄 이름도 없군.”

유계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가시 돋친 어투였다. 남여연의 소매 아래 두 손이 꽉 주먹 쥐어졌다.

“……자고.”

깊이 숨을 삼킨 뒤 남여연이 말했다.

“그게 앞으로 내가 불려질 이름이다……!”

한 박자 쉰 뒤 바로 급발진하며 남여연이 꽉 쥔 주먹을 그대로 휘둘렀다. 동시에 유계도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둘의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쾅-!

서로의 내력이 충돌하며 순간 강한 기파와 함께 주변으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매서운 바람이 내게 닿기 직전에 백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나와 마주 선 백아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거세게 흔들리며 넓게 너풀거린다. 그 너머로 바람에 흔들리는 등과 하늘로 떠오른 수 개의 꽃등들이 보였다.

갑작스런 바람에 당황한 이들의 수런거림이 사방에서 들려온다. 돌풍 때문에 꽃등을 놓친 이들이 날아간 꽃등을 쫓아 곁을 스쳐 지나간다.

바람은 금세 멎었다. 남여연과 유계가 아웅다웅 다투는 소리, 그리고 주변의 소음과 축제의 풍경이 차츰 멀게 느껴진다. 내 앞에 선 백아의 존재감이 그 전부를 덮어 버릴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비켜.”

잠깐의 정적 끝에 내가 말했다. 내 앞을 막아서지 말란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 백아는 날 가만히 응시하다가 곧 눈을 내리깔며 옆으로 비스듬히 비켜섰다. 말없이 움직이는 백아를 쫓아 눈을 굴렸다.

“백아.”

그냥 지나치려다가 마음을 달리해 백아를 불렀다.

“내가 네 사형이야?”

내 물음에 백아가 나를 일별했다. 백아의 눈매가 다시 내리깔리며 서로 잠시 맞닿았던 시선이 어긋났다.

“……사형.”

잠시간의 침묵 끝에 대답이 돌아왔다. 무겁게 깔린 목소리였다.

나는 백아에게서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남여연과 유계가 서로 손바닥을 맞댄 채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어서, 남여연과 유계의 머리카락이 조금씩 흔들리며 옷자락이 은근히 펄럭인다.

“내력 거둬.”

남여연이 이를 악물며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뭘 믿고?”

쌀쌀맞은 목소리로 유계가 응수했다.

“…좋아. 그럼 하나, 둘 하면 동시에 거두는 거야.”

남여연과 유계가 한목소리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당연히 훈훈한 광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젠 아예 서로 맞대지 않은 다른 한 손과 자유로운 다리로 상대를 자잘하게 공격했다.

그래도 눈치는 아직 남아 있는 건지, 최대한 남들의 이목을 안 끌려고 소극적으로 다투는 듯했지만 여긴 길 한복판이었다. 이미 알게 모르게 주변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내가 분명히 ‘둘’ 하면 거두랬잖아! 신의도 없는 놈!”

남여연이 목소리를 낮춰 소리 질렀다.

“그 말을 한 본인도 지키지 않는 약속에 따질 신의가 있나?”

“그건……! 내가 네 놈의 뭘 믿고!”

“피차 마찬가지야.”

결국 둘 다 피차 똑같은 군상이란 결론에만 이르는 아웅다웅이었다. 남여연과 유계도 그걸 깨달았는지 말다툼을 멈추고 입을 꾹 다문다.

이래선 싸움이 안 끝나겠다. 속으로 작게 혀를 차며 움직였다. 일단 저 둘부터 서로 떼어 놓을 생각이었다.

두어 걸음 앞으로 내딛기 무섭게 백아가 내 옷소매를 잡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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