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이 사제는 그간 사형에게 많은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백아가 말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작았지만 내 귀에는 그 무엇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평소보다 더 정중한 어투였다.
나는 걸음을 멈춘 채 차분히 숨을 골랐다.
‘보살핌’이라. 내가 너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위했던가.
복잡하게 엉켜 오는 심상을 내리누르며, 천천히 몸을 돌려 백아를 비스듬히 돌아봤다. 백아는 나를 보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그런데 고작 바람조차 막아 드릴 수 없다면, 저는 사형에게…….”
말을 잇다 말고 백아가 잠시 멈췄다.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 눈썹이 미미하게 일그러진다.
“…평생 아무것도 갚을 수 없을 거예요.”
곧 이어서 백아가 내게 말했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진지하다.
“…나는, 나를 알고 싶다는 너를 내 곁에 뒀을 뿐이야.”
우리의 동행이 시작된 계기를 짚어 말했다.
“사형의 곁을 허락받은 것부터가 이미 사형의 보살핌이었단 것을 이제 알았어요.”
“아니야. 나는…, 그냥 나 자신을 보살핀 거야. 네게 나쁘게 기억되기 싫었으니까.”
“…….”
“정 내게 무언가 갚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위해.”
“…사형이 원하는 방식이요?”
“나는 백아 네게 괜찮은 사형으로 남고 싶어.”
“‘괜찮은’ 사형이 뭔데요?”
백아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답이라서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음…. 가령 사제를 지키다가…….”
‘다치거나 죽는 것.’
속으로 삼킨 그 뒷말이 진심이었지만 그 말을 그대로 하는 대신,
“…사제의 영웅이 되는 거?”
좀 더 완곡하면서도 가볍게 돌려 말했다.
“그러면 사형의 영웅은 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지금처럼 배분으로 따지면-”
“…….”
“사형에겐 스승님만인 거예요?”
내 침묵을 마주한 채 백아가 물었다. 낮게 힘이 실린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어 있었다. 백아의 굳게 다물린 입매를 잠시 보았다가, 뒤의 남여연과 유계를 힐끔 일별했다.
사방 어딘가에 지금 우리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귀가 있을지도 모른다. 백아도 그걸 염두에 둔 건지 ‘오연’이란 이름 대신 한때 그가 우리에게 가졌던 ‘의미’를 말했다.
‘스승님.’ 이젠 너무 멀게 느껴지는 호칭을 속으로 작게 되뇌었다.
“……보통 사형은 사제를 지키고, 스승은 제자를 지키는 법이니까 그렇겠지.”
다른 상념에 빠져서 별생각 없이 말했다. 내 대답을 들은 백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볼 겨를도 없었다. 한때 ‘스승’이란 이름으로 곁에 있었던 오연에 관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꽉 찼기 때문이다.
오연은 나를 거두고 보살펴 줬다. 그리고 나를 망치고 백아를 해쳤다. 제자 둘 중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그는 제대로 된 스승이 아니다.
그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오연은 나한테 좋은 스승이 아니었다. 그가 내게 한 수많은 말들이 내 안에 응어리져서 아직도 날 괴롭히고 있다. 결국 내가 어떤 제자가 될지 결정한 건 오연인 거나 다름없다.
제자를 만드는 것은 스승이고, 사제지연을 결정짓는 것 또한 스승이니까. 그러니 나는 오연에게 그 어떤 회한도 갖지 않을 거다.
다만, 그 ‘스승’이란 호칭에는 아주 일말의 씁쓸함이 남아 있다.
“……어쨌든 이제는 우리 둘뿐이니까.”
지금의 대화를 선선히 마무리 지으며 백아를 봤다. 이제야 제대로 본 백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여전히 내 옷소매를 붙들고 있는 손의 끝이 하얗게 질려 있다. 너무 힘이 들어간 탓이었다.
백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끝내 목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나는 그 찰나의 입 모양을 읽었다.
분명 ‘사형’이었다. 그래서 들려온 말이 없었음에도 백아가 나를 부른 거란 걸 알았다.
“백아?”
백아의 숙인 고개 아래로 얼굴을 들이밀며 불렀다. 그제야 백아가 시선을 들어 나를 봤다. 낯에 수심이 서려 있다.
“왜 그래?”
의아함과 걱정이 섞인 내 물음에 백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도로 표정을 풀고 흐리게 미소 지었다. 묘하게 이지러진 웃음이었다. 이렇게 웃는 백아는 처음 봤다.
“너…….”
역시 뭔가 이상해서 추궁하려는 그때,
“알았어요.”
백아가 먼저 답했다.
뭐? 반사적으로 속으로 반문하며 짐짓 미간을 찡그렸다.
이제 백아는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방금까지 내보였던 동요와 겉으로 드러났던 수심들은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꽃등 하러 가요.”
아직 잡고 있는 내 소매 끝자락을 살짝씩 흔들며 백아가 말했다.
“어? 아, 응.”
생각지도 못한 말에 순간 엉겁결에 답했다. 대답한 직후에야 방금 내 목소리가 평소보다 크고 높았단 걸 깨달았다.
멋쩍음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사이 백아를 추궁할 타이밍을 얼떨결에 놓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백아와 함께 남여연과 유계 쪽으로 가고 있었다.
흘낏 시선을 내려 내 옷소매를 봤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맷자락이 어딘가 허전해 보인다.
…손은 언제 놓은 거지?
내가 옷소매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백아는 남여연과 유계와 대치해 섰다.
남여연과 유계는 여전히 서로 다투는 중인 것 같았지만, 둘 다 백아를 더 경계하고 있었다. 그래서 2:1 구도 같은 느낌이 미묘하게 형성되었다.
나는 슬그머니 백아의 옆으로 좀 더 붙었다. 그러자 2:2의 구도로 나뉘어졌다.
남여연이 아니꼽단 얼굴로 나와 백아를 번갈아 쳐다본다. 유계도 알게 모르게 김이 샌 눈치였다.
“가재는 게 편이라더니. 그렇게 싸고돈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라고. 오히려 사제 버릇만 망치지. 뭐, 이미 거하게 망한 것 같지만.”
남여연이 말했다.
……버릇을 망친다고?
상상도 못 한 말에 순간 벙쪘다가 나도 모르게 바로 옆에 서 있는 백아를 봤다.
백아는 아정한 자태로 서서 한쪽 입꼬리를 느슨하게 올리고 있었다. 남여연을 응시하는 시선이 냉소적이다.
그 모습이 툭하면 흥분해서 발끈하는 남여연과 대조를 이룬다. …아무리 봐도 백아가 훨씬 어른스럽고 여러모로 더 나은데.
그래, 확실히 낫다. 나은 걸 떠나서 아예 격이 다르지. 그리고 백아가 내가 망친다고 해서 망쳐질 성품도 아니고.
백아는 근본적으로 하늘 위의 존재다.
다시 남여연을 돌아보며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입 발린 말을 못 한다면 입바른 말이라도 해야지.
“그런 걸 따져 묻기 전에 먼저 스스로부터 돌아보지 그래?”
“뭐?”
“됐고.”
남여연의 반문을 딱 잘라 끊으며 말했다. 이 언쟁은 상종할 가치가 없다.
“내가 뭐가 어때서?!”
“네가 어떤지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겠지.”
눈썹을 까닥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러자 남여연이 더 약이 올라선 얼굴에 붉은 기가 돈다.
“그럼 넌 계속 이대로 사제를 끼고 살기라도 하겠단 거야? 그게 네 사제한테도 독이란 거 몰라?!”
언제부터 그렇게 백아를 위했다고. 제3자의 주제넘는 오지랖에 인상을 찡그리는 것과 동시에,
“…쓸데없이 나서긴.”
유계가 말했다. 스산한 목소리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 유계의 시선이 일순 백아에게 힐끔 닿았다가 거둬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유계가 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빠르게 세어진 숫자가 ‘3’을 고한 순간 남여연과 손을 맞대고 있던 유계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마치 자신은 여기서 빠지겠단 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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