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간밤의 화마가 사해필성 거리 곳곳에 회색 재로 남았다. 전각 사이 피어오르는 탁한 연기 너머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한 손에 쥐고 있는 검날을 힘없이 아래로 늘어트렸다. 아래로 보이는 광경도 지옥이고, 내 마음도 지옥이다.
여기에 오기까지, 두 번의 잊혀진 기억을 봤다. 이로써 전부 다 알게 됐다.
이제 내게 더는 되찾아야 할 기억이 없고, 더는… 소멸시켜야 할 오연의 혼도 없다.
내가 전부 없앴다.
천천히 몸을 돌려, 깎아지른 성벽을 등 뒤에 둔 채 앞을 보았다.
유계는 한쪽 무릎을 굽혀 꿇어앉은 채 나를 향해 검을 치켜세우고 있었고, 남여연은 정신을 잃은 문곡을 힘겹게 부축하고 있었다.
그 뒤로 타 문파의 후지기수들도 있었다. 곤륜산의 이목, 남궁세가의 남궁정, 연화산문의 설휘랑, 제갈세가의 제갈련옥.
…그리고 백아.
백아는 내 앞으로 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런 그의 복부엔 검 날이 박혀 있었다. 동강 난 검 날의 나머지 절반은 지금 내 손에 쥐여 있다.
내가 한 거다.
손에 힘을 줄수록 검 날이 내 손을 파고들어 끝없이 상처를 낸다.
검 면에 빛이 흐리게 반사되며 내 얼굴이 음울하게 비쳤다.
‘연아.’
‘네 검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냐?’
오연의 환청 속에서 나는 검을 휘둘렀다. 횡으로 그어지는 검은 백아를 베지 않았다. 그대로 사선으로 빙글 휘둘러져 내 목을 그었다.
나는 피를 흘리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허공에 산발적으로 흩어진다.
성벽 아래로 추락하는 내게서 검은색 아지랑이가 화악- 피어오른 건 그때였다.
이 불온한 검은색 아지랑이는 오연의 혼을 소멸시킬 때마다 일었다. 그리고 그 아지랑이의 잔흔이 내 곁에 남아 있었던 거다.
검은색 아지랑이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목의 상처에 스며들어, 상처를 아물게 하고 흉을 남겼다. 그러면서 내 안에 남아 있던 단애약수 효능마저 전부 태워 없애 버렸다.
‘네 검은 아무것도 베어 내지 못했구나.’
동시에 머릿속에서 오연의 환청이 아스라이 울렸다.
나는 손을 들어 흉을 매만졌다. 손끝으로 덧그리듯 매만져 보니 마치 ‘끈’과 같은 형상이다. 꼭 목을 매달다 생긴 상흔처럼 생겨선 나를 이 생에 옭아맸다.
“흐… 흐흐흐흑-”
불현듯 웃음이 흘러나왔다. 울음이 섞여 든 광소였다.
나를 잠식해 가는 검은색 아지랑이는 귀기를 띠고 있어 힘없이 늘어트린 손의 손톱이 검게 물들어 간다. 혼몽해지는 가운데 저 멀리, 추락하는 나를 뒤쫓아 성루에서 뛰어내린 백아를 보았다.
왜 나를 쫓아오는 거야?
나를 향해 다급히 뻗어진 백아의 손끝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를 악문 백아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내게 닿을 듯, 닿지 않는 손끝을 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아무리 쫓아도, …이제 이 ‘사형’은 없어.
우리의 사형제지연은 끝났으니까.
“…다신 날 찾지 마.”
귀기가 나를 빠르게 삼켜 가며 내 몸이 어디론가 강제 전이되는 걸 느꼈다. 귀기가 내 의지를 받들어 벌이는 일이었다.
“다음에 보면 그땐… 우사, 널 죽일 거다.”
이제 끝이란 생각에 두 눈을 감았다. 귀기는 나를 거의 다 삼켰고,
“사형!!”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2부
-서막
11년 후.
곤륜산 인근의 여화 객잔.
맨 앞의 낮은 단에 앉아 있는 이야기꾼이 ‘11년 전’이라고 서두를 열기 무섭게, 손님 몇이 웅성거리며 속삭였다.
“11년 전이면, 또 사해필성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인가?”
“문곡과 자고, 그 비극적인 이복형제 말이지?”
“지금은 문곡이 성주라던데. 그나저나 사천당문이 정말 큰일을 했지. …그렇게 명을 달리하다니 아까운 목숨이야. 그런데 그 직후에 사해필성 측에서 사천당문과의 교류를 완강히 끊었다는 게 정말인가? 쯧쯧. 아무튼 영문을 알 수가…….”
“듣기론 남해검문은…….”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에 이야기꾼이 앞의 탁자에 놓인 부채를 집어 들었다.
촤락-!
부채를 폈다 접기를 한 차례 반복하자 소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2층 난간 근처의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1층의 소란을 내려다봤다. 새하얀 멱리를 써서 용모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 기품과 헌앙함은 가려도 숨겨지지 않았다.
남자의 앞에 차려진 음식들은 이미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따듯한 김을 뿜어내던 차는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문득 남자가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흰 소맷자락 아래로 드러난 손은 창백할 정도로 하얬고 가늘고 수려한 손가락 끝의 손톱은 검었다.
남자는 손톱을 세워 찻잔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렸다.
톡- 톡-.
그러자 찻잔 안에서 작게 소용돌이가 일더니 물로 만들어진 작은 새가 솟구쳐 올라왔다. 찻물로 빚어진 작은 새는 찻잔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어느 한 곳으로 날아갔다.
얼마 있지 않아, 새가 날아간 방향에서 한 아이가 달려왔다. 이제 여섯,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얼굴에는 반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쓰고 있는 반가면이 비스듬히 흘러내려 너머의 이목구비가 얼추 보였다.
소년이 남자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몇 가지 단어만 할 줄 아는 이 소년은 남자가 직접 빚은 도자기 인형이었다.
“연연.”
다정한 목소리로 소년을 부르며 남자가 손을 들었다. 손등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멱리 너울을 젖혀 얼굴을 설핏 드러냈다. 멱리 아래로 보이는 붉은 입술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남자는 진연이었다.
그날, 사해필성 비극 때 전부 소멸된 줄 알았던 오연의 혼은 아주 극소하게나마 진연의 귀기에 잔재처럼 남아 있었다.
오연에게 진 빚을 갚기 전까진 이 천라지망에서 오연과 멀어질 수도, 그 인연을 끊어낼 수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연연’은 진연의 귀기에 남은 오연의 혼을 토대로 만들어진 거였다. 때문에 그 외모도 오연의 어린 시절과 흡사했다. 하지만 혼의 대부분이 소멸된 채라 그 속까지 완전히 채울 순 없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진연은 귀곡에서 나와 여기 곤륜산에 왔다. 본인 생에 근간을 이루고 있는 ‘빚’을 갚기 위해서다.
진연을 회귀시킨 건 오연이었다.
그래서 진연은 오연을 위해 선인의 정기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소멸된 혼을 대체할 수 있는 건 선인의 정기뿐이기에,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면 거리끼지 않을 거다. 어떤 인과를 불러오든 상관치도 않을 것이다.
지금 진연의 생에 이유는 오직 오연의 소생뿐이었다.
오연의 혼이 담긴 도자기 인형, 연연이 진연의 허벅지에 두 손을 짚으며 그를 불렀다.
“사부.”
그 2층 난간 아래로, 부채를 한 번 폈다 접는 걸로 주변의 이목을 모은 이야기꾼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늘 할 이야기가 11년 전 사해필성에 관한 이야기인 건 맞지만, 그 애틋한 이복형제에 관한 게 아니라-,”
작게 헛기침하며 이야기꾼은 일부러 말을 끌었다. 좌중의 집중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야기꾼의 의도대로, 일순 곤륜산 여화 객잔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다음 나올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들 어렴풋이 짐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윽고 이야기꾼이 말했다.
“귀곡의 주인인 귀왕야 ‘사혈귀존’.”
‘사혈귀존[師烕鬼尊]’이란 별호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스승 ‘사[師]’에 없앨 ‘혈[烕]’을 쓰는 사혈귀존은 악귀들의 정점에 선 지존이었다. 그리고 한때는 선인의 유일무이한 제자이기도 했다.
스승이었던 오연의 혼을 소멸시킨 극악무도한 죄인. 그자의 이름은 진연이었다.
그리고 이제 곧 그 이름에 하나의 수식어가 더 잇따를 터였다. 바로, 선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덮쳐 정기를 탐하는 악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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