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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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음습한 동굴 안에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넓게 벌린 양팔에 각각 매인 사슬은 동굴 천장과 이어져 있었다.
까마득한 높이의 동굴 천장은 어둠에 잠겨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슬에 매달려 있는 남자는 적의를 입고 있었다. 한때는 백의였으나 천뇌를 맞으며 흐르는 피에 붉게 물들어, 본래의 백색은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마저도 몰아치는 천뇌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 넝마에 가까웠다.
엉망으로 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육신은 어둠 속에서도 희게 발했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가슴, 그리고 군살 없이 꽉 조인 복근까지.
눈을 미혹시키는 그 경탄스런 육신은 천뇌[天雷]로 인한 상흔으로 뒤덮여 있었다. 성한 곳이라곤 없었다.
콰르릉- 쾅쾅!!
다시금 동굴에 우레 소리가 울려 퍼지며 눈부신 빛이 터졌다. 천고[天鼓]였다.
새하얀 빛 속에서 남자의 나신이 일순 점멸했다. 곧 우레 소리가 멎으며 천고가 사그라졌다.
사슬에 매인 남자의 신형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피는 그의 것이었다.
막 천 번째 천뇌를 받아 낸 그 육신에 다시 새로 상처가 생겼다. 이미 생긴 상흔 위로 깊이 덧새겨진 상처에서 많은 피가 흘렀다.
한 번 아물었던 흉도 다시 터지며 핏기가 배였다. 상처가 겹겹이 쌓이니 아물지 않고 계속 덧났다.
극심한 고통에 파리하게 질린 남자의 낯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얗게 질린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방금이 마지막 천 번째였다.
천뇌를 천 번 받아냄으로써 천계의 형벌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 천제가 내릴 천벌이 남아있었다.
[룡존 전하.]
때맞춰 머릿속에서 전음이 들려왔다.
남자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청록색 동공이 형형했다. 그 아래 눈가의 역린엔 천뇌를 맞으며 튄 피가 묻어 있었다.
[천제께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그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남자가 물었다. 끝이 갈라진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11년입니다.]
“……사형은? 혹시 사형이 나를 찾진…, 쿨럭-.”
말을 잇다 말고 남자가 피를 토했다. 천뇌를 천 번이나 맞으며 몸을 무리하게 혹사시킨 탓이었다. 원기가 상하고 내원근에는 금이 가서 가만히 있어도 선기가 샜다.
그야말로 반시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룡존 전하. 그자는 이제 악귀입니다.]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비천정이 답했다.
[그것도 단순한 악귀가 아닌,]
“천제가 내린 결단이 뭔지 말해.”
비천정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남자, 우사가 말했다.
‘우사’. 한 때는 하나뿐인 사형에게 ‘백아’라 불렸으며, 속계에선 ‘백아군’이라 불리며 경외와 칭송을 받았고 그 진신은 천룡인 ‘룡존’이었다.
우사가 팔을 하나씩 휘둘러 자신을 옭아맨 사슬을 끊어냈다. 무참히 끊긴 사슬이 땅 위로 늘어졌다.
하잘것없는 속박이었다.
자세를 바로하며 우사는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넘겼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창백하게 질린 낯빛은 몹시 아름다웠고, 또 몹시 냉랭했다.
살짝 내리깐 긴 눈매에 속눈썹이 드리워지며 깊은 음영을 만들었다. 지독히도 차가운 분위기는, 뒤로 쓸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옆으로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일변했다.
냉랭함에 흐트러짐이 더해지니 절로 수심 어린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연천리래상회[有緣千里來相會]. 인연이 있으면 천 리를 떨어져 있어도 다시 만나고, 무연대면불상봉[無緣對面不相逢]. 인연이 없으면 얼굴을 보아도 만나지 못한다.]
비천정이 답했다.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
[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
내리뜨고 있던 우사의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청록색 동공이 세로로 길쭉해지며 분위기가 급격히 경직되었다. 무겁게 조여드는 공기에 흉흉함이 흘렀다.
[오늘날 룡존 전하께서 천뇌를 맞는 수모를 겪은 건, 그 악귀와의 인연 때문이란 걸 천제([天帝], 천계의 일인자)께서도 아십니다. 천제의 이 결단은 어떻게 보면…,]
“오연이 바로 태자 염행이었어.”
비천정이 전음을 끝맺기도 전에 자리에서 움직이며 우사가 말했다. 우사의 걸음이 향하는 곳은 동굴 입구였다.
다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뛰다시피 걸어 도착한 동굴 입구엔 투명한 결계가 쳐져 있었다. 그 너머는 심연이었다.
햇빛이 들지 않아 검푸른 물살에서 낮은 웅웅거림이 먹먹하게 들려왔다. 심연 특유의 공명음이었다.
우사는 동굴 바깥을 본 후에야 자신이 갇혀 있었던 곳이 어딘지 알았다. 기절한 채 끌려와서 이제야 안 것이다.
여긴 속계(인간계)가 아니라 육계(천계와 인간계를 포함한 여섯 개의 세계. 천계, 인간계, 정령계, 수계, 마계, 화계가 있다)중 한 곳인 ‘수계’였다.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은 그 수계의 어느 수중 동굴 안이었다.
[…태자 염행이요? ‘상천’에서 보신 건가요, 룡존 전하?]
짧은 침묵 끝에 비천정이 물었다.
‘상천’은 천계의 비급과 기밀을 보관한 보고[寶庫]로, 그 장소부터가 기밀로 부쳐져 있다. 그래서 그곳이 어딘지 아는 건 천제와 휘하의 가신 몇몇뿐이었다.
엄중히 감춰진 곳이라 ‘상천’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천제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 우사는 그 ‘상천’의 장소를 알아내려 천제 휘하 가신들을 납치했다. 지고한 신선들의 입을 열기 위해 그들을 감금하고 겁박했다. 그리고 끝내는 ‘상천’에 무단 침입했다.
거기에 더해 ‘상천’ 내부를 제멋대로 휘저었으니 그 죄질이 몹시도 안 좋았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천뇌를 천 번 맞는 형벌은 과한 면이 있었다.
천뇌는 진신을 상하게 하니, 한 번 맞는 것으로도 영이 쇠약해지고 내원근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 천뇌를 천 번이나 내리는 건 사실상 사지로 내몬 것이었다.
하지만 우사는 버텨냈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걸음걸이가 비틀거리고, 늘 아정하던 자세는 흐트러졌지만 어떻게든 다시 꼿꼿이 섰다.
아직 자신이 살아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사는 손을 들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뻗었다. 동굴 입구를 막은 결계에 손바닥이 맞닿으며 날카로운 파공음이 길게 울려 퍼졌다.
곧 묵직한 진동과 함께 결계가 완전히 부서지며 세찬 물결이 동굴 안으로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휘몰아치는 물결 사이로 우사의 신형이 이지러지더니, 커다란 뱀의 그림자가 얼핏 비쳤다.
“……가야 해.”
우사가 나직이 말했다.
[…!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룡존 전하. 천제의 천벌이 내려진 한 그자와는 지척에 있어도 마주할 수 없는…….]
비천정은 미처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리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우사의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곧 우사가 입을 열었다.
“알아. 그러니, 비천정, …나는 그곳에 가야만 해.”
진중한 목소리였다.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 ……그곳에 내가 있으면 사형은 그곳에 있지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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