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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질 사형입니다-75화 (75/141)

<75화>

[……그 말은, 그자가 있지 않길 바라는 장소에 가신다는 건…, 설마…….]

“해야 할 일이 있어.”

앞을 똑바로 응시하며 우사가 말했다. 그 눈에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잠시만요, 룡존 전하…!]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비천정이 우사를 붙잡았다.

[그 악귀, 그러니까…, 진연이 전하를 찾을 수도 있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룡존을 찾지 않은 이였다. 그러니 그럴 가능성이 없단 걸 알면서도 비천정은 ‘진연’이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오직 그자만이 우사의 지금 이 결심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연, 그자의 이름만이 우사를 붙잡을 수 있다.

처음 느꼈던 불길함은 비천정의 머릿속에서 점점 구체화되어 갔다.

‘그 장소’가 어디일지 아주 예측이 안 되는 건 아니라서, 비천정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룡존을 직접 찾아뵙고 싶었다. 하지만 현재 비천정은 하늘에 매인 몸이라 함부로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잠시만요, 룡존 전하…! 분명 인연은 끊어졌지만, 진연은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라서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뚫고 전하를 찾을 수 있어요. 전하께선 아무리 원해도 먼저 다가갈 수 없지만 진연에겐 일말의 희망이 있어요. 진연만 진실로 원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다급하게 말을 이으면서도 비천정은 그 재회가 다시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악귀가 이제 와 룡존 전하를 찾을 리 없으니 말이다.

지난 11년 동안 우사는 수십, 수백 번 귀곡을 찾아갔다.

귀곡에 출입할 수 있는 건 귀족(귀신)뿐이고, 우사는 진신이 하늘에 속한지라 귀신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귀곡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진연을 다시 만나려 애썼다. 오직 진연을 다시 만나야겠단 일념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진연이 귀신들의 정점에 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왕야 사혈귀존.

지존의 자리에 오른 진연이 우사의 기다림을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진연이 귀왕으로 등극된 이후에도 우사는 수십, 수백 번 귀곡으로 찾아가 진연만을 기다렸다.

귀곡 입구 바깥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선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진연은 단 한 번도 우사를 찾아 주지 않았다.

‘…다신 날 찾지 마.’

성루에서 떨어지며 진연이 한 말이 가리키는 바가 명백해졌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깨달음이 우사의 목을 조여왔다.

11년 전 사해필성에서 사형 진연이 버린 것은 그 스스로의 목숨이 아닌, …바로, 사제인 자신이었다.

자신은 버려졌다.

버려졌단 걸 알면서도 기다림을 끝낼 수 없었다.

‘다음에 보면 그땐… 우사 널 죽일 거다.’

이 기다림의 끝에서 마주하는 것이 설령 사형이 아닌 죽음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우사는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지난한 기다림에 어느 순간부터 차츰 원망이 스며들기 시작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사는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도, 진연이 살심을 가진 이유도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사는 갖은 비급과 보물이 있단 천계의 보옥에 무단 침입했다. 보옥에는 천고[千古]의 진리가 적혀 있다는 ‘천고만전전[千古萬全傳]’이 있었으니 그걸 보기 위해서였다.

우사가 천고만전전을 통해 알고 싶은 건 단 하나였다. ‘진연’.

우사는 진연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날 사해필성에서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알게 되면 어떻게든 원망하지 않고 미치지도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망보단 이해를 하고 싶었다.

광증보단 인내로 대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때 잡지 못했던 손을 다시 잡게 되면, 사슬로 감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저 따듯하게 맞잡아주고 싶었다.

이지를 없애 자신만 바라보게 하는 게 아니라, 다정히 눈을 맞추고 싶었다.

발목을 끊기보단 함께 축제 거리를 거닐고 싶었다.

좋은 감정만 주고, 좋은 마음만 갖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날, 우사가 ‘상천’에서 본 천고만전전[千古萬全傳]에는 ‘이계원신’에 관한 기록이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우사는 자신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알았다.

유연천리래상회 무연대면불상봉[有緣千里來相會 無緣對面不相逢]이라.

이제 자신이 걸을 길에 그 또한 복이 되었고, 진연이 자신을 버린 것 또한 다행이 되었다.

[비록 룡존 전하께선 천제의 천벌로 인해 가망이 없지만, 그래도 상대가 귀왕야라 아직 다시 만날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진연이 룡존 전하를 찾을 수 있는 곳에 계셔 주세요.]

빛 한 줄기가 우사가 있는 심연까지 흐리게 비쳐 들어왔다.

사선으로 비쳐드는 빛을 쫓는 청록색 눈의 눈가엔 역린이 있었다.

“비천정.”

우사가 나직이 말했다.

“모든 게 새옹득실[塞翁得失]이야.”

세찬 물살 너머로 일렁이는 커다란 뱀 그림자가 물결을 따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그 마지막 말은 뱀 그림자가 일으킨 회오리 속으로 잦아들었다. 비천정의 시선 또한 뱀 그림자를 쫓아 가 버렸다.

머잖아 동굴이 완전히 잠기며 세찼던 물살도 차츰 잠잠해졌다. 모든 게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는 여전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수중 동굴을 뒤로 한 채 빛이 비쳐드는 심연을 보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갈까.”

고개를 위로 젖혀 까마득한 수면을 올려다보며 ‘그’가 말했다. 일순 청록색 동공이 세로로 길게 수축되었다.

“…찾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눈가엔 역린이 없었다.

“그래도 보고 싶다, 진연 사형.”

* * *

지난 새벽 내린 눈이 바닥에 얕게 쌓였다.

어린 시종 두엇이 사해필성 성벽 외곽을 비질하다가 11년 전 일을 화제로 올렸다. 마침 자신들이 비질하는 장소가 그 악명 높은 사혈귀존이 추락한 곳이기 때문이다.

‘사해혈사’

11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사해혈사의 전과 후로 강호세력의 판도가 나눠질 정도였다.

사해혈사는 사해필성에서 일어난 혈사로, 그 혈사가 빚어낸 일 중 가장 큰 비극은 누가 뭐래도 ‘사혈귀존’이었다.

사혈귀존이 사해혈사를 계기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를 저버리고 사마외도의 끝에 달했으니, 그건 다시 태어난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전해져 내려오길, 11년 전, 사혈귀존은 자신을 잡으러 온 수많은 선사들을 죽이고 성주였던 정소양을 직접 성문에 매달아 버렸다고 한다.

즉, ‘사해혈사’자체가 사혈귀존이 얼마나 극악무도하고 잔악한 자인지 알려 주는 대사건이었다.

알려진 바로, 온전한 인간일 적의 사혈귀존은 선사였다고 한다. 그것도 당대 가장 저명한 선인이었던 ‘오연’의 유일무이한 제자였다.

하지만 타락한 그는 스승인 오연을 죽이고 그 혼마저 소멸시켜 버렸다. 그리고 사해필성에서 ‘사해혈사’를 일으켰다.

다행히 한 선사 덕분에 ‘사해혈사’는 완전한 비극으로 치닫지 않을 수 있었다. 혈사의 마지막 순간에 사혈귀존과 함께 성벽에서 뛰어내려 동귀어진을 꾀한 선사가 한 명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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