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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72화 (72/141)

<72화>

“야…!”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유계에 남여연이 당황한 건 당연지사였다. 현재 둘은 서로 손을 맞댄 채 손바닥을 통해 내력을 겨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여연은 황급히 한 걸음 내디뎌 유계에게 따라붙으려 애썼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손을 떼어 버리면, 손을 뗀 일방은 상대의 내력에 고스란히 노출돼 심력이 상하게 된다.

남여연이 유계의 사정을 고려했기에 이렇게 따라붙으려 애쓰는 건진 몰라도, 분명한 건 손을 뗀 일방만 다치는 게 아니란 거다.

그 맞은편의 상대 또한 허공에 남은 내력의 기운에 휩쓸려 크게 다치게 된다.

그래서 서로 손바닥을 맞댄 채 내력을 겨루는 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일순의 방심이 패착으로 귀결되고, 수월하게 이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겨루기는 둘이 합심해서 동시에 내력을 거둬야만 상호 안전하게 끝낼 수 있다. 아니면, 한쪽이 나머지 한쪽을 완전히 압도하거나.

남여연은 유계를 더 따라가지 못하고 다급히 손을 거뒀다. 동시에 유계 또한 손을 거둬 등 뒤로 뒷짐 졌다. 그러곤 아예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갑자기 끊긴 내력이 허공에 동심원처럼 퍼지며, 그 공력이 바람을 일으켰다.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마구 나부낀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

남여연이 성질내며 말했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남여연의 흉흉한 시선이 유계에게 향했다. 유계는 뒷짐 지고 있던 손을 풀어 팔짱을 낀 채 섰다.

유계의 시선이 한순간 눈치 보는 것처럼 백아를 일변했으나, 그건 정말 찰나였다. 유계는 그 외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더니.”

백아의 나직한 말이 나른히 울려 퍼진 건 그때였다. 평이한 어조에 가벼운 어투는 시비조라기보단 같잖아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옛 선현의 말이 정말 틀릴 게 없네요, 사형. 독이 될지 약이 될지에 대해 주제넘는 말을 하는 것도 그렇고.”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하는 백아의 얼굴엔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남여연과 유계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일타쌍피였다.

남여연은 분에 못 이겨 뭐라 입을 달싹이려 했지만 막상 말을 하려니 할 말이 없는지,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백아는 그런 남여연을 오래 상대하지 않았다.

백아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마침 나는 남여연이 조금 전에 한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상기된 말들 중 유독 거슬리는 건 한 단어였다.

바로, ‘독.’ 그 단어가 유독 거슬렸다. 그냥 같잖은 말이라 생각하고 넘기면 그만인데, 자꾸만 멈칫하게 된다.

이 ‘독’이 해치는 대상이 내가 아닌 백아라고 명시되었기 때문이다.

회귀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보통의 사형으로서 백아를 대했는데. 챙겨 주고 잘 대해 주려고 노력한 것밖에 없는데, 그마저도 백아에게 ‘독’이라고 한다면 나보고 뭘 어떡하라고.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든, 어떤 행동을 하든 그 전부가 결국 독밖에 될 수 없다면 나는…….

“동전의 앞뒤처럼 독과 약도 결국 일종의 양면성이에요.”

그때 백아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내 바로 옆에 서 있는 백아와 내 손등이 서로 스치듯 맞닿았다.

“쓰이는 의도에 따라 결정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갈리게 돼요.”

나와 눈을 맞추며 백아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3자가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란 거죠.”

보란 듯이 남여연을 한 번 곁눈질한 뒤 백아가 다시 나를 봤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내가 백아에게 했던 언행들은 전부 이 관계에 약으로 쓰이길 바랐던 것뿐이다. 내 행동의 바람은 독과 약으로 구분하자면 약이다.

이제 남은 건 백아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다. 백아가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갈리게 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막상 말로 물으려니 조금 멋쩍기도 하고, 돌아올 대답이 신경 쓰인다.

“…좋아해요.”

내 눈을 직시하며 백아가 말했다.

“정말 좋아하고 있어요.”

재차 말하는 목소리가 진중하다. 엷게 미소 짓는 입매의 호선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예쁘다. 그 아래 살짝 패인 볼우물이 일순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장이 울렁거린다.

쿵-.

한순간 크게 뛰었던 가슴은 곧 다시 잠잠해졌다. 심장의 울렁거림도 이내 사라졌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대답하며 시선을 돌려 주변을 가볍게 둘러봤다. 남여연은 심통 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씰룩인다.

“잘들 논다.”

작게 투덜거리며 남여연은 아예 팔짱을 껴 버렸다. 상종도 하기 싫단 무언의 의지가 느껴졌다. 반면 유계는 예의 그 미소를 띠고 있었다. 뻣뻣한 미소가 나를 마주할 때만 비교적 자연스러워진다.

“사형제지간 사이가 좋군요.”

팔짱을 풀며 유계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좋아.”

말하면서도 기분이 좋아 목소리도 절로 밝아진다.

“자, 그럼 이제 그만 갈까?”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해서 화제를 전환하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모두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나를 보는 이들을 둘러보며 뒤의 말을 이었다.

“꽃등 사러.”

내 말에 남여연이 먼저 휙 몸을 돌렸다.

“하여튼……. 빨리 가자!”

남여연의 외침에 이어 유계가 몸을 돌려 그 뒤를 쫓았다. 나는 바로 곁에 있는 백아의 손을 내가 먼저 잡았다. 은근히 손등이 스치며 닿는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손목을 안으로 꺾으며 꼭 감싸 잡자 곧바로 마주 잡아 온다.

“가자.”

앞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꽃등 살 거예요?”

나와 걸음 속도를 맞추며 백아가 물었다. 어딘가 새초롬한 목소리였다.

“어떡할까?”

내가 되묻자,

“사는 게 좋아요?”

백아가 다시 되물어 왔다.

“음…….”

나는 잠시 고민하며 침음을 흘리다가 저 멀리서 빨리 오라며 손짓하는 남여연과 유계를 보곤 피식 웃었다.

“지금은 사고, …다음 동화절 땐 직접 만드는 걸로 하자.”

“……다음.”

내가 한 말을 되뇌는 백아의 눈빛이 일순 상념에 잠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자니, 백아가 곧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다음에는 우리 둘이서 와요.”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나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러자.”

양 뺨과 귓불에 홍조가 떠오른 백아를 보며 말했다.

“그때는 좀 더 느긋하게 있을 수 있겠지. 꽃등도 직접 만들고 말이야.”

“…아까 헤어지기 전에 하려던 말은 뭐였어요?”

“하려던 말?”

“‘그 전에 우리 먼저…….’ 그다음이요. 그때 뒷말을 다 듣지 못했잖아요.”

아, 남여연과 유계를 뒤쫓기 직전에 하려던 말을 말하는 건가.

“아- 축제 구경하러 가자는 말이었는데. 그때 내가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이 백아, 너로 인해 다시 이어지고 있었네.”

“……이어져요?”

“응.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대화가 어떻게 보면 그때 하려던 말의 연장선이거든.”

“…….”

내 말에 백아는 말없이 엷게 미소 지었다. 가느다랗게 호선을 그린 입술이 머잖아 작게 달싹여 나를 불렀다.

“사형, 저기 봐요.”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서 남여연과 유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그들의 너머로 보이는 하늘엔 몇 개의 꽃등이 바람에 밀려 날고 있다.

검푸른 창공에 수놓인 색색의 발간 꽃등과,

“주고받은 다음엔 보내 주는 건가 봐요.”

곁에서 들려오는 백아의 목소리.

“…보내 줘야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내가 답했다.

“신년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런 거겠지.”

이어 말을 덧붙이며 나는 웃었다.

보름이 지나면, 한 해가 끝난다.

* * *

가판대 위에 놓인 꽃등을 샀다.

한 해가 잘 마무리되길 기도한 뒤 서로 주고받은 꽃등을 놓아줬다. 손에서 떠난 꽃등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멀어지는 꽃등 주변으로 다른 이들의 꽃등도 함께 떠올랐다.

어둠이 내린 하늘에 점점이 번지는 꽃등의 붉은 물결을 바라봤다. 여기 사해필성에 있는 모두의 기도이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 * *

신년을 앞에 두고 아직 동이 트려면 먼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였더라.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아주 오래전의 일인 것만 같다. 저 하늘에 한때 떠올랐던 수많은 붉은 꽃등들이.

장관을 이뤘던 언젠가의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그건 한 해가 잘 마무리되길 바라는 모두의 바람이었고, 기도였다.

그 기도가 그날의 하늘에 수놓였는데.

그로부터 며칠이나 지났더라.

지금 나는 사해필성 성루 가장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날 하늘에서 봤던 붉은 물결이 지상에 펼쳐져 있다. 곳곳에 널려 있는 시신들과 쓰러진 사람들 아래에 고인 새빨간 핏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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